<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4화 - >
“서클 올렸다면서! 아니 그보다도 수도에 올라갈 수 있는 걸 안 올라가겠다고 했다면서?!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감사해요. 그리고 아직 결정 난 건 아니에요. 아직 마탑에는 제대로 보고도 안 됐고······. 그런 일이 벌어져도 남겠다고 한 것뿐이지 아직 올라오라는 말도 없었고요.”
“그거나 이거나! 아이고. 아이고! 이런 곳이 뭐가 좋다고 남겠다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 나 같으면 벌써 짐 싸고 올라오라는 말만 기다리고 있었겠다.”
“에이. 그러는 데런 씨도 틈만 나면 마탑 생활이 힘들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조금만 틈을 보여도 물어뜯으려고 이빨을 들이미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불편했다고.”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거랑 목숨이 불편한 거랑 비교하라면 당연히 전자지!”
“아아! 몰라요. 어차피 장로님께도 말씀드렸고 후작 각하께도 말씀드려서 끝난 일이에요.”
“천재들은 다 어디 한 군데씩이 이상하다더니, 진짜였네. 진짜였어!”
내가 네 번째 서클을 만들었다는 소식과 이 곳에 남겠다고 한 발언은 순식간에 테라 방벽의 마법사들에게 퍼져나갔다.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내 선택을 듣고서는 기겁해서 나를 찾아와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냐고 기겁하는 사람들. 전체적인 말투는 험하고 내가 바보짓을 했다는 식이었지만 그 원인은 나를 걱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느껴져서 따듯했던 반응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응은 부정적인 반응들이었다. 주로 나와 친분이 없었던 그리고 3서클의 벽에 가로막혀 있던 마법사들이 그러했다. 자신들은 최소 수 년째 혹은 십 년 넘도록 뛰어넘지 못한 벽을 나는 고작해야 일 년을 조금 넘긴 시간 만에 뛰어넘었으니 질투가 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반응은 매우 소수만이 보였다는 게 다행인 일이었지만.
그러던 사이 시간은 흘렀고 내 소식은 마탑에도 닿았다. 일드와 원더의 예상대로 마탑의 대답은 간단했다. 서클 측정과 그에 따른 작업들을 처리하기 위해 수도에 있는 마탑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마탑주의 직인이 찍혀있었으며 내용 또한 정상적이었기에 미리 대처를 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마탑으로 향해야 했겠지만 지크 후작을 설득한 결과를 톡톡히 보았다.
테라 방벽의 사정이 위급해 마법사를 전선에서 뺄 수 없다는 것. 또한 황제 폐하의 명을 받은 전사를 황제 폐하의 명령 없이 사사로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금까지 이런 이유로 마법사의 소환을 거부 한 적이 없었던 만큼 원더에게 지크 후작을 설득하라는 내용의 편지가 추가로 도착했다는데, 이미 설득을 끝내놓은 만큼 나는 마탑으로 가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
“예. 제 결심은 확고합니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그 뒤로 나는 무척이나 바빠졌다. 원래도 널널한 편은 아니었지만 요즘은 정말로 한 치의 과장도 없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네 번째 서클을 만들었다지만 마법이라는 것은 단순히 서클을 만든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새롭게 생긴 서클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가. 그걸 해내지 못한다면 단순히 마력만 많은 방구석 마법사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 마력을 실전에서 사용하지 못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개인 수련과 별개로 원더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시간을 마련해야 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내가 가장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원더는 지금까지 내가 가르침을 받았던 이들 중 가장 마법사로서 경력도, 경지도 높았으며 성심성의껏 나를 가르쳤다.
내가 빠르게 성장해야 조금 더 많은 명성을 챙길 수 있으니만큼 당연한 일이었지만 가르침에서 욕심이 느껴졌다.
가르침이 부실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단지 방향성이 다르다는 이야기였지. 나는 현재의 능력을 조금 더 가다듬고 능숙하게 활용하려는 질적 팽창을 원했다면 원더는 그런 건 제쳐두고 마력의 양과 서클을 향상시키는 양적 팽창을 원하는 느낌이었다. 이름값을 높여야 하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 뿐 만이랴,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마법만이 아니었다. 능력명 각인. 지금까지는 한 개의 글자를 활용하는 것만이 전부였다.
그러나 서클이 늘어났다는 것은 절대적인 마력의 양도, 한 번에 다룰 수 있는 마력도 늘어났다는 이야기이다. 아직까지는 큰 진전은 없었지만 조금 더 네 번째 고리를 활용하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각인 또한 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방벽에 나가 전투에 출석부를 찍었고 기사들을 따라 몸을 단련하는데도 힘을 쓰고 있었다. 단순히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을 쓰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 곳에서 스스로를 살릴 수 있는 건 스스로 뿐이었으니까. 생존이라는 결과를 위한 수단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어디 한 번 결과를 만들어 보거라. 계획이 되었건 물건이 되었건, 병사들을 조금이라도 덜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리고 그 방법이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면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더불어 지크 후작 앞에서 내뱉었던 말에 대한 책임도 져야했다. 정공법이 너무 세게 들어갔던 것인지 혹은 평소에 지크 후작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방법이 없었던 것인지 따로 나를 불러내 내가 한 말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가져오라는 말을 꺼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질책은 없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말을 꺼낸 장본인으로서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방법을 만들어오라고 해서 뚝딱하고 나올 것 같았으면 이 곳이 이런 악명을 가질 수가 없었겠지!”
테라 방벽을 지키기 위해 소모되는 인적, 물적 자원의 양은 상상을 초월한다. 또한 제국이 여유가 있어서 테라 방벽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제일 효율이 좋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테라 방벽을 유지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테라 방벽에서 몬스터를 막지 못하면 몬스터들은 좁은 입구를 지나 넓디넓은 평야를 마구잡이로 유린할 것이고 그걸 막기 위해서는 더 많은 병력이, 더 많은 물자가 소모될 테니까.
그러나 그나마 효율이 나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나 소모되는 물자가 막대한 양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테라 방벽의 북쪽, 몬스터의 땅을 일망타진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소모율을 줄여보려는 생각을 왜 하지 않았겠는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천재들이 달라붙어 어떤 방법을 내놓아도 끝없는 물량을 자랑하는 몬스터들의 파도 앞에서 결국 제자리걸음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제국이라는 국가 단위로도 포기한 일을 내가 해보겠다고 큰소리친 게 문제라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으로선 무리야.”
4서클. 스물 전에 4서클에 도달한 것은 마탑이 들썩일 정도로 대단한 일임에는 분명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미래에 대한 가능성 때문이지 현재를 보고 들썩이는 것은 아니었다. 막말로 4서클의 마법사는 테라 방벽에서도 스무 명 넘도록 볼 수 있었으니까. 각인 또한 나만이 가진 무기이기는 하나 그 위력은 연쇄를 끊기 위한 가위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가장 간단한 대답은 화력을 키우는 건데.”
평범한 RPG게임을 생각해보자. 현 테라 방벽의 상황을 RPG게임의 주인공에 대입해본다면 답을 내는 것 자체는 간단하다. 도망친다는 키워드가 없는 상황에서 캐릭터의 HP를 조금이라도 아끼면서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니까.
첫 째, 몬스터의 공격이 간지럽게 느껴질 정도로 방어력을 올린다. 둘 째, 몬스터가 공격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빠르게 몬스터를 죽인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방법은 바로 후자였다.
전자는 한계가 뚜렷했다. 제아무리 뛰어난 방어력을 가진 갑옷을 만든다 한들 모든 병사들이 그 갑옷을 입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또한 갑옷은 버틴다하더라도 그 내부의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의 신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래서야 중요한 뇌와 심장은 지키되 양 팔과 양 다리는 내주는 꼴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
“화력. 화력······!”
이 시대의 무기라고 해봤자 아직 냉병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구에서 기사들의 몰락을 가져온 화약무기는 대륙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인 제국, 그 최전선인 테라 방벽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표적인 원거리 무기는 활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화약무기를 대신해 줄 마법사들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트레뷰셋으로는 성벽에 딱 달라붙어있는 몬스터를 잡을 수 없었으니 단시간 내에 이거다하는 방법이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전생에서도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내가 화약의 제조법을 알고 있을 리도 없었으며 화약을 구했다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 화약을 활용할 수 있는 무기는 또 어떻게 만들 것이며 만들었다 하더라도 사람 좀 다치게 하는 수준의 위력으론 어림도 없었다. 이 곳에서의 적은 인간이 아니라 두꺼운 가죽과 재생력을 가진 몬스터였으니까.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지······.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일말의 가능성조차 생기지 않으니까.”
나에겐 화약에 관련된 지식도, 무기에 관련된 지식도 없다. 그러나 마법이 있고 각인 능력이 있다. 그 증거로 구조는 전혀 다르지만 엉성하게나마 총의 역할을 하고 있는 권총이 있지 않던가. 병사들은 마력을 다루지 못하니 지금까지는 의미를 가지지 못하지만 연구를 하다보면, 시도를 하다보면 또 모를 일이었다.
남은 시간은 9년 하고도 6개월. 처음 이 곳에 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무척이나 길게만 느껴지던 시간이 처음으로 그리 길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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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따뜻해짐에 따라 테라 방벽은 또다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을 지나 몬스터들이 숫자를 불려가는 시기였으니까. 그래서 나와 동료들은 정찰을 위해 말을 탄 채, 몬스터들의 대지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번 만큼은 전투가 목적이 아닌 상황 파악이 우선이었기에 4인 1조로 이루어진 - 기사 셋과 마법사 하나 - 수 개의 조가 또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마법사들은 참 신기한 걸 만들어낸단 말이야. 둘러보기만 해도 자동으로 지형이 그려지는 것은 물론이고 몬스터까지 찾아내다니, 괜히 천재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구만.”
“과찬이세요.”
손바닥 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종이에는 지도(地圖)를, 내 몸에는 탐(探-찾을 탐)의 각인을 새겼다. 그러자 이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종이에는 나를 기준으로 주변의 지형들이 표시되었다. 네 개의 서클에 익숙해지며 각인 또한 발전을 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각인 중 유용하기로는 산 손에 꼽을 수 있는 각인이었다.
“정면에 마력 반응이에요. 마력 크기로 봐서는······상위종인 것 같은데요.”
“그래?”
아니나 다를까. 얼마 가지 않아 사이클롭스가 하나뿐인 눈을 번득이며 사냥감을 찾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자 기사들도 내 말만 듣고도 진행경로를 바꾸었다. 어디까지나 정찰이 목적이었기에 전투가 예상된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으니까.
“너 때문에 정찰 한 번 편하게 한다! 다른 때 같았으면 도망친다고 죽어라 말을 재촉했을 텐데.”
그렇게 순조롭게 정찰을 진행하던 와중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마력 반응에 눈을 비볐다. 순간적으로 지도가 망가진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대한 마력 반응이었다.
“저기, 모리토 경.”
“왜 그래?”
“방향을 좀 틀어야 할 것 같아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력 반응이 있는데······.”
“있는데?”
“단순히 마력의 크기로만 따지면 상위종이 수백, 아니 수천 마리는 모여 있는 것 같아요. 도망칠 때 도망치더라도 확인은 해봐야 할 것 같은데······.”
나는 말끝을 흐렸다. 내가 말하면서도 믿기지가 않아서. 오크가 리자드맨 같은 몬스터가 수백, 수천마리라면 모를까 상위종이 수천이라니.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익힌 기사들조차 믿지 못하고 망가진 것 아니냐며 묻고 있었다.
“일단······가보자. 네 말이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야. 네가 마력 반응을 느꼈다는 그 곳에 뭐가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야 해.”
나와 동료들은 잔뜩 긴장한 채, 말을 몰았다. 점점 근원지로 향할수록 말이 줄어들었고 주변을 살피는 빈도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근원지가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내가 예상했던 대형 몬스터는 자취조차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이 정도 거리라면 이미 보이고도 남았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없잖아?”
마침내 도착한 근원지. 그러나 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도에는 여전히 처음 보았던 마력 반응이 계속해서 탐지되고 있었다. 각인이 잘못 된 것인지 아니면 이 곳에 우리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나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4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