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3화 - >
“일드님.”
“왜 그러느냐?”
“수도로 올라가지 않겠습니다.”
“수도로 가지 않겠다니?”
“저는 이 곳에 남고 싶습니다.”
대화를 할 때,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는 알아차려도 구체적인 생각까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일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것만 같았다.
내가 잘못 들었나?
애가 뭘 잘못 먹었나?
서클을 올리기 위해 지능을 재물로 바쳤나?
등등 내 말을 믿지 못하는 생각들로 가득하겠지. 그리고 이 대화를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기도 할 것이다.
모두가 이 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데, 불법적인 방법도 아니고 마탑에서 수도로 모셔간다는 것을 싫다고 하는 꼴이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바보같이 느껴지겠는가. 그러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결코 홧김에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민을 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아니, 도대체 왜? 잘 생각하거라. 기회는 붙잡을 수 있을 때, 붙잡아야 한다. 기회를 놓친 후에 후회해봤자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 법이다.”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더 이상 목숨의 위협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더 수준 높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네 앞길을 장애물 하나 없이 깔끔한 길로 만들어준다는데 왜 가지 않겠다는 건지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구나.”
일드의 말은 대체로 옳았다. 그러나 틀린 점이 한 가지 있다면 내 앞길에 장애물 하나 없을 거라는 점.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혹은 선배 마법사들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마탑은 그리 사정 좋은 곳은 아니었다.
지금의 마탑을 단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면 바로 ‘고인물’이었다. 한정된 재화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해 흙탕물을 튀기는 고인물. 그런 곳에 나라고 하는 변수가 떨어졌을 때, 얌전히 수련에만 열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런 배경도 없이 혈혈단신인 나로서는 필시 높으신 분들의 뜻에 따라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겠지.
어디 위로만 그럴까. 아래로도 고생을 많이 할 것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받는 시선은 두 가지 뿐이니까. 경외심 혹은 시기심. 하물며 마탑의 마법사들은 주변으로부터 떠받들어지던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순순히 나라는 굴러온 돌을 받아들일까? 내 생각엔 아니올시다였다.
“마탑으로 가는 것이 제게 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하면 이 곳, 테라 방벽은 차라리 낫다. 목숨의 위협은 느끼겠지만 충분히 준비하고 대비한다면 견뎌낼 수 있다. 오히려 대놓고 목숨이 위험한 만큼 막기에는 더 쉬울 수도 있다. 그 뿐이랴, 이 곳에서는 시기심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모든 이들이 그렇다고 할 순 없겠지만 서로를 시기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최소한 한 번씩은 서로에게 목숨을 빚졌다. 주변 사람이 강해진다는 것은 자기가 살 확률도 보다 높아진다는 뜻이었으며 덕분에 그리스의 건과 같이 정보 교류도 활발했다.
게다가 이 곳에 오게 된 사람들 중 일부는 그런 정치싸움에 휘말린 끝에 온 사람들도 있어 그런 분위기가 생기기가 힘들었다.
일드도 마탑을 떠난 지 오래 되어서, 이 곳의 분위기에 익숙해져 그런 점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 뿐, 곧 마탑으로 가는 것이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나와의 대화를 통해 깨닫겠지만.
“후.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해줄 수 없다는 게 참 슬프구나. 진정한 마법사라면 스스로를 갈고닦아 경지에 오르는 것을 생각해야 하거늘, 어쩌다가 남을 끌어내리는데 더 열중을 하게 됐는지······. 하지만 이건 알아두어라.
네가 가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안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탑에 적을 두고 있는 마법사로서 탑주님의 명령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따라야 한다. 네가 말한 이유들은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만큼은 일드의 말이 옳다. 고작해야 다른 마법사들과 부대끼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불러들이지 않을 리가 없지. 그러나 이 또한 방법은 있다. 마탑주는 제국의 마법사들에게 있어 황제나 다름없는 사람이지만 진짜 황제는 아니었으니까. 윗선의 명령을 받아들이기 싫다면 그보다 더 윗선을 설득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그만한 성취라니, 젊을 적의 나를 보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워.”
“과찬이십니다.”
“그래. 일드에게서 전해 들었다. 설령 마탑에서 너를 소환하더라도 이 곳에 남고 싶다고?”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마탑주를 무릎 꿇릴 수 있는 사람은 황제가 유일했으나 지금의 내가 황제와 일대일로 대화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그냥 마탑으로 갔겠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를 시기하고 질투할지언정 앞에서는 알랑방귀를 뀔 테니까.
황제의 눈치가 보여서라도 나에게 손을 댈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우회로를 찾았다. 모로 가든 일단 서울만 도착하면 되는 일 아닐까?
“예. 그래서 장로님께서 설득을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흠, 굳이 이 곳에 남겠다는 네 뜻은 기특하지만 탑주님을 설득하는 것은 나로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뭔가에 한 번 꽂히시면 어지간해서는 굽히지 않으시는 분이니, 안타깝지만 나로서는 너를 도와줄 수 없을 것 같구나.”
“괜찮습니다. 장로님께서 설득을 도와주실 분은 탑주님이 아니니까요.”
황제와 가까울 뿐 아니라 스스로도 마탑주에게 뒤지지 않는 직위를 가진 사람. 더불어 이 곳에 내가 남음으로서 이득이 되는 사람. 내가 원더를 통해 설득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탑주가 아닌 테라 방벽의 지휘관, 지크 후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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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는 눈앞의 청년을 쳐다보았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 그러나 남들은 최소 이십 년 이상을 수련해야 발을 딛을 수 있는 4서클에 오른 뛰어난 마법사이기도 했다. 그를 처음 볼 때만 해도 꽤나 재능 있는 마법사였으며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는 말을 몇 번인가 전해 들었지만 이런 사고를 칠 것이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곳에 남고 싶다라······.’
흥미롭지 않은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천재는 또 한 번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행동을 하려는 중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지금의 대화였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대충 마탑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알고 있는 것 같고, 잘만 이용하면 내가 중앙으로 돌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원더는 노년의 나이다. 동시에 마탑의 장로 중 한 명이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방 중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테라 방벽까지 오게 된 이유는 마탑 내부의 정치싸움의 패배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장로의 위치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면 이 곳까지 오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그의 드높은 자존심을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 년. 그는 중앙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만으로 이 곳에서 버티고 있었다.
“좋아. 네 말처럼 후작 각하를 설득하는 것을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 제자가 되거라. 그럼 나도 최선을 다해 너를 도와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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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되라고?’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리 이 곳까지 밀려왔다지만 원더는 마탑의 장로이자 6서클의 마법사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이 곳에 남음으로서 포기해야 할 양질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제안에서 호의만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어떡할까.’
지크 후작을 설득하기 위해 원더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지크 후작과 대면하는 것 자체는 일드를 통해서도 가능했으며 설득도 자신이 있었다.
다만 확률과 신뢰의 문제였을 뿐, 한낱 마법사 한 명의 말보다는 원더의 말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리지 않겠는가. 어떻게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 냄과 동시에 원더의 제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장로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냐?”
원더는 설마 내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지 몰랐다는 듯 약간은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간단히 말해 마탑의 장로들은 마법으로는 제국에서도 손에 꼽는 위인들이었으니까. 그들의 제자가 되기 위해 수많은 유망주들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애초에 거절이라는 대답을 생각 못했을 수도 있다.
“제겐 이미 스승님이 계십니다. 아무리 장로님이시더라도 스승님과의 연을 저버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으음.”
내 대답에 미처 그 점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 곳이나 그렇겠지만 스승이 제자를 버릴 수는 있을지언정 제자가 스승을 버린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말을 꺼낸 이상 설령 원더가 강제로 나를 제자를 삼으려 하더라도 그가 원하는 목적은 이룰 수 없을 터, 동시에 여지를 남기는 대답이기도 했다. 그의 목적이 진실로 나를 가르치고 싶은 것은 아닐 테니까.
“스승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미안하구나. 너에게도, 네 스승에게도 무례한 말이었다. 대신 다른 제안을 하마. 스승이 아니어도 좋다. 가끔 나에게로 와서 가르침을 받거라. 너처럼 재능 있는 아이를 가르칠 수 있다면 꼭 스승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제가 어떻게 거절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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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원더에게는 내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정확하게는 나라는 천재가 탄생하는데 그의 힘이 있었다는 명성이 필요한 것이겠지만. 그러니 그 높은 자존심을 약간이나마 굽히면서까지 제자가 아니어도 된다고, 자신의 가르침을 받으면 충분하다고 하는 것이겠지.
나로서도 만족할만한 거래였다. 원더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피했고, 원래의 목표였던 지크 후작을 설득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더불어 제자가 아님에도 고서클의 마법사게에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아, 참고로 나에게 스승님은 없었다. 마법을 가르쳐 준 사람은 있지만 사제의 연을 맺은 것도 아니었고 가문에 속한 마법사로서 역할을 다한 것뿐이었으니까.
“감히 내 앞에서 나를 방패로 삼고 싶다는 말을 하다니, 재미있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원더와 함께 지크 후작을 만날 수 있었다. 내 뜻과 원더의 설득을 모두 들은 지크 후작은 위와 같은 말을 내뱉었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어느 정도는 그의 흥미를 이끌어낸 것 같기도 했다.
“뭐, 어렵지 않지. 너처럼 재능 있는 젊은이가 스스로의 뜻으로 이 곳에 남고 싶다는데 그렇게 못 해줄 이유도 없고 말이야.”
“제 뜻을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진짜 이유는 뭐냐?”
“진짜 이유라 하심은······.”
“거짓말 하지 마라. 이 곳에 오고 싶어서 오고, 남고 싶어서 남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다들 기회만 되면 이 곳을 탈출하고 싶어 하지. 그런데 뭐? 황명을 받들어야 하기 때문에 남겠다고? 언제부터 너희 마법사들이 그렇게 황명에 죽고 사는 존재였는지 나로서는 처음 아는 사실이니까.”
지크 후작의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동시에 내가 선택의 순간에 도착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여기서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나를 바라보는 지크 후작의 시선이 바뀔 것 같다는 생각까지도.
“하하. 후작 각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들은 언제나 황제 폐하의 명을 최우선으로······.”
“후작 각하. 언제까지 저 몬스터들에게 제국의 소중한 백성들을 먹잇감으로 줘야 하는 것입니까?”
지금 이 순간, 선택지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솔직하게 정면 돌파를 하는 것뿐.
“호오?”
“어제 추모제가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제 동기도 한 명 있었고, 생사를 함께한 수많은 전우들이 있었습니다. 내년에도 수많은 전우들을 떠나보내야 할 것이고, 몇 년 뒤에도 똑같을 것입니다. 저는 단지 이 지긋지긋한 연쇄를 제 손으로 끊어내고 싶을 뿐입니다.”
말을 끝마친 나는 조심히 지크 후작의 눈치를 살폈다. 내 말이 예상외였는지 유심히 나의 눈을 마주하던 지크 후작은 이내 껄껄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핫!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연쇄를 끊고 싶다? 그게 가능하리라고 보느냐? 제국이 지금까지 이 연쇄를 끊을 수 있음에도 상황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해보겠습니다.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테라 방벽은 영원히 사지로 남게 될 겁니다. 수십 년 뒤, 제 아들이 이 곳에 올 지도 모르고 제 손자가 올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제 선에서 끊어보겠습니다.”
짝짝짝짝-
“암,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법이지! 이런 말을 기사들도 아니고 고작해야 스물도 되지 못한 어린 친구에게서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좋다. 네 말대로 네가 이 곳에 남을 수 있도록 내가 막아주마. 대신 너는 네가 한 말을 꼭 지키도록 해라. 네 뜻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내가 지켜보겠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3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