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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12화 (12/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2화 - >

가이우스와 친구였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친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친구라고 불릴만한 관계까지는 아니었다고 대답하겠다.

굳이 말하자면 동네 아는 형? 그는 나보다 일곱 살이나 더 많았으며 마법사답게 자신의 일이 아니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몇몇을 제외한 여타 마법사들과도 딱 그 정도 관계였으니 나에게 있어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가이우스가 여타 마법사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와의 연결점이 하나 더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동기’라고 불리는 연결점이.

가이우스는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시간에 태어나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와 나의 공통점이라고는 성별과 마법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밖에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통지서를 받았고 똑같은 날에 황도를 출발해 똑같은 날에 테라 방벽에 도착했다. 그 때부터 나와 가이우스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비슷한 시기에 잠들었으며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전투를 치렀다. 그런데 죽었다. 날 포함해 고작 아홉 명. 두 자리 수도 안 되는 숫자에서 하나가 줄어들었다.

“살아 돌아왔구나! 어디 다친 곳은 없고?”

“······로랑 씨.”

“어, 소식 들었나보구나.”

오히려 나보다는 로랑이 가이우스와 더 친했다. 나이도 비슷했고 일드 혹은 주변 마법사들과 말을 터 친분을 나눴던 나와 달리 아직까지는 인정을 받지 못해 대화를 나눌 상대가 서로밖에는 없었을 테니까.

실제로 둘이 어울려 다니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로랑의 태도는 친구가 죽은 사람치고는 너무나 태연하고 멀쩡해보였다. 오히려 내가 더 침울해 보일만큼.

“뭘 그렇게 침울해있어? 사람이 죽는 게 처음도 아닐 텐데.”

“로랑 씨는 괜찮나요?”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그러나 그 태도가 로랑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던가, 사실은 가이우스와 친한 사이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었다.

단지 가이우스의 죽음은 벌써 보름이나 된 일이며 그 소식을 들은 지 불과 하루도 채 안 된 나와 달리 로랑에게 가이우스의 죽음은 벌써 보름 전에 일에 불과했다.

수십 년을 함께 산 가족의 죽음도 일주일이면 나름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는데 제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보름이나 지났다면 외견만큼은 정상대로 돌아오겠지.

“사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잖아. 이 테라 방벽이라는 곳은. 우리들이야 병사들처럼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어나가는 건 아니더라도, 죽음이 멀리 떨어져있는 것은 아니니까. 가이우스가 죽었다고 해서 그게 특별한 일은 아니지.”

로랑의 말이 맞다. 이 빌어먹을 곳은 너무 사람이 많이 죽는다. 특별해야 할 ‘죽음’이 일상이 되어버린 곳. 하루라도 사람의 시체를 보지 않으면 축하 파티를 열어야 하는 곳에서 나는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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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의 사인은 공식적으론 추락사였다. 주변에 있었던 병사들의 말에 따르면 어느 때와 같이 끝도 없이 밀려오는 몬스터를 막아내던 중, 이름조차 모르는 한 몬스터가 성벽을 올라오더니 긴 혓바닥으로 가이우스의 몸을 칭칭 감고 성벽 밑으로 떨어뜨렸단다.

물론 가이우스도 곧 죽어도 마법사였기에 테라 방벽이 높다한들 침착하게 대처만 했다면 죽음만큼은 피할 수 있었겠지만 그 당시 방벽 밑에는 숫자를 셀 수도 없이 많은 몬스터들이 오직 인간을 잡아먹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달려들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설령 추락사는 피할 수 있었다 결국엔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가이우스의 시체는 찾지도 못했다. 아마 몬스터의 몸속에 갈기갈기 찢겨져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겠지. 딱히 가이우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테라 방벽에서 죽은 사람치고 멀쩡하게 죽은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그런 가이우스가 남긴 것이라고는 갑작스럽게 끌려가며 놓쳐버린 나무 지팡이 하나. 그리고 방에 남아있을 소지품 약간과 테라 방벽의 방어자들이라면 반드시 쓰게 되는 유언장 하나가 전부였다.

아마 그 물건들은 그는 명예롭게 싸웠으며 제국의 이름으로 추모한다는 황실의 인장이 찍힌 편지와 함께 가이우스의 가족들에게 보내질 것이다. 그나마 마법사니까 유품이라도 받지, 일반 병사들은 그조차도 받지 못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가이우스로서는 그나마 다행인 일이겠지만.

“모두들 수고 많았다. 그대들의 희생 덕분에 그대들의 가족들이, 친구가, 멀게는 제국 전체의 백성들이 오늘도 안전하게 죽음과 떨어져 살아가고 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나, 지크문트 지크 후작이 그대들의 희생에 경의를 표한다. 또한 12월 31일부로 그대들에게 전역을 명한다. 모두들 마음 편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가이우스가 죽든 말든 테라 방벽의 상황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테라 방벽의 역사를 통틀어 가이우스처럼 죽은 이들의 숫자는 셀 수조차 없이 많았고 이제 와서 한 명 더 죽었다 한들 무언가 변할 리 없었으니. 여전히 몬스터는 자신들의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끝도 없이 밀려왔다.

그러던 사이 바깥의 날씨는 잠시만 가만히 있어도 손발이 꽝꽝 얼어버릴 정도로 추워졌다. 물론 몬스터를 죽이다보면 전투에 의한 열기로 그런 점을 잊어먹을 때가 많았지만.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일 년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동시에 일 년 간 테라 방벽에서 죽은 모든 이들을 위한 추모식이 열렸다.

최소한 수천 명을 대상으로 한 추모식치고는 단출하기 짝이 없었다. 진행자는 지크 후작, 추모자들은 그들의 동료였던, 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었고 추모 시간 또한 결코 길지 않았다.

죽은 이를 추모한다고 몬스터들이 그걸 알고서 쳐들어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당장의 생존에 급급해 충분히 신경써주지 못했던 죽은 이들을 위해 잠시 시간을 가질 뿐이었다.

“편히 가기를.”

가이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무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들의 가족만큼은 배 곪지 않으며 살 수 있을 테니. 물론 남편을, 아들을, 아버지를 잃은 이들에게 그깟 돈 몇 푼이 무슨 위로가 되겠냐만은 적어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동생이 한 명 있대.”

“동생이요?”

“부모님은 평범한 농사꾼이신데, 운 좋게 마력 친화도가 높아서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나. 가이우스가 집안의 희망이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지. 그나마 한 명 남은 동생까지 끌려가진 않을 테니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가이우스를 추모하는 도중 나눈 로랑과의 대화는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두 명뿐인 아들 중 한 명이 죽은 것을 나머지 한 명까지는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겠다라며 불행 중 다행이라고 위로해야 한다니, 진짜 다행은 그들이 무사히 가족들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것일 텐데.

“추모 다했으면 돌아가자. 날도 추운데,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이 더욱 더 슬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내가 한 번 죽어봤기 때문에.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고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고 계실 어머니를 기억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 날 저녁, 오랜만에 몬스터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한 축복할 만한 저녁에 나는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덜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두 손바닥을 뒤통수에 댄 채, 침대에 누워있으니 잠이 찾아 올만도 하건만 하는 생각이 기특하기라도 한 지, 조금의 졸음도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내 생존에만 급급했다. 이게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솔직히 말해 이 곳에서 생존이 아닌 다른 것에 목적을 둔 사람은 지크 후작이 유일할 테니까. 그러나 오늘의 추모식을 함께하고 내 안의 생각이 약간은 바뀌었다.

내게 있어 생존은 여전히 최우선 과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내가 죽을 랑 말랑 하는데 누굴 신경 쓰고 누굴 도와주겠는가. 다만 다른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 능력을 노력 끝에 얻은 것이 아닌 어쩌다보니 얻은 까닭에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 능력을 나만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써야 한다고. 나만의 사리사욕만을 위해서 쓰는 것은 이 능력을 얻게 된 취지와는 다르다는 강박관념에 말이다. 어리석은 생각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특별해야 할 죽음이 일상이 되어버린 곳. 그 곳에서 죽음에게 다시금 특별함을 안겨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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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뭐라고 했느냐?”

“서클을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서클을 하나 더 만들었다고? 네가 열여덟, 아니 해를 넘겼으니 열아홉이지. 그런데 4서클에 도달했다고?”

마음가짐의 변화 때문이었을까. 그 동안 죽을 둥 살 둥 생존을 위해 싸우던 경험이 마침내 한계를 뛰어넘은 것일까. 어제 밤, 어느 때와 똑같이 저녁 명상을 하던 도중 나는 심장에 하나의 서클을 더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 사실을 나의 상관인 일드에게 보고했다. 인재는 적재적소에 쓰여야 하니까. 3서클과 4서클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다른 만큼, 또 서클을 올리는 데 일드의 도움이 있었던 만큼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일드는 도통 내 말을 믿지 못했다. 머리로는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일드에게 4서클의 기본적인 마법을 보여주고 나서야 - 실전에 사용하기는 무리였지만 충분한 시간과 여유가 주어진다면 시전 자체는 가능했다. - 놀란 눈은 여전했지만 내 말을 믿어주었다.

“먼저 축하한다는 말부터 해야겠구나. 스물이 되기도 전에 4서클이라니, 믿기 어려운 성취다. 솔직히 말해 질투가 날 정도야. 정말 축하한다.”

일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스물 전에 3서클에 도달하는 마법사는 흔치는 않지만 있었다. 소위 천재라고 불리는 이들이 그랬다. 애초에 천재가 아니면, 최소한 수재라고 불리는 이들이 모여 마법의 길을 걸으니 그 중 유난히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4서클은 다르다. 스물 전에 4서클에 오른 사람은 일드가 알기로도 몇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천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천재를 뛰어넘은 귀재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수준이었다.

“많은 것을 가르쳐주신 덕분입니다.”

“덕분은 무슨. 다 네가 노력한 덕분이지. 가르침이 없었더라도 시간은 조금 더 걸렸을지언정 큰 차이는 없었을 거다. 그나저나 빨리 원더님께도 알려드려야겠다. 분명 믿지 못하시겠지만 말이야.”

축하는 축하고, 일드는 이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생각했다. 원더를 통해 마탑에 이 소식이 들어가면 아마 마탑이 발칵 뒤집힐 거다.

배경이 없거나, 실력이 없는 자들의 종착점이나 다름없는 테라 방벽에서 십 년, 아니 이십 년에 한 명 나올까하는 귀재가 나타났으니까. 아마 어떻게 해서든 테라 방벽으로부터 빼내려고 하겠지. 재능이 있다하여 모두가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확률이 높은 것은 맞으니까.

“그리고 또 축하한다. 조만간 수도로 올라갈 수 있을 게다. 배경에 상관없이 너 정도의 재능이라면 이런 곳에 놔둘 위인들이 아니니까. 어쩌면 마탑주께서 직접 너에게 가르침을 내리려 할지도 모를 일이고.”

동시에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재능이 있어 보이기에 한 번 키워보려고 했는데 고작 일 년도 되지 않아 곁을 떠나게 되다니, 조금 더 성장을 지켜보고 싶었는데 어려울 듯싶었다.

‘애초에 내 그릇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재능이라는 것이겠지.’

일드 역시 남에게 뒤처지지 않는 성장을 해왔다. 스물 중반이 되기 전에 3서클에 올랐고 서른을 넘어 4서클을. 그 상태로 몇 년 동안이나 전전긍긍하다가 내쫓기듯 테라 방벽에 오게 되어 마흔이 조금 넘어 5서클에 다다랐다. 충분히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성취였다. 그러나 귀재 앞에서는 천재라 불리는 이들조차 빛이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일드의 귀로 예상치 못한 말이 들려왔다.

“일드님.”

“왜 그러느냐?”

“수도로 올라가지 않겠습니다.”

“수도로 가지 않겠다니?”

“저는 이 곳에 남고 싶습니다.”

일드가 바라보는 레닐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2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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