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08화 - >
“그래. 삼일 뒤 우리는 테라 방벽을 떠나 북쪽, 몬스터들의 땅으로 향한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만에 하나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싶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내가 잘못들은 것이 아닌 모양이다. 삼일 뒤, 테라 방벽을 벗어나 몬스터의 본거지로 향하는 인원에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
“딱히 질문 없으면 제 할 일들 하러 가도 좋아. 레닐, 자네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인데 잠깐 남도록.”
“자자, 우리는 이만 할 일 하러 갑시다. 다시는 못 돌아올 수도 있는데 신변정리는 해 놔야지.”
“신입 겁먹겠네. 못 돌아오기는 누가 못 돌아온다는 거야?”
“누구긴 누구야. 여기서 확실히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나?”
“적어도 나는 아니니까 이 손 떼게. 부정 타게 시리······.”
웃음과 함께 그들은 소회의장을 떠났다. 얼핏 듣기에는 호탕하고 자신감서린 웃음이었으나 조금만 주의 깊게 들어보면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을 애써 숨기려는 웃음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왜?!’
테라 방벽을 벗어나 더 북쪽의, 인간의 발걸음이 허용되지 않은 땅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니,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테라 방벽.
두 말해 무엇 할까. 제국을 지키는 울타리이자 병사들에겐 스스로의 목숨을 지켜주는 방패이자 갑옷이다. 그것도 단 한 번도 뚫린 적이 없는 철벽의 방패. 그런데 오늘, 위로부터 떨어진 명령은 그 방패와 갑옷을 벗어던진 채, 무기 하나 들고 몬스터들의 본진으로 향하겠다는 말이잖은가.
“가고 싶지 않다는 얼굴이군.”
“제국의 녹을 먹고 자라 제국의 품 안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렇기에 제 생각이 어떻든 명령에는 따라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필요성에 대해 납득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개죽음을 당하긴 싫다. 이건가?”
내가 애써 돌려 말한 핵심을 짚는 일드의 말에 순간 멈칫했다. 나와 일드의 친분이 어떻던 일드는 나의 상관이다. 그 앞에서 위로부터 내려온 명령에 개죽음이라는 말이 나와서 좋을 것이 없었다.
끄덕-
“······그렇습니다. 테라 방벽은 제국을 지키는 방패입니다. 단 한 번도 뚫린 적이 없는 철벽의 방패였고요. 굳이 방패를 집어던진 채,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드의 성격을 믿고 질러봤다. 지난 두 달 간 내가 겪었던 일드는 무작정 명령에 따르라며 일갈하는 고집불통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이유를 설명해주고 명령에 납득하여 스스로 따르게 하는 유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테라 방벽이 없었다면 이런 교환비는 꿈도 꿀 수 없었을 테니까. 다만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말해둘 것은 가을 원정은 매년 있어왔던 일이라는 것이네. 자네 생각처럼 원정이 개죽음에 불과했다면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을 리가 없겠지. 안 그런가?”
맞다. 테라 방벽의 지휘관은 제국의 세 자루 검 중 하나인 지크 후작. 사실상 제국의 북부를 책임지는 테라 방벽에 단순히 개인의 무력이 뛰어나다하여 임명할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궁금한 것이다. 어떤 이득이 있기에 방벽을 뛰쳐나가야만 하는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기에 모두가 납득할 수밖에 없는지.
“익숙해져버렸군.”
“예?”
“한 달 정도 전에 내가 한 말을 기억하나?”
한 달 전이라, 지금의 이야기와 종합해서 생각해보면······. 일드가 하고자 하는 말은 방심하지 말라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경험을 쌓고 자신감을 얻는 것은 좋지만 만용으로 이어져 방심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말씀하셨죠. 제가 방심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자네를 탓하는 것이 아닐세. 이건 경험의 문제이니까. 조금 더 시야를 넓혀보게. 내가 이유를 알려줄 수도 있겠지만 자네가 직접 깨닫는 편이 후일을 위해서도 더 좋을 게야.”
시야를 넓혀보라고? 그 말은 곧 내가 바라보는 시야가 좁다는 것이다. 시야가 좁다는 건 당장 눈앞의 일밖에 보지 못한다는 뜻. 일드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일드의 말처럼 이건 경험의 문제다. 정말 뛰어난 천재라면 경험조차 뛰어넘을 수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기에는 과분했다. 수재라면 모를까.
‘대형 몬스터, 겨울, 원정······.’
시기는 겨울이 다가오기 전의 가을, 목표는 대형 몬스터의 제거. 대형 몬스터는 무척이나 까다롭고 골치 아픈 존재다.
숫자는 적지만 한 개체가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은 단순히 숫자로만 계산할 바가 못 되었으니까. 그 숫자를 줄여놓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방벽을 걷어차고 나갈 정도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그 증거로 지금까지 잘 막아왔지 않은가.
“짐승들이 왜 겨울잠을 자는지 아나?”
“아!”
그 때 던져진 작은 힌트. 그 한 마디 말은 복잡하게 꼬여버린 실뭉치의 실마리를 찾게 해주었다. 나머지는 실마리를 따라가며 차차 풀어내면 될 뿐. 이제야 시야를 넓혀서 생각하라는 일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해보자하는 일이 아니었어.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애초에 우리들에게 선택지는 없었던 거다. 어떤 손해가 따르더라도 할 수밖에 없는 일. 그게 가을 원정의 정체였다.
“역시 자네는 가르치는 보람이 있어. 하나를 알려주면 두셋을 아니 보람이 있을 수밖에 없지.”
“이제야 익숙해졌다는 말이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습니다.”
나는 한 마디로 승리에 익숙해진 것이다. 수십, 수백 번의 승리를 거둬봤자 언제나 수세에 몰린 쪽은 우리이고, 공세로 나서는 쪽은 몬스터들인데. 애초에 인간의 관점이 아닌 몬스터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하는 이야기였다.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다보니 어느새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다고 착각했다. 공격의 세기를 정하는 건 우리가 아닌 몬스터들인데.
“몬스터의 입장에서 보면 간단히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겨울이 되면 먹을 것이 부족해질 테니, 더 많은 수의 몬스터가 밀려 내려오겠죠.”
약육강식. 몬스터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자 할 때 가장 적절한 말이 아닐까. 그러나 몬스터들도 겨울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약한 몬스터들은 식량을 아끼기 위해 번식을 줄이고,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점점 안으로 들어갈 테고 대형 몬스터들은 그 거대한 몸을 유지시킬 막대한 양의 식량을 찾기 어려워지겠지. 그러나 가까운 곳에 먹을 것이 풍부한 곳이 한 곳 있지 않은가.
어차피 힘이 비슷한 몬스터끼리는 어지간해서는 싸우지 않는다. 승리도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큰 상처를 입으면 이긴다 하더라도 차후에 다른 몬스터의 먹이가 될 뿐이니, 그럴 바에는 잠깐 힘을 합쳐 자신들을 가로막는 울타리를 치워버리는 것이 이득이리라. 몬스터에게도 그 정도의 지능은 있었다.
“팔십 점짜리 대답이군.”
“이십 점이 비었네요.”
그러나 아쉽게도 백점만점을 받을 수는 없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도 별다른 답이 나오지 않다 나는 일드를 바라봤고 이 정도면 충분히 잘 했다는 듯 일드가 나머지 이십 점을 알려주었다.
“전투가 끝난 후, 몬스터들의 시체를 본 적이 있나?”
“못 봤을 리가 없지요. 눈을 뜨기만 하면 보이는 것이 몬스터의 시체인데요.”
“그 중 대형 몬스터는 얼마나 되던가?”
대형 몬스터의 숫자는 무척이나 적다. 물론 오크나 리자드맨 같은 몬스터들이 무시무시한 번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원인이지만 단순 숫자로는 1%도 차지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죽은 몬스터의 비율은 그것보다도 더 적었다.
“아무리 기사들이라 하더라도 두꺼운 몬스터의 벽을 뚫고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부담스러우니까요.”
“그렇지. 그런 까닭에 어지간히 접근하지 않는 이상 대형 몬스터들은 대부분 무사히 되돌아가곤 하지. 그렇게 쌓인 녀석들이 겨울에 한 번에 내려온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방어는······가능할 것이다. 다만 그 대가로 대부분의 전력을 제물로 바쳐야 할 테고 그리 되면 추가 지원이 있기 전에 재차 공격을 받을 것이다. 결국 불패의 신화를 자랑했던 테라 방벽도 거센 파도 앞의 모래성마냥 허물어지고 말겠지.
“이제 알겠나? 어째서 방패를 벗어던지면서까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지.”
계속된 승리에 나는 잊고 있었다. 어떠한 방패도 모든 공격을 방어해줄 수는 없다는 것을. 모든 것을 막는 방패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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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드와의 대화를 끝내고 방으로 되돌아온 나는 그 동안 해오던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가을 원정은 몬스터의 이목을 끄는 것을 막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 대형 몬스터를 수색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신입이라고는 하나 짐이 되어서는 곤란했다. 10의 손해를 열 명이라면 1씩만 짊어지면 되지만 두 명이라면 5씩 짊어져야 하니까.
물론 남은 기간은 고작 이틀. 그 안에 눈에 띄는 발전을 할 비책은 없었다. 그런 비책이 있었다면 진작 썼겠지. 그렇다면 가지고 있는 것을 더 잘 활용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돈만 많았어도 조금 더 많은 것을 실험해볼 수 있었을 텐데.”
순식간에 이틀이 흘렀다. 그 사이 황색경보가 한 번 울리긴 했지만 사전에 말한 대로 내일을 위해 작업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지금이 마지막 점검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손에 들린 ㄱ모양의 철제 무기. 검지를 걸 수 있는 방아쇠. 지구에서 권총이라 불리던 무기가 내 손에 들려있었고 그 앞에 몇 발의 총알이 나열되어 있었다.
물론 진짜 권총과 총알은 아니다. 방아쇠는 딸깍거리는 것밖에 하지 못하며 내부 모양은 총알이 들어갈 공간만 있을 뿐, 별다른 부품도 없었다. 총알도 마찬가지, 통짜 철로 만들어져있는 총알 모양의 철 덩어리였다.
다만 권총에는 사(射-쏠 사)를, 총알에는 빙(氷), 섬(閃-번쩍일 섬), 염(炎) 등 각종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돌은 마력을 받아들이기에 좋은 재료가 아니었기에, 그러나 제대로 된 광물은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비쌌기에 평균점인 철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스윽-
총알이 총구를 통해 총신으로 빨려 들어간다. 남은 것은 목표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 뿐, 방아쇠를 당기니 마력이 살짝 빨려 들어가며 권총의 각인이 빛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발사되는 총알. 타앙- 하는 소음은 없었다. 진짜 총도, 총알도 아니었으니까. 대신 결과는 총알보다 놀라웠다. 목표 지점으로부터 급속도로 빙결화가 시작되어 사람 한 명 정도는 충분히 가두고도 남을 만한 크기의 얼음덩어리가 생겼다.
“됐어!”
남은 종류의 총알들도 이상 없이 제 효과를 세상에 뽐냈다. 번쩍거리기도, 불타오르기도 했다. 각인이라는 능력을 막 얻었을 때인 초기부터 목표로 했던 미리 준비해놓고 필요한 상황에서 쏟아 부을 수 있는,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게다가 사전 준비시간이 없다는 점이 무척이나 고무적이었다.
병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싸울 수 있는 테라 방벽과 다르게 내일부터는 어떤 상황이 닥쳐올지 누구도 몰랐으니까. 한가롭게 수인을 맺고, 주문을 외울 시간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 때, 지금의 준비는 큰 도움이 되리라.
“욕심이 나네. 욕심이 나.”
지난 시간들 동안 여유가 있을 때마다 총알에 마력을 부었다. 그 때문일까, 한 글자의 각인임에도 괜찮은 위력이 나왔다. 한 글자만으로도 이러한데 아직 손도 대지 못한 단어 혹은 두 개의 글자를 각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유용할까.
전생의 기억이 어쨌든 나도 마법사긴 마법사인가 보다. 이렇게 연구하고 싶어서 미치겠는 걸 보면.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했다. 졸지에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추가되었지만 나쁜 일은 아니었다. 동기가 많으면 많아질수록 의지도 불타오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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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모두 모였나!”
“예!”
“그럼 출발한다! 다들, 살아서 다시 만나자!”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서 단 한 번도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던 테라 방벽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성문을 빠르게 통과하여 인간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땅을 향해 속도를 내는 사람들. 작게는 테라 방벽과 수만의 병사들. 크게는 제국 북부에서 살아가는 모든 백성들의 생존이 달려있는 가을 원정을 위해 제 목숨 아까운 줄 아는 이들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숨을 판돈으로 내걸기 시작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08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