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07화 - >
결국 적색경보는 울리지 않았다. 몬스터가 방벽 위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아냈거나 올라오더라도 순식간에 제거했다는 뜻. 결국 해가 정상에 오름과 동시에 몬스터들도 더 이상의 공격을 포기한 채,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끝났군.”
“정말 다행입니다.”
“축하하네. 황색경보를 한 번 겪어봤으니 이제 어딜 가더라도 무용담으로 꿀릴 일은 없을 게야.”
“하하, 하하하.”
일드의 말대로 어디 가서 무용담으로 꿇릴 일은 없을 것이다. 수천의 몬스터 무리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테라 방벽을 제외하면 겪을 수 없는 일일 테니, 십 년을 버텨 이 곳에서 탈출한다는 결과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웃고는 있었지만 결코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힘든가?”
“······예. 예상은 했고 각오도, 준비도 나름대로 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도 더 힘듭니다.”
내 억지웃음을 바라보던 일드가 뜬금없이 힘드냐고 물었다. 듣기 좋게, 분위기 좋게 전혀 힘들지 않다고, 제국을 지킬 수 있어 영광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말에서 무엇인지 모를 진심이 느껴졌기에 나 또한 진심을 이야기했다. 그 대답이 정답이었는지, 오답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드의 입이 열린 것은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 느낌, 잊지 말고 소중히 간직하게.”
“······예?”
영문 모를 답을 주기에 재차 되물었다. 힘들어 죽겠는데, 머리만 땅에 닿아도 순식간에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느낌을 잊지 말고 소중히 간직하라니, 조금이라도 빨리 익숙해지는 것이 좋은 일 아닌가. 그런 의문을 품고 일드를 바라봤을 때, 일드는 씁쓸한 미소를 품은 채 시선을 마주했다.
“자네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삼주가 채 안 됐습니다.”
“삼주라, 정말로 얼마 안 됐군. 그 사이 자네는 정말로 잘 해줬네. 첫 전투에서도 처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게 잘 대응했고, 오늘도 최선을 다해 몬스터를 막아냈지.”
“감사합니다.”
“그렇기에 자네에게 말해주는 거야. 이 곳은 실력이 있다하여 죽지 않는 곳이 아니고 실력이 없다고 죽는 곳이 아니니까.
운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좋거나 방심하지 않는 사람. 딱 그 두 분류만이 오랫동안 살아남아 전역을 꿈꾸지.
가끔가다 보면 자네 같은 이들이 이 곳에 오곤 해. 재능도 있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그런데 그런 이들이 평범한 이들보다 더 일찍 죽곤 하지. 어째서 그런지 그 이유를 알고 있나?”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나는 그 질문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일드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런 만큼 질문 하나도 괜히 할 리가 없었다. 필시 중요한 가르침이리라.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일드의 말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운이 나빴거나, 방심했거나. 운이라면 이런 말씀을 하실 리 없으니 방심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방심 때문이지.”
“방심이라, 테라 방벽과 가장 동떨어진 단어로군요.”
정답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일드. 그러나 의구심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방심.
사전적 의미로는 [마음을 다잡지 아니하고 풀어 놓아 버림] 라는 뜻을 가진 단어. 방금 말한 것처럼 테라 방벽과 가장 동떨어진 단어 중 하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방심을 하면 죽으니까.
“그런데도 적지 않은 숫자의 인재들이 방심 때문에 죽곤 하지. 왜 그런지는 생각해봤나?”
“······잘 모르겠습니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 몬스터가 사라진 것을 확인할 때까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 곳에 온 지 한 달 된 신입도, 몇 년이 지난 베테랑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숫자의 인재들이 방심으로 인해 죽는다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익숙해지기 때문이야.”
“익숙해지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도 여러 번 겪다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지. 게다가 테라 방벽은 그 무구한 시간 속에서도 단 한 번도 함락당하지 않은 불패의 요새. 승리가 반복되고 경험도 조금씩 쌓이기 시작하니 자신감이 생기는 거지. 자신감이 쌓이다보면 어느 순간 만용이 되고 그러다가 앗차 하는 순간에 훅 가버리는 거지.”
익숙해지기 때문이라, 아직 나로서는 실감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내가 겪은 황색경보의 현실은 도저히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자네는 뛰어난 마법사가 될 수 있을 테지. 지금은 힘들고 어렵겠지만 곧 이 곳에 적응할 것이고. 그래서 말을 해주는 것이네. 뛰어난 마법사가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죽는다면 너무 애석한 일이니까 말이야.”
“조언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하게. 이 곳은 오는 데는 순서 있어도 가는 데는 순서가 없는 곳이라는 것을, 한순간의 방심이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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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청색경보는 일상과도 같았고 황색경보도 몇 번이나 경험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일드의 말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매 순간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으니,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어떻게 긴장을 풀고 방심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와이번에게 물려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몬스터가 던진 바위에 깔릴 뻔한 적도 마찬가지. 조금만 방심했다면, 조금만 움직임이 굼떴다면 시체가 되어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뻔한 적이 열 손가락으로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오늘도 멀쩡히 잘 살아남았군.”
“하하, 방금 전에 추락사할 뻔 하셨는데 너무 평온하신 거 아닙니까?”
“살아남았으니까. 과정이 어쨌든 살아남았으니 평온한 거지. 너도 더 오래 있다 보면 알겠지만 이 정도 일은 위기 축에도 못 껴.”
그 사이 나는 이들에게서 인정을 받았다. 내 동기라 할 수 있는 가이우스나 로랑 혹은 그 외에 마법사들은 아직도 많은 이들이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극히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내가 다른 동기들과 다르게 나름대로 1인분을 안정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일드와 가까이 지낸다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나저나 슬슬 ‘그 때’인가?”
“아아, 슬슬 ‘그걸’ 할 시기이긴 하지.”
“그 때? 그걸?”
그 사이 대화는 내가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뜻하는 대명사이긴 한데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주변의 선배 마법사들은 의미모를 미소를 지으며 재미있을 거라고 말할 뿐, 각자의 방으로 헤어질 때까지 [그 때, 그걸]의 뜻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재미라, 재미있고말고. 아주 스릴 넘치는 순간이지.”
“남자로서 한 꺼풀 벗을 수 있는 순간이랄까. 한 번 경험하게 되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낄 수 있게 되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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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황색경보가 휘몰아친 테라 방벽. 그 내부에 존재하는 성의 회의실에서는 중요한 회의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테라 방벽의 지휘관, 지크 후작과 삼백 명에 가까운 기사들을 통솔하는 여섯 명의 기사단장들, 마법사들의 대표인 원더와 세 명의 조장들. 그리고 병사들의 지휘를 맡고 있는 여섯 명의 만부장들까지. 총 17명이 모인 회의장이야말로 테라 방벽의 머리라 할 수 있었다.
“다 모였나?”
“제 1 기사 단장부터 제 6 기사 단장까지, 원더 장로님과 제 1 조장부터 제 3 조장까지, 제 1 만부장부터 제 6 만부장까지, 열외로 경계 둘을 제외한 총 열네 명. 집합 완료했습니다.”
“좋군. 그럼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보통 기사단의 이름은 기사단의 상징을 앞에 붙이는 경우가 많다. 기사단 전부가 백마를 타기에 백마 기사단 혹은 기사단장의 이름을 붙여 로랑 기사단. 혹은 강하고 센 이미지를 위해 사나운 짐승의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테라 방벽에서만큼은 그런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테라 방벽을 지배하는 단어 효율. 바로 효율적이지 못하기에.
그렇기에 테라 방벽의 기사단은 간단하게 제 1 기사단부터 제 6 기사단까지 존재한다. 맡은 구역 또한 한 눈에 보기 편하게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순서대로 맡고 있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겨울이 다가오고 있네. 매년 해왔던 일이니 다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왔으리라 생각하고, 누가 갈지 결정하도록 하지.”
“벌써 그 때입니까, 부디 모두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러기는 힘들 겁니다.”
“작년에 우노스 경과 두오 경이 다녀왔으니 이번엔 저와 콰트로 경이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흠, 문제없겠나?”
“물론입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좋아. 기사단은 트레스 경과 콰트로 경이 맡도록 하고, 나머지 인원들은 각 단장들이 협의하여 내일까지 명단을 만들 수 있도록.”
매년 해오던 일이기에 회의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하고 싶지 않다고 하여 하지 않아도 되는 일도 아니거니와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지 않은 빠질 수 있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면 마법사 쪽에서는······.”
“저번에 일드가 다녀왔으니 이번엔 제가 다녀.”
“제가 한 번 더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일드?”
B조 조장 보토의 말을 끊더니 일드가 손을 들었다. 당황해하는 보토. 그도 그럴 것이 가을 원정은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너무나 위험했기에 되도록 기피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돌아가면서 공정함을 유지하는 것이고. 그런데 작년에 다녀온 일드가 스스로 한 번 더 다녀오겠다고 하다니, 보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놀라워했다.
“누가 가더라도 상관은 없지만 이유가 있나?”
“키워보고 싶은 녀석이 있습니다. 흔치 않은 경험일 테니 제가 데리고 다니면서 키워보려고 합니다.”
일드의 말에 보토를 포함한 마법사들은 일드가 키워보고 싶다는 녀석이 누구를 뜻하는 건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요즈음 일드가 가까이 지내며 많은 것을 가르치는 신입이 한 명 있었으니까.
“키워보고 싶다니, 차기 조장으로라도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직 애송이인 만큼 조금 이른 이야기입니다만 훌륭한 마법사가 될 소질이 보입니다. 경험이 쌓이고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조장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네 뜻이 그렇다면야 그렇게 하게. 오자마자 가을 원정이라니, 신입에게는 너무 무거운 짐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자네와 같이 다녀온다면 큰 문제는 없겠지.”
“감사합니다.”
“자, 그럼 인원은 정해진 듯 하고,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지.”
“중요한 건 겨울이 오기 전에 끝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으니 최대한 빠르게 출발해야 할 듯싶습니다.”
회의실의 불은 밤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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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지?”
“글쎄요. 조금 있으면 조장님이 오실 테니 조금만 기다리면 싫어도 알 수 있겠죠.”
“너는 그래도 다른 마법사들과 친분이 있잖아. 좀 들은 거 없어?”
가이우스와 로랑이 연신 물어오지만 나로서도 며칠 전, 선배들의 대화에서 들었던 그 때가 다가왔다는 것만 짐작할 뿐, 상세한 건 알지 못했다. 그저 일드를 기다릴 뿐. 마침 일드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몇몇 마법사들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카밀라, 슈우, 데런, 말콤, 오토······.”
거의 스무 명에 가까운 인원의 이름이 불린 끝에 호명이 끝났다. 신기한 것은 일드의 입에서 이름이 불린 이들의 반응이 제각각이었다는 것. 체념했다는 듯 눈을 감거나, 한숨을 쉬거나, 고개를 젓는 이들도 있었다. 대체적으로 무언가 좋지 않은 반응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닐, 너도 간다.”
“예? 예!”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답을 했다. 어차피 주변의 반응을 보건데 이름을 불린 이상 할 수밖에 없는 일인 것 같다. 간다는 말로 볼 때 어디론가 떠나는 것 같은데 과연 어디일까. 그 의문은 곧 이어진 일드의 말에서 해결이 되었다.
“다들 알다시피 가을 원정이다. 목적은 어느 때와 다르지 않게 대형 몬스터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고, 출발은 오늘로부터 삼일 뒤,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테라 방벽을 출발한다. 그러니 당사자들은 적색경보가 울리지 않는 한 모든 일에서 제외되어 휴식을 취하도록 한다. 질문하고 싶은 사람 있나?”
“저기, 테라 방벽을 출발한다는 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되물었다. 정말 혹시나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싶어서. 그러나 혹시나는 역시나가 되어 내게 다가왔다.
“그래. 삼일 뒤 우리는 테라 방벽을 떠나 북쪽, 몬스터들의 땅으로 향한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07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