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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6화 (6/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06화 - >

그 날 이후로도 하루걸러 한 번씩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졌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대규모 공격 이후인 덕인지 청색경보만이 울렸다는 것. 덕분에 ‘비교적’ 여유로운 환경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달력의 세로 칸이 한 칸 내려갔고 그 사이 지원군의 수장이었던 배터리 남작은 다시 황도로 내려갔다.

“걱정 말게. 자네 편지는 꼭 드라그닐 남작에게 전해줄 테니, 다음번에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편으로 부모님께, 형에게, 동생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잘 도착했다는 것과 나름대로 버틸 만 하다는 것. 거짓이 조금 섞여있었지만 걱정하실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거짓이 대수겠는가. 그 후로 A조가 후 순번으로 밀린 덕에 시간이 생긴 나는 적응을 위해 미뤄두었던 연구에 착수할 수 있었다.

“되네?”

굳게 닫힌 상자. 그 상자를 열자 안에는 ‘폭’이 새겨진 돌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리의 한계는 있되 직접 손을 대지 않아도, 눈으로 보지 않아도 사물의 존재를 인식한다면 각인을 새길 수 있다는 증거와도 같았다.

“남은 과제는 생물의 몸에 실험을 하는 것뿐인가.”

그 실험을 굳이 내 몸에 할 필요는 없었다. 이 곳에는 실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았으니까.

“우쭈쭈.”

그 즉시 나는 식용 가축들이 있는 축사로 향했다. 애초에 식용이니만큼 간단한 절차만 받으면 몇 마리쯤은 충분히 융통이 가능했다.

제대로 된 실험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인간과 유사한 몬스터들 - 오크, 리자드맨 -을 활용하는 편이 조금 더 정확했겠지만 몬스터를 생포할 만큼 테라 방벽의 사정은 여유롭지 않았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나와 같은 신입에게까지 올 만큼 공급이 충분하지도 않았고. 그렇기에 가축이다. 어쨌든 생물이라는 카테고리에만 속하면 되는 일이니까.

꿀꿀-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굳이 순번이 바뀌지 않더라도 언제 황색경보가 울릴지 알 수 없었으며 청색경보라 하더라도 전투가 길어지면 뒷 순번의 조로 교체되는 일도 허다했기 때문에. 지금 당장 방벽 위로 올라가야 할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되도록 빠르게 실험을 끝낼 필요가 있었다.

“너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두 마리의 돼지를 준비했다. 한 마리에게는 통(痛-아플 통)의 각인을, 다른 한 마리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있다면 다른 각인을 준비하여 반응을 지켜볼 수 있었겠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에는 이만한 각인이 없었다.

꾸, 꾸울-?

마력이 소모되며 돼지의 등에 각인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고통을 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 고통 속에 죽는 돼지는 육질이 별로라는 말도 있잖은가 - 각인을 새길 수 있는 최소한의 마력만을 사용했다. 글자의 마지막 획을 그었을 때, 글자가 마력으로 빛나기 시작한 때부터 한가로이 먹이를 먹던 돼지로부터 반응이 나타났다.

꾸울-!

등을 땅에 비비며 불편함을 호소하는 돼지. 옆에 있는 돼지는 별 다를 바 없이 먹이를 먹고 있음에도 각인을 새긴 돼지만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각인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건가.”

각인 자체는 금세 사라졌다. 워낙 소량의 마나를 사용했기에 당연한 일이었고 나는 몇 번의 실험을 반복하며 확인한 내용들을 노트에 적었다.

각인을 새기는데 소모된 마력의 양에 따라 지속시간이 달리진다는 것, 효과의 증감에 따라 지속 시간에도 영향이 있다는 것. 아쉽게도 한 번에 하나의 각인만을 새길 수 있다는 것 등등 대부분의 내용이 원래 알고 있던 내용을 재확인한 것에 불과했지만 몇몇 내용은 내가 실험을 통해 확인하고자 했던 내용이니만큼 알찬 실험이었다.

“대략 30cm 정도는 큰 소모 없이 각인을 새길 수 있는 것 같은데······. 이걸 전투 도중 적에게 새길 수 있다면?”

나를 강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적을 약화시키는 것도 승리하기 위한 방법이다. 힘이 강한 적에게는 약(弱), 재빠른 적에게는 완(緩-느릴 완). 그 외에도 나(懦-나약할 나), 탁(濁-흐릴 탁) 등 강점을 무력화하거나 단점을 부각시킬 수 있겠지. 강(强), 속(速), 복(復-회복할 복) 등 동료를 강하게 만들 수도 있을 테고. 전투에 있어 큰 상수이자 나만의 비장의 무기가 될 수 있으리라.

“내가 있는 곳이 테라 방벽만 아니었어도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당장 조장인 일드도 매번 방벽 위로 올라와 지휘에 힘쓰는데 이 곳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가 연구를 이유로 전선에서 이탈할 수는 없었다. 결국 연구를 위해선 시간 배분을 더 빡빡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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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성과를 얻어냈으나 그로 인한 효과는 크지 않았다. 우선 신체의 각인은 제대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마력 소모가 극심하다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흡(吸-마실 흡)의 각인은 마력을 회복할 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효율을 늘리기 위해 소모를 각오했는데 그로 인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면 안 하니만 못할 테니까.

그렇게 테라 방벽에서의 흔치 않은 평화로움 끝에 잠에 들었던 나를 깨운 것은 거세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였다.

땡땡땡땡-

태라 방벽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경우는 단 한 가지 경우뿐이다. 몬스터의 침공으로 인해 경보를 울릴 때. 이 곳에 온 지도 근 이주 째, 이제는 종이 울린 지 몇 초만 지나도 나도 모르게 잠이 깨 장비를 입는 수준이었다.

후 순번이라고는 하나 전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마법사들의 마력 소모 또한 심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교대를 해야 할 수도 있는 만큼 긴장을 유지한 채,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땡땡땡땡-

‘종소리가 이렇게 빨랐던가?’

그 동안 들었던 종소리가 커피라면 지금의 종소리는 TOP와도 같았다. 여유가 있는 종소리가 아닌 무척이나 다급한 종소리. 종을 울리는 병사가 있는 힘껏 종을 치고 있음이 소리만으로도 느껴졌다.

[청색경보는 조금 여유를 가지고 울리지. 댕- 댕- 댕- 댕- 이렇게. 대략 2초에 한 번꼴이랄까? 그에 비하면 황색경보는 거칠기 짝이 없어.

정해진 간격 없이 병사가 있는 힘껏 종을 울리니까. 적색경보? 황색경보로 방벽에 올랐을 때, 또 다시 종이 울린다면 그게 바로 적색경보지.

그게 아니면 몬스터가 방벽 위로 올라온 걸 본 순간부터 적색경보고. 잘 기억해둬. 네 목숨과 직결된 일이니, 뭐 몇 번 경험하다보면 기억하기 싫어도 몸이 기억하게 되겠지만.]

‘청색이 아니야. 황색경보다!’

대규모 공세가 있은 지 채 이주도 되지 않아 어지간한 숫자로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 테라 방벽의 병사들이 다급해질 수밖에 없는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지긋지긋한 녀석들.’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녀석들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온 뒤로 죽은 몬스터들만 하더라도 과장 조금 보태어 산을 이룰 정도일 텐데, 어디 공장에서 찍어내기라도 하듯 더 많은 숫자가 하루가 멀다 하고 쳐들어온다.

대륙의 유일무이한 일강, 바하무트 제국이 비록 춥고 척박한 땅이지만 괜히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테라 방벽 이상으로 치고 올라가봤자 그 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보다 그 땅을 지키기 위해 잃는 것이 더 많았으니까. 사실 테라 방벽이 높디높은 산맥이라는 자연의 축복을 등에 업지 않았다면 제국의 북쪽 경계는 한참이나 내려와야 했을지도 몰랐다.

“젠장! 한동안 조용하나 싶었더니, 이 밤중에 사고를 치는구만!”

“빨리 움직여! 몬스터들이 더 접근하기 전에 방어 태세를 갖춰야 해!”

“제발 잠 좀 자자!”

당연히 건물 내부도 난리가 났다. 온갖 욕설과 고함으로 방금 전까지의 고요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나 또한 저 소란 속으로 몸을 던져야만 했다. 한 명 한 명이 최선을 다해야만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여기, 테라 방벽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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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조가 올라오면 A조는 내려가!”

“고생했다. 나한테 맡기고 내려가서 마력 회복에 집중해.”

“가, 감사합니다.”

한밤중에 일어난 전투는 동이 트고 있음에도 조금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청색경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공중을 날아다니는 하피, 와이번 등의 몬스터도 상당수였으며 단지 방벽 아래만 신경 쓰다가는 아차 하는 순간에 놈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만큼 느끼는 피로는 몇 배 이상이었다.

“젠장.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군.”

“그래도 해가 완전히 뜨면 물러갈 겁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아닐 수도 있겠지. 어디 몬스터가 생각이란 걸 하고 움직이던가.”

방벽을 내려왔다고 해서 안심할 순 없었다. 와이번과 같은 몬스터들은 공중을 날아다니며 방벽 내부까지 침입하곤 하니까. 꼭 직접적인 공격이 아니더라도 사람 크기만한 돌을 들고 와서는 머리 위로 떨어뜨리기도 하는 만큼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우리들은 포박당한 채, 병사들의 감시를 받고 있는 일단의 무리를 마주했다.

“저 사람들은······.”

“처음 보나? 배신자들이지. 비겁자들이고. 몬스터와 싸우는 것이 두려워 동료를, 친구를, 인류를 배신한 쓰레기들. 아무리 두렵고 힘들어도 저런 놈들처럼 되지는 말게. 배신자들의 말로는 참혹하니까.”

황색경보는 테라 방벽의 대부분의 힘이 방벽 방어를 위해 쓰여야만 했다. 그런 만큼 내부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 틈을 타 탈영을 혹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숨어있던 병사들이 바로 저들이었다.

“안타까운 사람들이네요.”

“안타깝기는 무슨, 우리는 좋아서 여기 있는 줄 아나?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우리가 도망치면 가족들이 위험하니까 있는 거지. 저들은 그저 제 목숨만 아까운 버러지들일 뿐이야.”

무섭겠지. 살고 싶었겠지. 그러나 일드의 말처럼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다. 저들은 결과적으로 동료들을, 가족을 버린 것이었고 그렇기에 안타까울지언정 저들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우리가 저들을 버린 것이 아닌 저들이 먼저 우리를 버린 것이니까.

“신경 끄고 마력 회복에나 집중하게. 이대로 물러난다면 좋겠지만 또 한 번 올라가야 할 수도 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06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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