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05화 - >
“그럼 지금부터 자네들이 꼭 알아야 하는, 이 곳에서 가장 유용하며 잠꼬대로도 쓸 수 있을 만큼 숙련되어야 하는 마법을 알려주겠네.”
꿀꺽-
꼭 알아야 하며, 유용하고 잠꼬대로도 쓸 수 있을 만큼 숙련되어야 하는 마법. 이 정도라면 일드의 입장에서는 강조할 수 있을 만큼 강조한 상황. 그런 만큼 가이우스와 로랑은 도대체 무슨 마법이기에 일드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인지 관심을 집중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마법이 그다지 대단치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애초에 3서클 수준에서는 그리 대단한 마법이 나올 수가 없기도 하였으며 일드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 곳에서 마법사란 효율적으로 쓰여야 하는 존재라고. 그런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오늘부터 자네들이 연습해야 할 마법의 이름은 ‘그리스’라네.”
“······예?”
“그리스요?”
잔뜩 긴장하고 있던 가이우스와 로랑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었다면 모를까, 이 둘처럼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면 나올 수밖에 없는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스는 마법의 세계에 갓 들어온 신입들도 어렵지 않게 구사할 수 있는 마법이었으니까.
“내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얼굴들이구만. 장난이 아니니 그런 표정은 접어두게.”
“하, 하지만 그리스는 마법사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마법이 아닙니까. 그걸 따로 연습해야 한다는 게······.”
“내 말을 들은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곤 하지. 그렇지 않은 마법사들도 있긴 하지만 말이야.”
그러면서 나를 쳐다본다. 어깨를 으쓱거리자 다시금 시선을 어이없어하는 두 마법사에게 옮긴 일드는 조언을 이어갔다.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일단 그리스를 시전 할 줄은 아는 모양이군. 한 번 써보겠나?”
“예. 뭐, 어렵지 않지요.”
1초, 2초, 3초.
누구나 쓸 수 있다는 말을 한 것이 허언은 아니라는 듯 가이우스는 짧은 시간에 그리스를 시전 해냈다. 가이우스가 이것 보라는 듯 일드를 쳐다봤지만 일드는 검지로 매끄러워진 바닥을 쓱- 닦더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 짝- 짝- 짝- 짝-
“훌륭하군. 훌륭해! 이걸로 자네와 자네가 맡은 구역의 병사들은 코앞까지 다가온 몬스터들을 상대해야 할 게야! 기뻐하게. 자네의 방심과 오만 때문에 적색경보가 울렸으니, 수백 명의 범인이 할 수 없는 일을 개인의 힘으로 해냈으니 마법사라 불리기 충분하군!”
신랄한 비판이었다.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정면에서 듣게 된 가이우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옆에 있던 로랑도 마찬가지. 둘로서는 왜 일드가 이런 말을 꺼내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그게 무슨······!”
“장난이 심하십니다!”
“장난이라고! 내가 고작 장난 따위나 치기 위해 귀중한 시간을 들여가며 자네들을 가르치고 있는 줄 알아!”
일갈.
일드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러나 일드의 분노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싸늘한 표정은 그들만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듯 가이우스의 표정이 얼음이었다면 일드는 액체 질소 수준의 차가움을, 동시에 뜨거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멍청한! 고작 그 따위 수준으로 콧대를 세웠던 건가! 너희들 같은 멍청이들의 결과는 뻔하지! 혼자 죽으면 다행이고 네 놈과 같이 배정된 병사들까지 위험에 빠뜨리겠지!”
“억울합니다! 저희는 최선을 다해······.”
“억울? 최선을 다해?! 몬스터 앞에서 그리 떠들어보지 그러나! 그리 말하면 몬스터들이 ‘오, 저희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군요. 그 노력과 열정에 찬사를 보냅니다.’라며 스스로 물러나기라도 한다던가?! 그 따위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면 당장 자살하는 것을 추천하지! 어차피 죽을 거, 다른 이들에게 피해주지 말고 혼자서 죽는 게 그나마 최선일 테니까!”
씩씩거리며 한껏 성을 낸 일드. 도대체 자신들이 뭘 잘못했기에 이런 폭언을 들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한 그들을 위해 일드가 화를 가라앉혔다.
“어깨 위에 달린 것이 장식이 아니라면 좀 생각이란 것을 했으면 좋겠군. 그래. 그리스는 자네들 말처럼 마법사라면 개나 소나 쓸 수 있는 마법이지.
그런 마법을 내가 중요하다고 그토록 강조를 했다면 왜 그랬는지 이유를 생각해봐야지 않겠나? 마법사라는 이들이 떠올린 결론이 고작 장난? 내가 일면식도 없는 자네들에게, 조장이라는 직위를 내세운 지금 고작 장난이나 치자고 자네들을 불러 모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정말로 그리 생각한다면 원더님께 말씀드리지. 마법사의 자격이 없는 이들이 왔다고 말이야!”
일드의 입에서 말이 쏟아질 때마다 둘의 시선은 점점 바닥을 향했고 얼굴은 점점 붉은 색으로 달아올랐다. 두 사람의 얼굴이 더 붉어져 폭발하기 전에 내가 나섰다.
“효율적이기 때문이죠.”
“효율?”
“예. 일드님이 말씀하셨다시피 저희들이 몬스터를 죽이는 건 비효율적인 일입니다. 그건 병사들도 할 수 있는, 아니 어쩌면 더 잘 할 수도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저희가 해야 할 일은 몬스터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병사들이 보다 편하게 몬스터를 죽일 수 있도록 돕는 일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는 무척 효율적인 마법입니다.
몬스터들의 접근을 방해하니 목표를 이룰 수 있고, 마나 소모가 적고 시전 시간도 짧으니 필요한 순간에 여러 번 사용이 가능하니 효율적이죠. 게다가 이 곳에 있는 모든 마법사들이 전부 사용 가능하기까지 하고요.”
“순 맹탕만 있는 것은 아니었군.”
그제야 일드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스물이 되기 전에 세 개의 서클을 만들 수 있었던 게 아니었어. 그 영민함과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살아남아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겠지.”
“감사합니다.”
“몬스터와의 전투는 꽝- 붙고 끝나는 단기전이 아니야. 적어도 몇 시간, 길게는 며칠까지도 이어지는 장기전이지.
그렇기에 마나를 아껴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지. 그 뿐일까, 잠시 한 눈을 팔기만 해도 순식간에 성벽을 타고 오르는 몬스터들이 이 곳에는 많아. 3초? 적어도 그리스만큼은 시야가 닿는 즉시 시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게.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몬스터들이 방벽에 올라와 난동을 부릴 터이니.”
이번에는 일드가 손수 그리스를 시전했다. 서클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일드의 그리스가 펼쳐진 바닥은 가이우스가 보여준 그리스와는 달랐다. 3초나 걸렸던 가이우스와 다르게 채 1초도 걸리지 않았으며 그럭저럭 균형을 잡을 만 했던 것과 다르게 조금의 바람에도 쓰러질 것처럼 매끄러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말.
“명심하게. 몬스터를 아무리 죽여 봤자 승리로 향할 순 없네.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방벽 너머로 보내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승리를 향해 가는 길이지. 제 아무리 많은 몬스터를 죽인다 하더라도 방벽 너머로 보내는 순간이 패배하는 것이고, 내 말 알아듣겠나?”
그것으로 말을 끝낸 일드는 우리들에게 종이 몇 장을 나눠주더니 되돌아갔다. 잠깐 살펴보니 그리스에 대한, 그 동안 테라 방벽의 마법사들의 경험과 노하우가 담겨있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마나를 아낄 수 있는지, 더 빠르게 시전할 수 있는지, 원하는 범위만을 설정할 수 있는지. 바깥에서라면 비전이랍시고 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정보들을 생존이라는 이름 앞에, 제국의 안전이라는 가치 앞에 아무런 대가 없이 풀리고 있었다.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두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향하며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소리를 들어놓고서, 이런 정보까지 줬는데도 개선하지 않는다면 마법사가 아니리라.
나 또한 재빨리 방으로 향했다.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고 싶어서. 다행히 그 날은 대규모 공격이 있었던 다음 날이라서 그럴까, 경보가 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날, 나는 어째서 이 곳이 제국 최악의 격전지, 사지 중의 사지라 불리는지 어김없이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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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눈 팔지 마!”
“한 놈도 방벽 위로 못 올라오게 해!”
“정신 안 차려! 죽고 싶어?! 네 놈 혼자서 죽는 건 상관없지만 우리까지 말려들게는 하지 말라고!”
불과 이틀 전에 대규모 공격이 있었다. 몬스터가 방벽 위까지 올라와 적색경보를 울려야만 했던, 일 년을 통틀어도 두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대규모 공격이었다. 그런 만큼 최소한 며칠간은 조용하지 않을까라는 병사들의 희망은 보기 좋게 배신당했다. 황색경보가 울릴 만큼 본격적인 공격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방심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더군다나 이번 주의 첫 순번은 A조. 아무리 잘 설명되어있는 공략글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리스가 아무리 쉬운 마법이라 하더라도 하루도 안 되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덕분에 상당한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그것조차 없었다면 훨씬 더 큰 위기를 자초했을 거라는 것.
“칫!”
성벽 아래를 가득 메운 몬스터들. 그 중에서도 방벽의 틈을 타고 오르는 몬스터들은 어떤 의미로는 대형 몬스터들보다 위험한, 경계 대상 1순위였다.
한 눈 팔다가는 한 놈, 두 놈 방벽 위로 올라와 번잡하게 만들 것이고 그러다보면 방벽 아래의 몬스터들을 제대로 상대할 수 없게 되니까. 그렇기에 내가 할 일도 저 녀석들이 못 올라오게 막는 것.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워낙 재빠른 탓에 최대한 속도를 끌어올려도 한 발 늦기 일쑤였으니, 그래도 숙련병들의 보조와 이따금씩 신경을 써주는 선배 마법사들의 도움에 힘입어 올라오는 족족 떨어트리고는 있었다.
“피해! 돌 날아온다!”
쾅-
거대한 몬스터가 두 손으로 있는 힘껏 던진 거대한 바위. 다행히 나와는 거리가 있는 곳이 목표였지만 그 충격은 방벽을 타고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피했다면 다행일 텐데, 적어도 수 명은 저세상 사람이 되었으리라.
얼마나 지났지? 혈향과 땀 냄새, 몬스터 사체가 내뿜는 냄새 등이 뒤섞여 고약하기 짝이 없었지만 내 코는 마비된 지 오래였다. 그다지 더운 날씨가 아님에도 온 몸은 물에 젖은 솜 마냥 축축 처졌고 마력 또한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라! 곧 물러날 거다!”
그에 비해 다른 마법사들은 비교적 여유가 있어보였다. 이것이 바로 경험의 차이라는 것이겠지. 그 말따마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몬스터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전투가 지속되었다면 미리 준비해둔 폭 돌멩이를 던지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테니까.
‘미쳤군. 미쳤어.’
적색경보도, 심지어 황색경보도 아니다. 가장 아랫단계라고 할 수 있는 청색경보만으로도 이 지경인데 그 위의 경보 때는 어떤 참상이 벌어진단 말인가. 소름이 돋았다.
“고생했다.”
“일드님.”
“첫 전투치고는 분전했다. 저기 보이나? 너와 같이 온 두 애송이들에 비하면 충분히 잘 해줬어.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아.”
전투 도중에는 도저히 나 이외에 신경을 써줄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투가 끝났고 일드의 손가락을 따라 가이우스와 로랑을 찾자 멀리서 봐도 마력 고갈로 인해 안색이 창백했으며 심지어는 주변 병사들에게 눈총까지 받고 있었다. 모두가 100의 역할을 해줘야 할 때, 누군가 60밖에 하지 못한다면 나머지 40은 주변 사람들이 메워야 총 합을 맞출 수 있을 테니까.
“최소한 짐은 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제는 조금 쉬어도 되겠지. 그러나 테라 방벽의 진면목을 마주한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05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