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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4화 (4/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04화 - >

[126년 4월 11일]

[젠장. 정말 빌어먹게도 추운 날씨다. 슬슬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는 4월 날씨가 이렇다면 한겨울에는 어느 정도란 말인가? 이 곳에 도착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절망감이 몸을 감싼다. 이런 곳에서 십 년을 견디라고? 그래도 난 버틸 거다. 이런 곳에서 죽기에는 난 너무 아까우니까.]

[126년 5월 10일]

[이 곳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지났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 동안 느낀 것이 있다면 이 곳은 정말 빌어먹을 곳이라는 점이다. 한 달 동안 열 번이 넘는 전투가 있었고 두 번의 큰 전투가 있었다. 눈을 감으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비명과 살려달라는 함성이 귓가에 맴돈다.]

[126년 8월 27일]

[케인이 죽었다. 사인은 압사. 사이클롭스가 던진 바위에 깔려 죽었다. 방어 마법을 펼쳤지만 방어막은 거대한 바위 앞에 종잇장처럼 찢어발겨졌다. 다행이었던 점이라면 나는 케인의 옆에 있었지만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갔다는 점이다.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126년 8월 31일]

[케인! 널 죽인 건 내가 아니야! 그러니까 제발 꿈속에 그만 좀 나오라고! 고작 2m 차이였으니 억울한 건 알겠지만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127년 1월 1일]

[고향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눈물이 나왔다. 가족들이 보고 싶다.]

[127년 4월 11일]

[이 곳에서 사투를 벌인지 일 년이 지났다. 나는 아직 살아있지만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나와 같은 때에 이 곳에 왔던 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일 년 동안이나 큰 부상 없이 살아남았으니까. 이 곳에서 골절 정도는 부상 축에도 끼지 못한다.]

[127년 6월 18일]

[무섭다. 원래도 그랬지만 요즘은 더 무섭다. 현실에서는 언제 몬스터가 공격해올지 몰라 무섭고 꿈에서는 죽은 동료들이 찾아와 무섭다. 살고 싶다.]

일기장에는 일 년 반간의 행적들이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의지가 조금씩 깎아내려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 의지마저 꺾일 것만 같았다.

“이건······ 불태워야겠군.”

마법사가 절망 속에서 써내려간 일기이기 때문일까. 미약하게나마 마력이 섞여 있었다. 아직은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고 보는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수준이지만 괜히 놔두었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는 미리미리 처리를 하는 것이 현명하리라. 방 정리가 거의 끝난 직후 나는 그의 옷 몇 벌과 함께 일기장을 불태웠다.

풀썩-

침대에 누웠다. 머리를 기댈 곳이 있고 몸이 편하니 온갖 잡생각이 다 떠오른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부터 나는 언제까지 이 의지를 간직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까지. 결국 생존에 관한 문제였다. 첫 날부터 너무 멋진 광경을 구경시켜주니 흔들림이 더 심했다. 아직 내 의지는 그다지 강한 편이 아닌 듯싶었다.

‘이래선 안 돼.’

방에 있는 시간은 유일하게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시간이다. 방벽이 뚫리지 않는 이상 방이 공격당할 리는 없으니. 그런데 벌써부터 방에서조차 편안히 쉬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고난을 어찌 버티겠는가. 그렇기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여유가 있을 때 준비를 해야 하는 법이니까.

방의 입구에 휴(休-쉴 휴), 베게에는 면(眠-잘 면), 이불에는 온(溫), 침대에는 안(安). 편안한 휴식을 통한 재충전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하늘 높이 치솟았던 해도 점점 기울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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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이 이번에 지원을 온 마법사들인가 보군. 반갑네. 테라 방벽의 수석마법사를 맡고 있는 원더라고 하네. 내 얼굴을 아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처음 보는 이들도 있겠군.”

“장로님을 뵙습니다!”

“장로라, 그래. 그런 직위도 있긴 했지. 아무튼 내가 자네들을 불러 모은 이유는 하나네. 앞으로 자네들이 할 일을 알려주기 위해서지.”

다음 날, 지크 후작은 말했던 대로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불러 짧은 연설을 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으며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상투적인 내용의 연설문. 본격적인 이야기는 결국 실무자들의 손에 달려있었다.

“이 곳의 마법사들은 각각 A조, B조, C조에 속해 있네. 자네들이 새로 합류하여 새롭게 조를 편성했으니 숙지하도록 하고. 단계에 따라 움직이면 되네.”

테라 방벽의 경보 단계는 총 3단계가 있었다.

1단계, 청색경보.

몬스터들의 공격이 예상될 때, 혹은 몬스터들의 산발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떨어지는 경보로 1개 조가 성벽에 올라 공격에 대비한다.

2단계, 황색경보.

몬스터들의 본격적인 공격이 감행되었을 때, 2개 조가 성벽에 올라간다. 마력이 떨어진 조부터 대기하고 있는 조와 교대, 마력을 회복한 후, 다시 교대하는 식이었다.

3단계, 적색경보.

적색경보는 테라 방벽 위로 몬스터가 접근을 허용했을 때 울리며 마력의 양에 상관없이 모든 마법사들이 투입되어 몬스터를 몰아낼 때까지 유지된다.

“조의 순번은 일주일마다 바뀌게 되니 첫 순번의 조는 수고해주길 바라네. 각 조의 조장들은 새로 들어온 신입들이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게. 알겠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 그럼 나머지는 조장들에게 맡기겠네. 늙으니 하루 정도로는 피로가 풀리지 않는단 말이지.”

육십여 명에 가까운 마법사들이 세 개로 갈린다. 각각 A조, B조, C조. 나 또한 거듭 A조는 이 쪽으로 오라는 마법사의 목소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얼굴이 둘, 아무래도 세 명씩 갈린 모양이었다.

“반갑다. A조 조장을 맡고 있는 일드 넬거다. 얼마나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곳에 있는 동안 잘 부탁한다.”

“가이우스입니다.”

“로랑입니다.”

“레닐입니다.”

“자, 이름은 모두 들었군.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돌아가도 되네. 어차피 이 곳에 있어봤자 할 일도 없을 것이고, 신입들 교육은 내가 맡도록 하지. 다른 의견 있는 사람 있나?”

자기 일이 아니면 관심을 가지지 않는 마법사답게 순식간에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향해 사라지는 이들. 돌아가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아하니 아예 벽을 쌓는 것은 아닌데 남는 사람은 일드를 제외하면 한 명도 없었다.

‘인정을 받으라는 건가.’

소설이나 영화를 보다보면 나오지 않던가. 친한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심력을 소모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고. 그렇기에 점점 쉽게 정을 주지 않는다고. 그런 나의 예상에 일드가 확신을 내려주었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자네들도 이 곳에서 오래 있다 보면 저들이 왜 저러는지 알게 될 게야.”

“하하하······. 꼭 살아남아야겠군요.”

“좋은 생각일세. 이 곳이 사지 중의 사지라지만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다 살자고 하는 일이지. 자, 그럼 지금부터 우리들이 할 일을 알려주겠네.”

드디어 본론인가. 그러나 일드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할 일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임무는 적들의 발목을 잡는 일이지.”

“발목을······ 잡는다?”

“혹시 여기서 5서클에 도달한 사람이 있나?”

뜬금없는 5서클이라는 말에 나를 비롯해 가이우스, 로랑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서 갑자기 5서클에 대한 이야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3서클, 간혹 4서클에 발을 걸치고 있지. 레닐 군. 18살인데 세 개의 서클을 만들었다고 했나?”

“그, 그렇습니다.”

“만약 이 곳에서 십 년을 버틸 수 있다면 제국의 흥복이 될 만한 재능이로군. 그렇다면 자네에게 묻겠네. 3서클 마법으로 얼마나 큰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기껏해야 오크 한 마리 정도를 잡을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래. 화살 몇 발, 운이 좋다면 창을 한 번 찔러 넣는 것만으로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오크를 잡기 위해 우리들은 아까운 마력을 소모해가며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하지.

물론 5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은 이야기가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여기 있는 대부분의 마법사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지. 그럼 여기서 문제. 고작 스무 명밖에 되지 않는 마법사들을 일반 병사들도 할 수 있는 일에 투입하는 것을 효율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제야 일드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 것 같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면 다섯 자리 수의 병사들이 성벽에서 항전한다. 거기에 스무 명, 황색경보라 하더라도 마흔 명이 화력을 더해봤자 호수에 물 한 바가지 더하는 정도라는 것이다.

마법사를 제국에서 지원하며 키우는 이유는 고 서클의 마법사는 전쟁에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도 있지만 그렇다하여 저 서클의 마법사들에게 지원을 아낀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 이유는 마법사들은 범인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비효율적, 그것도 극악의 비효율이로군요.”

“그렇지. 하지만 마법사들의 힘은 단순히 불덩이를 날리고 전격을 내리꽂는 것이 전부가 아닐세. 경우에 따라서 개인의 힘으로 수백, 수천 명의 인간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기에 우리들을 마법사라고 부르는 것이지.”

그리 말하는 일드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드러나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자네들이 꼭 알아야 하는, 이 곳에서 가장 유용하며 잠꼬대로도 쓸 수 있을 만큼 숙련되어야 하는 마법을 알려주겠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04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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