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03화 - >
“무슨 일······ 괜찮으십니까!”
미리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폭음을 들은 보초병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별 일 아니라 그들을 진정시킨 뒤, 보초들과 함께 폭발음이 들린 곳으로 향하자 작은 구덩이와 함께 부서진 돌 조각을 찾아볼 수 있었다. 흔적으로 보아하니 낮에 오크를 불태웠던 파이어볼 정도의 위력은 충분해보였다.
‘언령의 열화판으로 보면 되려나?’
입에서 나오는 말 자체로 힘을 가진다는 언령에 비할 바는 아니다. 꿈의 내용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거짓인지에 대한 검증도 필요하다. 그러나 꿈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상당히 유용하게, 다채롭게 응용이 가능했다. 문제는 이런 능력을 왜 갑자기 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얻게 되었냐는 것이다.
“······실험은 끝이 난 것입니까?”
“피곤할 텐데 밤중에 소란을 피웠군. 실험은 끝났으니 돌아가도 되네. 나도 돌아갈 테니 말이야.”
내게 배정된 막사로 돌아와 잠자리에 누워 생각에 잠겼지만 딱히 떠오르는 특이점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처음으로 몬스터를 죽였다는 것.
겨우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걸 제외하면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니 곧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어째서 이런 능력이 주어졌는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이 능력을 어찌 활용해야 조금 더 생존확률을 높일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말 그대로 기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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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 방벽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이 능력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이동 중이었기에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시간은 여유로웠던 덕에 제국 북부를 통과하여 테라 방벽에 도착할 때쯤 나는 꽤 많은 준비를 끝마친 채, 테라 방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선 내가 입고 있는 로브에는 방(防) 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마음 같아서는 방어, 보호 등의 단어들을 새겨 넣고 싶었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한 글자. 그것도 한 개를 새겨 넣는 것이 한계였다. 그렇기에 나는 방법을 찾아냈다.
한 장비에 여러 뜻을 새길 수 없다면 여러 장비에 한 뜻을 새기면 되는 문제였으니까. 신발에는 민(敏-민첩할 민), 장갑에는 력(力), 옷에도 경(?-단단할 경) 등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했으며 폭(爆)이 새겨진 돌멩이도 준비할 수 있는 만큼 준비했다. 한 번 새겨 놓은 글자들은 그 안의 마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유지가 되었기에 많으면 많을수록 이득이었다.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감이 온다.’
임시로 각인이라고 이름붙인 이 능력은 마법과 매우 유사했다. 그러나 마법에 마법만의 장점이 있다면 각인도 마법보다 확실하게 앞선다고 말할 수 있는 장점들이 있었다.
첫 째, 준비성.
마법과 달리 한 번 각인을 새겨 넣은 직후에도 얼마든지 보관을 할 수 있었다. 언제까지 지속이 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각인을 새겨 넣은 물건이 부서지기 전까지, 혹은 내가 사용하기 전까지는 얌전히 제 자리에 있던 것으로 보아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보관이 가능한 듯싶었다. 즉석에서만 사용 가능하며 마력이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비하면 엄청난 장점이었다.
둘 째, 다양성.
넓은 범위에서의 활용이 가능했다. 단순히 상대를 공격하고 공격을 방어하는 것뿐만 아니라 길을 찾고 물을 정화하는 등 다양한 활용 방법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각인이라 하더라도 내가 의도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 각인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라면 - 유도하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장점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바로 사용이 가능한 마법과 다르게 물건이라는 중간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 생뚱맞은 각인을 새겼을 시, 기대한 것만큼의 성능이 나오지 않는다는 단점들도 있었지만 장점에 비하면 감내할 수 있는 단점들이었다.
그렇게 온 몸의 장비들에 각인을 새겨 넣고 폭탄용 돌멩이도 적당히 챙겨 넣자 욕심이 생겼다. 몸에도 각인을 새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그러나 그 욕심은 잠시 접어두었다. 하나뿐인 몸이다. 무생물인 사물과 다르게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어떤 영향이 있을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섣불리 나설 수는 없었다. 게다가 꿈속에서도 나오지 않은 영역이니만큼 신중에 신중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테라 방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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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병사들이 걷는 속도에 맞춰 나아가던 마차가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특별한 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먼저 말을 해주었던 만큼 당황해하고 있을 때, 창문을 열고 밖을 확인했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앞을 보십시오!”
속도가 속도이니만큼 한껏 소리를 높인 질문에 큰 대답으로 답하는 기사의 손가락을 따라 앞을 보았을 때, 나는 왜 말도 없이 속도를 높인 것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엄청난 높이를 자랑하는 산맥, 그 사이를 사이를 막고 있는, 마찬가지로 엄청난 높이와 길이를 자랑하는 테라 방벽. 그 곳으로부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전투에 참여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준비를 해두십쇼!”
내부의 다른 마법사들에게 내가 본 것을 설명하니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여주는 마법사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이는 마법사,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은 채, 누구인지 모를 이에게 기도하는 이도 있었고 덤덤히 몸 상태를 점검하는 이도 있었다. 가장 움직임이 없었으나 가장 눈에 띄는 이였다.
“도착하자마자 이런 환영식이라니, 오기 전에 들었던 소문에 부족함이 없군.”
하루에도 수십 명이, 일주일에도 몇 번의 전투가 벌어지는 제국 최대의 격전지. 인간과 인간의 전투가 아닌 인간과 몬스터의 사투가 벌어지는 곳. 테라 방벽이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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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을 재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테라 방벽 내부에 도착했다. 전투는 끝이 난 듯 보였지만 내부의 상황은 처참하다는 말 외에는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덕분에 우리는 먼 길을 지나왔음에도 환영해주는 이 하나 없이 붕 뜨고야 말았다.
“틀렸어. 우린 다 죽을 거라고······.”
“어무이······아부지. 못난 아들, 먼저 갑니다.”
“젠장. 이런 곳에서 십 년을 버티라고? 사실상 유배나 다름없잖아······!”
덕분에 병사들부터 기사들까지 사기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이 곳에 오기 전까지의 두려움이 소문과 상상에 의한 허구의 두려움이었다면 지금은 허구의 두려움이 허구가 아닌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더욱 미래가 암담할 수밖에.
“누구십니까!”
“황도에서 지원군을 끌고 온 배터리 남작일세.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후방에서 나타난 대군. 그러나 제국의 영토에서 온, 더불어 제국의 상징이 새겨진 깃발이 높게 치솟은 만큼 아군이라는 걸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의 도장이 찍혀있는 명령서를 보여주기 무섭게 무릎을 꿇는 기사들. 지원군의 지휘관인 배터리 남작과 병사들을 통제할 몇몇 기사들을 제외한 채, 우리는 테라 방벽의 책임자가 있는 장소로 향했다. 그 와중에 우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기사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몬스터들의 대규모 공격이 있었습니다.”
“대규모 공격?!”
“이런 말씀 드리기는 죄송스럽지만 일주일만 빨리 도착하셨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그랬다면 공격을 막기 훨씬 수월했을 겁니다.”
“최선을 다했네.”
“물론입니다. 그 사실은 저 뿐만 아니라 지크 후작 각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기사의 안내를 받아 방벽에 가까이 다가가자 거대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본래 햇빛을 받아 빛나야 할 갑옷과 얼굴은 몬스터들의 체액으로 더러워져 있었지만 오히려 기사로서의 강인함을 돋보여줄 뿐이었다.
‘저 자가 지크 후작!’
지크문트 지크.
제국을 지키는 세 자루 검 중 하나. 그 명성은 제국의 시골 중의 시골이라 할 수 있는 내 고향에까지 퍼져있었던 만큼 모를 수가 없었다. 실제로 보니 과연 명성에 걸맞은 존재감이었다.
“후작 각하. 황도로부터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지원군?”
“후작 각하! 황제 폐하의 지엄한 명을 받들어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했습니다!”
“어서 오시게. 먼 길 오느라 고생했겠군. 보다시피 상황이 이런지라 환영식은 해줄 수 없어 미안하네.”
“아닙니다. 상황이 끝난 다음에야 도착하여 죄송할 뿐입니다.”
“이들이 머물 곳을 안내해 주거라. 본격적인 이야기는 내일 하도록 하지. 자네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오늘은 좀 쉬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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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닐 님께서는 이 방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누가 사용하는 방인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이번 습격 때문에 미처 정리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오늘이라도 당장 치워드릴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방에는 사람의 온기가 물씬 남아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주인 있는 방이 배정된 것에 대해 의문을 표할 때쯤 사용인의 말에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필요한 건 제가 챙기고 필요 없는 건 복도에 내놓을 테니 그것들만 치워주세요.”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긴장하자. 나도 이 자와 같은 결말을 맺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으니까.
“그럼 도움이 필요하실 때, 침대 옆의 줄을 당겨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사용인은 방을 나갔다. 방 안에 혼자 남은 나는 가지고온 짐을 풀고, 전 방 주인의 흔적을 하나씩 빼내기 시작했다. 필요한 물건들은 챙기고 - 마법사의 방이었던 만큼 마법과 관련된 책들이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 필요 없는 물건들은 복도로 빼두었다. 그러는 사이 책상 서랍에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뭐지?”
제목이 없다. 호기심에 책을 펼쳤을 때, 전 방 주인의 일기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꽤나 오랫동안 써왔는지 책의 중간까지 일기가 써져있었다. 가장 최근의 날짜는 오일 전, 아마 그가 죽기 직전에 쓴 글이리라. 정신이 없었든, 시간이 없었든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휘갈겨 쓴 일기의 마지막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27년 8월 3일. 날씨 맑음.]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 이 곳에 온 뒤로 단 하루도 편안하게 잠든 적이 없다. 전출을 몇 번이나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몇 년을 더 있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두려움이 치솟았다. 그러나 동시에 살아남겠다는 의지도 불타올랐다.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죽기에는 아직 못해본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03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