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02화 - >
그로부터 보름 뒤, 정들었던 영지를 떠나 북부로 향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제국의 황제로부터 떨어진 명령이다.
이를 거역하는 것은 말 그대로 반역, 평화로운 영지를 불바다로 만드는 일밖에는 되지 않았다. 우리 가문이 조금 더 힘이 있고 명성이 있다면 북부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갔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가문은 지방의 약소한 귀족에 불과했다. 얌전히 명령에 따를 수밖에.
“몸조심, 또 몸조심해야 한다. 잠시라도 방심했다가는 언제 어디서 눈 먼 칼에 맞을지 모르니까.”
“미안하다. 원래는 내가 가야 맞는 것인데······. 네게 또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 같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북부도 사람 사는 곳이고 제국의 영토입니다. 최대한 몸조심해서 꼭 돌아오겠습니다.”
“오라버니,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아버지, 어머니, 형, 누이동생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영지를 떠났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하다. 그러나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도망치거나 가지 않는다? 말했다시피 이건 황명이다. 비록 황제가 직접 내린 명령은 아닐지언정 그 권위는 똑같다. 그리고 이 세계는 황제에게 모든 권력이 쏠려있는 군주제. 나 하나 살자고 이십 년 가까이 정을 붙인 가족들과 영지민들을 힘들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닌 다른 가족이 갈 수는 없었다. 애당초 장남인 형은 가문을 이어야 하니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북부에 간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었고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못한 누이동생이 가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도 반쯤 체념하듯 제 발로 북부로 가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보내면 안 되냐고?
안타깝게도 나는 제국의 마탑에 소속되어있는 마법사 중 한 명이다. 그것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세 개의 서클을 만들어낸 나름대로 유망한 마법사. 인터넷으로 단련된 나에게 이세계의 유희거리가 새로울 리 없었고 그 대신 판타지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마법에 흥미를 가졌고 나름대로 뛰어난 재능과 노력이 합쳐져 괜찮은 성과를 거뒀다. 이게 이렇게 페널티로 다가올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내가 북부로 가는 것 이외에는 모두가 평화로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 년도 힘들었는데, 십 년 이라니······. 그것도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북부에서!”
제국 북부, 그 중에서도 가장 끝에 위치한 테라 방벽. 그 곳이 내가 십 년을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었다. 제국 영토 바깥에서 드글거리는 몬스터들로부터 제국을 보호하는 최강이자 철벽의 방패. 전생의 대한민국에서 말로만 언제든지 전쟁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하는 것과 달리 참된 의미로 언제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일반 병사들에게는 탈영하다가 발각당해 죽을 확률보다 북부에서 죽을 확률이 높으니 테라 방벽에 갈 바에야 탈영을 하겠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이니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하겠다.
“아, 신이시여! 부디 절 어여삐 여겨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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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얼굴도 모르는 신에게 기도를 하든지 말든지 시곗바늘은 돌아갔고 마차의 바퀴도 똑같이 회전했다. 그 말은 즉 내가 조금씩 테라 방벽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건 생각 이상인데······.”
당연한 말이지만 나 혼자 테라 방벽으로 갈 리는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죽고 일주일에도 몇 번의 생과 사의 갈림길이 펼쳐지는 곳이 테라 방벽이었다. 그렇다고 테라 방벽의 방어를 포기하자니 제국 북부를 통째로 포기하자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계속해서 병사들을 테라 방벽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합류하게 된 일 만의 병사들과 수십 명의 기사들. 마지막으로 나를 포함한 열 명도 되지 않는 숫자의 마법사들이 테라 방벽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는데······. 말 그대로 생각 이상이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 마냥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내쉬었고 그들을 통솔해야 할 기사들도 한껏 표정을 구긴 채, 말을 재촉할 뿐이었다. 마법사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더불어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쯧쯧. 어쩌다가 자네 정도의 인재가 북부, 그것도 테라 방벽으로 가게 되었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군 그래.]
인원 확인을 위해 수도에 도착했을 때, 나를 바라보던 황실 마법사의 눈빛을. 그 눈빛은 산 사람을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죽은 사람을 보는 눈빛이었지. 내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좆된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
“······.”
나와 같은 마차를 탄 마법사들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마다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함께 싸울 전우였지만 어차피 죽을 텐데 대화를 나누어 뭣하겠냐는 심정 같았다. 그 때, 바깥에서부터 일말의 소란이 느껴졌다.
웅성웅성-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이 곳은 제국의 영토야. 그 누가 황군을 건들겠나. 보나마나 몬스터 나부랭이 따위에게 병사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이겠지. 우리들의 도움이 필요하면 알아서 부를 테니 앞으로 살 방도나 궁리하는 것이 좋을 걸세.”
“충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나는 마차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첫 째로 이 침묵을 견디느니 바깥 공기나 쐬는 것이 나았으며 둘째로 마법사가 말처럼 소란의 원인이 몬스터라면 마법이나 날려볼 생각이었다.
나는 실전이라고는 겪어본 적 없는 방구석 마법사였기에 지금부터라도 경험을 쌓아보려는 것이다. 이렇게 여유롭게 싸울 수 있는 것도 테라 방벽에 도착하면 무리일 테니까.
“무슨 일입니까?”
“아, 별 일 아닙니다. 경로에 몬스터의 부락이 있었는지 몬스터들이 길을 막은 것뿐입니다. 금방 정리할 테니 안에 들어가 계셔도 됩니다.”
“안에 있는 것도 답답한데 한 손 거들겠습니다.”
나의 말에 기사는 순순히 길을 열었다. 자신은 이미 한 번 말렸고 나머지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것이 표정, 목소리, 동작에서부터 느껴졌다.
‘젠장. 다들 죽을상을 해가지고서는······!’
사지로 향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도착하자마자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너무 커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도. 그러나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을 쳐야지 이렇게 자포자기하고 있어서야 정말로 죽으러 가는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저 녀석들입니까?”
“그렇습니다.”
수천의 병력을 가로막은 수백의 오크들. 그 기세는 좋았지만 열 배가 넘는 숫자의 차이는 단순히 기세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병사들만 있었다면 모를까,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소수나마 있는 지금은 더더욱.
“제가 먼저 한 방을 먹이겠습니다.”
“그러시겠습니까?”
솔직히 말해 세 개의 서클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기껏해야 사람 한 명을 일격에 죽일 수 있는 정도. 냉병기를 들었다면 하루만에도 할 수 있는 일은 십 년을 노력한 끝에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비효율의 극치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또 다시 십 년이 지난 다음에는 마법으로 수십 명을 죽일 동안 냉병기로는 기껏해야 수 명을 죽이는 것이 전부겠지만.
“뜨겁게 타오르는 불이여. 적을 제물삼아 모습을 드러내라. 파이어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염구에 오크 한 마리가 불타 죽는 것을 시작으로 수백 대 수천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녹색 피와 붉은 피가 어우러지기 시작했으나 전투는 금세 끝났다. 전력의 차이가 압도적이었으니까.
‘생각처럼······. 역하다거나 구토가 올라온다거나 하지는 않네.’
생명체를 상대로 마법을 발휘한 적은, 목숨을 빼앗은 적은 처음이다. 그러나 딱히 별 반응이 없는 것은 총처럼 방아쇠만 당겼을 뿐, 검처럼 직접 죽이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내가 저들을 사람과 같은 인격체로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일까. 어느 쪽으로나 나쁜 일은 아니다. 앞으로 살아남으려면 수도 없이 몬스터를 죽이게 될 텐데 일희일비해서야 곤란할 테니까.
“오크 무리가 길을 막았습니다. 금방 정리가 될 것 같으니 안에 계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나. 앞으로 징그럽게 보게 될 텐데 괜히 사서 고생을 하는군.”
내가 밖으로 나서기 전, 그럴 필요 없다고 한 중년의 마법사가 한 마디 더 붙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마차 안은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애초에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자신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신경 쓰지 않으니까.
덜커덩-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그세 전투가 끝이 났는지 마차의 바퀴가 다시 한 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몬스터와의 전투가 있었던 그 날 밤, 나는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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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그것은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어느새 이마에 송골송골하게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다시 한 번 꿈의 내용을 되짚어봤지만 그런 ‘경험’을 한 적은 없었다. 더없이 생생하되 분명한 꿈이었다. 그러하니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분명히 이런 식으로······.”
꿈속에서의 나는 나이되 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꿈속에서 내가 했던 일은 꿈이 깬 지금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한 번 해봤다.
“으음.”
주먹에 알맞게 쥐어지는 돌멩이. 단지 한 글자. 한 글자를 세기는 것임에도 적지 않은 마력이 빠져나갔다. 대신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폭(爆’-터질 폭)’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돌멩이 하나.
“어딜 가십니까?”
“잠시 실험해볼 것이 있으니 폭음이 들리더라도 무시하게.”
보초를 서는 병사들을 뒤로 한 채, 적당히 진영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자 손에 든 돌멩이를 있는 힘껏 던졌다.
펑-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단순히 꿈이 아닌 모양이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02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