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IF. 검은 개의 송곳니가 되기로 했다 (3)
* * *
내가 방문한 곳은 흑견씨가 식물을 키우는 거대한 수목원이었다.
땅굴의 가장 위층에 위치한 수목원은 가운데에 거대한 나무가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비어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낮에는 내가 수인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학교로 쓰고 있었다.
“사야 언니!”
분홍 고양이 수인 소녀 , 묘아가 귀를 쫑긋거리며 내게 달려와 안겼다.
“잘 놀고 있었어?”
“응. 있지, 언니. 나도 이제 언니처럼 싸우고 싶어. 잘 할 수 있는데…”
묘아는 주먹을 허공을 향해 뻗어 보였다.
그 모습에, 나는 조금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안돼.”
“...치.”
“대신 오늘은 나무타기 하면서 놀자. 알았지?”
그녀는 살짝 삐진 듯 보이더니, 나무타기라는 말에 꼬리를 살랑였다.
“좋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조그마했던 아이들은 어느새 내 어깨까지 머리가 올 정도로 커버렸다.
나더러 형이라 부르던 놈들이 이제는 언니, 누나라고 부르기도 하고.
조금 전 나무를 타던 묘아가 위에서 주르륵 내려오더니, 나에게 뭔가를 건넸다.
“언니, 이거 선물.”
“뭐야?”
그녀의 작은 손으로부터 무언가를 건네받았다.
손을 펴서 확인해보니 귀엽게 생긴 작은 도토리였다.
“제일 예쁜 거로 가져왔어.”
“고마워.”
그녀의 분홍색 꼬리가 살랑거렸다.
그 까불거리던 꼬맹이는 어디 가고 이런 능글맞은 소녀가 되었는지.
조금 있자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 내 곁으로 몰려왔다.
“뭐야? 또 묘아 혼자 사야 언니 독차지해.”
그러자 묘아는 내게 딱 달라붙으며 아이들에게 메롱을 해보았다.
“언니는 묘아꺼거든? 메롱”
“아하하…”
최근 들어 소유욕이 세졌다고 할까, 이 아이.
인간들에게 한번 납치됐던 걸 내가 구해낸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
방으로 돌아와 지친 몸을 뉘었다.
아주 어릴 때는 길리언과 같은 방을 썼지만, 금세 각방을 쓰게 되었다.
그때가 재밌었긴 했지. 친구와 캠프에 와 있는 것 같아서.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방 한구석에 놔둔 배낭이 생각났다.
조용히 몸을 일으켜 배낭에서 빨간 혈석을 꺼냈다.
“...”
역시 내 눈이 틀린 게 아니었다.
한 눈에 봐도 묵직하고 꽉 차있는 혈석.
최소 늑대 사르카정도의 급에서 나오는 중급 혈석이다.
중급 사르카부터는 령사의 무기가 있어야 토벌이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자연사 같은 경우를 고려하기에는 사르카에게 수명 따위는 없기 때문에, 더더욱 의혹은 한가지로 좁혀지고 만다.
[ 령사가 숲에 왔었다. ]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령사가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윈드가르트 루아레스라는 이름의 령사가 도적단을 단신으로 쳐들어왔었다.
단순히 정찰을 목적으로 온 듯했지만 혼자서도 우리 도적단의 20%는 처리했을 정도로 강력했었다.
지금의 내 무기는 그자의 장검을 녹여 만든 두 개의 단검.
이 검을 쥘 때마다 그때의 참혹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만약 또 령사가 숲에 정찰을 온 거라면, 도적단 토벌을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혈석을 들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벌컥.
길리언이 손에 접시를 든 채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사야, 저녁 안 먹었다길래 들고 왔…”
나는 황급히 혈석을 이불속으로 집어넣고 소리쳤다.
“야. 노크하라고, 노크!”
“앗, 미안…!
“...”
그제야 길리언이 들고 온 접시가 눈에 보였다.
오늘 좀 바빠서 끼니를 걸렀는데 따로 챙겨온 모양이었다.
탁자에서 요리를 허겁지겁 먹고 있자니, 길리언이 물었다.
“입맛엔 좀 맞아?”
“그걸 말이라고. 여관 양배추 수프보다 오만 배 맛있어.”
“아, 그건 진짜 심했지.”
고아원을 나왔던 당일날 배를 골며 억지로 먹었던 여관의 양배추 수프.
얼마나 우리고 우린 건지 약간의 풀냄새와 끈적한 물맛밖에는 나지 않았었지.
길리언과 나에게 있어서는 아프면서도 그리운 기억이었다.
“...그나저나, 사야.”
“응?”
행복하게 음식을 떠먹고 있는데, 길리언이 살짝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 숨긴 거, 혈석이지?”
“...”
빨리 감춘다고 감췄는데 그새 봐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미간을 부여잡고는 말했다.
“설마 또 위험한 짓 하러 간 거야?”
“...아니야.”
“그게 아니면 대체…”
거기까지 말하던 길리언이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살짝 당황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네가 잡은 게 아니야?”
아이 씨. 어떻게든 감추려고 했는데.
결국 나는 커다란 혈석을 탁자에 꺼내 올려두고 입을 열었다.
“어제 흑견씨랑 과일 숲에 다녀오는 길에 발견했어.”
표면이 깨끗한 거로 봐서 추출된 지 얼마 안 된 혈석이었다.
“대장도 알아?”
“아니. 아직은 나랑 너만.”
“설마, 다른 령사가…”
“아직 확신은 못 해. 가능성은 높지만.”
령사들은 보통 소수 인원을 보내 도적단의 위치를 알아낸 후 대대적인 토벌에 나서곤 했다.
윈드가르트의 경우는 정찰 중에 발각된 지라 어찌어찌 이길 수 있었지만, 만약 이번이 진짜 정찰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검은 개 도적단에는 령사들에게 대항할 만한 수단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령사 고유의 소환수 오스테온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해서는 마법, 혹은 혈석화살이 필요했으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만…’
오늘부터라도 혈석을 잔뜩 모아둘 필요가 있었다.
만에 하나 그들이 토벌을 나온다면 우리는 전부 죽은 목숨이 틀림없었으니까.
***
도적단의 동굴 뒤쪽에는 폭포로 난 작은 구멍이 하나 있었다.
백묘 대장이 가장 좋아하기도 하는 장소기도 한 그곳은 명상하기 좋은 장소였다.
폭포소리가 ASMR처럼 들려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음이 편해진단 말이지.
백묘를 찾다가 폭포 쪽을 찾아가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조심스레 옆에 앉아 똑같은 자세를 취하자 그녀가 한쪽 눈을 뜨고 물었다.
“웬일이냐, 사야? 네가 여길 다 오고.”
“생각이 좀 많아서요. 대장처럼 한 번 해보려고 그랬죠.”
“뭐, 난 언제든 환영한다만.”
눈을 감고 조용히 폭포소리를 들었다.
전생 적부터 시작해서, 여러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고아원을 나오기 전에 약속을 했던 게 있었는데.
루나라는 7살배기 소녀와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었지.
지금은 그녀가 그런 걸 기억하기는 할지 의문이지만.
당시에는 정말 진심이었다. 여기 남기를 선택한 지금으로서는 결국 지킬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강가의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자니, 대장이 물어왔다.
“사야.”
“네.”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냐?”
그녀의 물음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왜? 넌 인간이고, 거기가 더 편할 텐데.”
“수인이든 인간이든 저한테는 다 똑같아요. 이미 제 집은 여기고요.”
두 종족 다 본질적으로는 같았다.
똑같이 감정을 느끼고, 배고파하고, 때로는 이기적일 때도 있었다.
내가 여기에 남기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이들이 내 가족이라고 여겨서. 그것 뿐이었다.
물소리에 집중하고 생각을 비우려고 했을 때쯤, 그녀가 말을 툭 던졌다.
“그럼, 대장 한번 해보는 건 어떠냐?”
“...네?”
순간 내가 잘못들은 것 같아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대장 말이야. 네가 하면 잘 할 것 같은데 말이지.”
“농담도 심하셔라. 또 놀리시는 거죠?”
“농담 아닌데.”
“...”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장, 전 인간이라구요…?”
“응. 그게 왜?”
“수인 도적단에 인간 대장이라니, 이상하잖아요.”
“뭐가 이상해? 너도 우리 가족일 뿐이잖냐.”
나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다른 단원들이 절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벌써부터 인간인 내가 대장직에 오르면 나를 시기하고 험담할 모습들이 눈에 훤했다.
“처음에는 좀 잡음이 있겠다만, 능력으로 증명하면 되는 게 아니겠어?”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인 그녀는 폭포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바로 결정해주라는 건 아니다. 어차피 나도 바로 그만둘 생각은 없고.”
“그럼 대장이 계속하면 되잖아요. 살날도 저보다 훨씬 많으실 텐데.”
“...그냥, 좀 다른 일에 관심을 쏟아보고 싶어서.”
다른 일?
“예를 들면요?”
“여러 가지 있잖냐. 요리라든지, 농사라든지.”
백묘 대장이 하는 요리라.
횡설수설하며 후라이를 뒤집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와버렸다.
“...풉.”
“뭐야, 뭐가 웃겨?”
“되게 안 어울릴 것 같아서요.”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쳇.”
그녀도 나를 따라 살짝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궁금하긴 하네요. 대장의 요리.”
“...”
아무 말 없이 폭포 쪽을 바라보던 백묘.
“에잇.”
갑자기 나를 폭포 아래로 밀어버렸다.
“...!”
그녀 때문에 첨벙, 소리를 내며 물에 빠진 내가 위를 보고 외쳤다.
“웩… 갑자기 뭔 짓이에요!”
백묘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으로 뛰어들어 첨벙 하고 물을 튀겼다.
그리고는 물 위로 올라와 활짝 웃었다.
“역시 넌 놀려먹는 게 제일 재밌다니까, 사야.”
“...아, 진짜. 다 젖었네.”
그 날은, 한참을 물장구를 튀기며 어린아이처럼 놀았다.
계속 이렇게 평화로울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텐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