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루나 외전) 어리광쟁이 (1)
* * *
서술자는 루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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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 시절의 나는 상당한 어리광쟁이였다. 성격은 또 얼마나 포악한지, 보육원의 어른들이 다들 나를 다루는 걸 꺼렸을 정도였으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울며 짜증을 내고, 화나게 하면 이빨을 들이밀었다.
오락거리 하나 없는 보육원에서 유일한 놀 거리라고는 작게 난 풀밭에서 뛰어노는 것뿐. 이 날도 혼자서 뛰어 놀고 있자니 몇몇 남자아이들에게 시비를 걸려왔다. 이유는 단순했는데, 단순히 내가 다른 여자아이들과 다르게 행동한다는 점에서였다.
늘 하던 대로 나는 그들을 물어뜯을 작정으로 달려들었으나, 그들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있지, 우리 말로 하자. 응?”
“싫어!”
누군가 했더니 늘 혼자 구석에서 책만 읽고 있던 검은 머리의 소녀였다. 뭔데 끼어드는 건지.
화가 잔뜩 난 나는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고, 나를 말리려던 소녀의 팔을 힘껏 물었다.
보통 물리고 난 다음의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내가 이상한 아이라고 여기고 다시는 말을 걸어오지 않거나, 보복을 위해 나를 두들겨 패거나. 어차피 결국은 내게 관심을 끄게 된다는 점은 같았다.
한참을 물고 있는데 아무 반응이 없자,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소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
내가 전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그냥 말없이 팔을 내준 채 고통을 꾹 참고 살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물면 안 돼. 다른 사람들이 널 싫어할 거야.”
지금에서야 당연한 말이지만, 그 당연한 말을 한 번도 내게 제대로 해줬던 사람이 없었다. 그저 욕을 내뱉거나 화만 냈을 뿐,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직접적으로 말해 준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흥.”
그 반응이 재미없다고 생각한 나는, 결국 먼저 팔을 놓아주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남자아이들이 하나둘 욕하며 떠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재수 없게 쟨 왜 왔대?”
“으, 저주 옮길라. 가자.”
그들은 검은 머리의 소녀를 괴물 따위로 부르며 멀리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내가 눈 앞의 소녀에게 화내며 물었다.
“멍청이. 왜 가만히 있어? 너 욕하잖아!”
늘 무시 속에 살면서도 대응 한번 하지 않는 그녀가 답답해 보였다. 당한 건 두 배로 되돌려줘야 적성이 풀렸던 당시의 나는 그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검은 머리 소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사실도 아니잖아. 일일이 대응하면 내가 더 피곤한걸.”
“네가 그러면 쟤들은 계속 저런다고, 바보야!”
“...별로 상관없어.”
그녀는 이상했다. 나도 상당히 별난 아이였지만 그녀만큼은 아니었다. 때로는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그녀는, 마치 혼자서만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해주는 조언들은 좋은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여전히 이해되진 않았지만 나와 정 반대스러운 행보를 지닌 그 소녀에게 점차 호기심이 커져갔던 나는, 어느 새엔가 그녀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게 되었다.
“이번엔 뭐 할 거야?”
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야에게 묻자, 그녀는 작은 몸에 어울리지 않은 커다란 책을 펼치며 말했다.
“바깥 세상에는 뭐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당시의 나에겐 읽지도 못하는 글자들이 빼곡히 들어선 책이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이상해. 그런 걸 알아서 뭐 하려고.”
보육원 안의 세상만이 내겐 전부였을 시절이었다. 내 말을 들은 사야는 작게 웃으며 자신의 옆 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궁금하면 옆에 앉아 볼래? 읽는 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책을 노려보던 나는 마지못해 그녀의 옆에 앉았고, 서서히 사야가 해주는 설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게 오스테온이고, 옆에 검은색으로 칠해진 게 사르카야.”
“둘이 뭐가 다른 거야?”
“원수 지간이라고 할까 할까.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인.”
“나랑 원장님처럼?”
그 말에, 사야가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네.”
그녀가 해주는 이야기들은 매우 흥미로웠다. 지금껏 보육원 바깥의 세상에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 없던 내가 관심을 가질 정도였으니까.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어째서 그 나이의 어린 아이가 그런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면모가 더욱이 사야를 신비스럽게 느껴지게 만들었으리라.
***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고급스런 장식물이 달린 천장이 나를 반겨주었다. 자그마했던 손은 방금과는 비교도 안되게 쭉 뻗었고, 보육원의 싸구려 이불이 아닌 고급스런 재질의 보드라운 이불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잠깐 어릴 적의 꿈을 꾸었던 모양이었다.
‘...왜 그때 꿈을.’
벌써 10년도 훨씬 지난 기억일 텐데 마치 어제 경험한 것처럼 생생한 꿈이었다.
시계를 보니 일어날 시간이 진작 지나있었다. 검을 쥔 이후로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건만. 평화로움에 익숙해 진 것일까, 아니면 유리의 저택이 너무 편했던 것일까.
평상시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을 시간이건만 늦어버리고 말았다. 잠이 채 깨지 않아 몽롱한 기분 속에서, 나는 문을 열고 복도를 나왔다.
‘아무도 없네. 그럴 것 같았지만.’
프리지아는 요 며칠 파견 때문에 저택을 비운다고 말했으니 당분간은 사야와 둘 뿐이었다. 주방으로 가서 아침을 준비할까 했는데, 왠지 오늘은 조금 변덕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목적지를 바꾸어 사야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문을 여니 세상 모르게 자고있는 그녀와 책상 가득 널브러진 종이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사야에겐 최근에 글을 쓰는 취미가 생긴 모양이라서 저택에 있을 때에는 방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늘었다. 그 덕분에 조금 쓸쓸하기도 하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열의를 보이는 활동은 흔치 않았기에 오히려 조금 기쁘기도 했다.
잠들어 있는 사야는 무척 신비한 느낌을 풍겼다. 자신은 늘 아니라며 부정하지만, 길게 빠진 속눈썹 하며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보다 보면 여성이 보아도 매력적으로 다가올 외모임은 분명했다.
“...으음.”
그녀가 잠버릇으로 이불을 자연스럽게 밀어내자 가벼운 복장과 함께 새하얀 팔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여리고 곱상한 외모와 대비되는, 수많은 흉터가 잔뜩 새겨져 있었다. 본인의 말로는 강함의 증거 같은 것이라지만 피부에 생채기 하나 없는 유리를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이제 사야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깨울 시간이었다. 그런데 오늘 꿨던 꿈 때문이었을까? 가만히 자고있는 그녀를 그냥 깨우는 것이 조금 아깝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옆에 누운 나는 사야를 향해 몸을 돌렸다.
가까이서 본 얼굴은 더욱 곱상한 느낌이었다. 눈 밑에 난 흉터가 이제는 귀엽게만 느껴졌다. 한쪽 귀 뒤로 숱 많은 머리카락을 넘긴 스타일이 몇 번을 보아도 마음에 들었다.
은은하게 사야의 체취가 전해져 왔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체취는 나를 무척이나 안정시켜 주곤 했다. 불안 속에서 잠을 설치던 날도, 하염없이 울어서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날도 그녀는 존재만으로도 나를 안심 시켜 주었다.
조금 더 가까이 관찰하고 싶었던 기분이 든 나는, 사야의 몸에 닿지 않을 정도로만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숨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올 정도로 가까이 붙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
사야를 바라보고 있자면, 마음 속 어딘가가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두 번의 이별을 경험하면서 한가지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면,
나에겐 그녀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내 안에 자리 잡은 채로 떠나버리자, 그 공간은 자연스레 빈 방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미 가슴 한 켠에 자리 잡아 버린 방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 오직 그녀 하나 뿐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그녀만이 채워줄 수 있는 커다란 구멍 같은 것이었다.
이건 소유욕일까? 아니면 욕심인 걸까?
사야는 내가 아니라도 누구에게나 똑같이 상냥했다. 한 번도 내색한 적은 없었지만, 앞으로 없을 것이지만, 그녀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 미소를 보이는 것이 싫었다.
그것이 누가 되었든 상관없이, 오로지 나만을 바라봐주었으면 했다.
살아 숨 쉬는 1분 1초를, 온전히 그녀와 보내고 싶었다.
‘...지독한 욕심쟁이지. 나도.’
그것이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알기에, 언제나 혼자서 그러한 생각을 속으로 삭혔다.
지금 이렇게 살결이 맞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그녀와 지낼 수 있다는 것은 꿈만 같았다. 하지만, 거기서 만족할 수 있을지 나 자신조차도 의문이 드는 요즘이었다.
이제는 위험할 정도로 가까워져 버린 그녀의 얼굴을 앞에 두고, 수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이대로 품에 안아 버릴 것만 같은, 무심코 입을 맞댈 것만 같은 충동이.
그렇게 된다면, 사야는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이런 내가 기분 나쁘다며 밀어내려나.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무어라고 하든, ‘괜찮아’라며 받아들여 줄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기에 더욱이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나만의 욕심일 테니까.
“음…”
“...!”
사야가 살짝 표정을 찡그리고 뒤척이는 소리에 정신이 바짝 돌아왔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올바른 행동은 그녀에게서 떨어진 후,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장난을 치며 사야를 깨우는 일이었다.
그랬었다. 그래야만 했는데, 사야는 예상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떠버렸다.
“...”
“...”
자신의 눈앞에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나와 눈이 마주친 사야는, 살짝 당황한 눈빛으로 아무 말 없이 정지해있었다.
위험했다.
지금이라도 그녀로부터 떨어져서, 이 어색한 분위기를 웃음으로 풀어내려고 생각했다.
‘...아니, 이제 싫어.’
공교롭게도 내 안의 어리광쟁이는 그걸 원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거리를 벌리기는 커녕 조금씩사야의 얼굴과 가까워졌다.
더 이상 놓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면서.
아주 천천히, 시선을 맞춘 채로 얼굴을 아래로 내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