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IF. 그래도 클레드는 살아간다 (2)
* * *
학생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클레드가 기둥에 기대어 말했다.
“클라라다. 클레드의 누나. 당분간 너흴 대신 맡기로 했으니 그렇게 알아라.”
갑작스럽게 새로운 교관을 맞이한 학생들은 혼란스러웠다.
‘클레드의 누나라고···?’
자신을 클라라라고 소개한 묘령의 여성은 머리색, 눈매 등을 제외하면 클레드와 겹치는 부분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미인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눈길을 빼앗은 건 책상에 딱 걸쳐놓은 무시무시한 가슴이었다.
“알아서 훈련들 해라. 모르는 거 있으면 오고.”
무성의한 수업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녀도 클레드와 똑같았다. 늘 훈련장 구석에 아무렇게나 자리 잡고 벌러덩 드러누워 낮잠을 취하는 클레드였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오늘은 여자의 몸이었다는 것이었다.
“···.”
훈련 중인 남학생들의 손이 멈추고, 자연스레 시선이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 대자로 누워서 상의를 거의 가슴 밑까지 들어 올린 채 무방비하게 잠을 퍼질러 자는 모습은 한창때의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자극적이었다.
결국 그녀의 뒤를 밟았던 사야가 한숨을 내쉬고는 그를 깨웠다.
“···저기, 클라라?”
“···?”
“그렇게 누워 계시면 령사들이 전혀 훈련에 집중을 못 할 것 같은데요···.”
사야의 말에 자신의 복장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확인한 클레드는 황급히 상의를 끌어내리고 말했다.
“···아, 미안하군. 내가 좀 더위를 많이 타서.”
클레드는 평소처럼 시간이나 때우다 가려고 했건만, 귀찮게도 사야가 따라붙어 버렸다.
‘왜 따라 온 거지, 이 녀석···?’
“적응을 잘 하실까 걱정이 돼서요. 아무래도 첫날이라 뭘 해야 할 지 모르시겠죠?”
그녀의 쓸데없는 배려가 귀찮은 클레드였지만 그래도 애써 웃는 얼굴로 답했다.
“···응, 그렇네.”
“그럼, 학생들에게도 실력을 보여주실 겸 저랑 연습 대전을 해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뭐?”
자신이 잘 못 들은 것은 아닌지 되물었지만 사야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인상 깊은 첫인상을 남기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저도 개인적으로 좀 궁금하기도 하구요.”
오랜 기간 사야를 훈련시킨 클레드로서는 그녀의 태도가 귀엽게만 느껴졌다.
‘짜식, 머리좀 컸다고 자신만만해서는···.’
마침 자신의 제자가 어느 위치까지 올라와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던 클레드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 심심하던 차에 잘 됐네.”
“시원스런 대답 감사해요. 클라라.”
학생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다른 전투 교관인 루나에게 심판을 맡기게 되었다. 루나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클라라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클레드의 누나라고? 예쁜 분이시네.’
루나가 시작을 선언하자, 사야와 클레드는 서로 목검을 들고 마주 보며 섰다. 잔뜩 긴장이 들어간 사야와는 달리 클라라의 태도는 하품까지 할 정도로 여유로웠다.
‘이러다 날 새겠군.’
결국 사야의 쪽에서 먼저 클레드를 향해 돌진했다.
“갑니다···!”
그녀가 전력을 실은 공격을 날려왔으나 여전히 클레드의 눈에는 그런 사야가 귀엽게만 보였다. 마지막으로 검을 맞댔을 때만 하더라도 클레드는 사야에게 공격 한번 허용한 적이 없었다. 그때의 그녀를 추억하면서, 싱거운 태도로 대전에 임했다.
그녀의 움직임을 관찰한 결과 과거와 비교하면 정말 눈에 띄게 자세가 좋아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동작이 느ㄹ···.’
“얍!”
클레드의 머리에 사야의 목검이 내리꽂혔다. 대응할 시간도 없이 공격에 당한 클레드는 코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
그녀가 어리둥절하며 있자니 사야가 검을 내리고 걱정스레 물어왔다.
“괜찮으세요···!? 진심으로 해도 된다고 하셔서 그만···.”
클레드에게 순간적으로 그녀의 손동작이 보이지 않았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게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건가 싶었다.
사야가 당황하며 대전을 중지하려고 했을 때, 클레드가 다시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괜찮아, 계속하지.”
코피가 줄줄 흐르는 클라라의 표정을 본 사야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진짜 괜찮으신 거 맞죠?”
“문제없다.”
잠시 피가 멈출 때까지 기다린 후, 그녀들의 2차전이 시작되었다. 클레드는 이번엔 제대로 기합이 들어간 채 목검을 잡은 손에 힘을 빡 주며 생각했다.
‘사야, 넌 확실히 강해졌다. 나와 대등하거나 어쩌면 그 이상이야.’
2년 전에 보았던 그녀는 이제 없었다. 자신의 손을 떠난 지 오래인 한 명의 어엿한 령사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사야에게 당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집중한 채 클레드 쪽에서 먼저 달려들었다.
‘젠장, 가슴이 거슬리는군···.’
그녀의 기습에 사야가 놀라며 몸을 피했다.
‘빠르다, 클라라···!’
마치 클레드의 기술을 본뜬 것 마냥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수인족의 체술이 섞인 특유의 동작을 사야가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그녀가 당황함을 눈치챘는지, 클레드는 승리를 확신하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날 넘어서기엔 아직 100년은 이르다, 사야···!’
아까는 방심해서 당한 것이었고, 지금 클레드 자신은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얍.”
사야의 목검이 클레드의 머리에 강하게 내리꽂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머리를 또다시 얻어맞은 클레드는 얼굴을 바닥으로 향하며 쓰러졌다. 이번에는 루나까지 달려와서 바닥에 누운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경기 중단···!”
클라라가 기절했다고 판단한 루나가 사야의 승리를 선언했다.
“···아무래도 네가 이긴 것 같아, 사야.”
학생들을 불러 그녀를 양호실로 옮기려는데, 갑자기 클라라가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났다. 벌떡 일어난 그녀는 사야의 목에 헤드락을 걸고 자신의 가슴에 밀착시키며 말했다.
“장하다···!”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을···.”
“강해졌구나, 이 녀석···!”
영문도 모른 채 붙잡힌 사야는 1분은 더 지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
그 뒤의 일정은 평범하게 진행되었다. 클레드가 쉬고 있으면 몇몇 학생들이 와서 도움을 청하고 그녀는 그것을 조언과 함께 짧게 지도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학생들의 태도는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감사함다···!!!”
“···?”
똑같이 해줬을 뿐인데 자신에게 고개를 90도로 숙이고 깍듯이 인사했다.
‘이놈들이 뭘 잘못 먹었나.’
평소보다 어째 학생들이 많이 찾아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가 시계를 보니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되었다.
“···클라라?”
모든 일정을 마친 뒤 기지개를 펴고 일어난 클레드에게 사야가 다가왔다.
“오전 일은 죄송했어요. 클레드랑 겨룰 때를 생각하면서 싸우는 바람에···.”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사실 자신이 싸운 대상은 클레드가 맞지만, 그것을 사야가 알 수 있을리 없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사야가 그녀에게 물었다.
“잠시 옆에 앉아도 될까요?”
“좋을대로.”
클라라가 상관없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하자 사야가 그녀의 옆에 걸터앉았다.
“클레드, 저희한테 말도 없이 왜 떠나버린 걸까요. 원래부터 변덕이 심한 분인 줄은 알았지만···.”
“원래 그런 놈이야. 어릴 때부터 지 맘대로였거든.”
그러자, 사야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제 인생에 하나뿐인 스승님이지만요.”
“···스승? 그 놈이?”
그녀가 자조적인 웃음을 짓자 사야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클레드가 아니었으면 아마 지금 전 여기 없었을 수도 있어요. 몇 번이고 목숨을 구해주셨는 걸요. 대충 사는 것처럼 보이셔도 사실은 누구보다 올곧은 분이세요.”
“···.”
요즘은 정말로 대충 살았던 클레드였기에 그녀의 말에 조금 얼굴이 화끈거렸다.
“만나 뵙게 되서 정말 반가웠어요, 클라라. 내일 또 볼 수 있겠죠?”
“···그럼.”
유리가 걱정했던 것처럼 그녀가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한 사야는 웃음을 짓고 인사하며 아카데미 본관을 향해 걸어갔다.
‘···나도 슬슬 퇴근할까.’
몸이 바뀌어서 이래저래 걱정이 있었지만 클레드의 생각보다 하루를 잘 넘겼다. 무엇보다 제자의 성장도 직접 몸으로 겪어서 만족스러웠다.
그녀가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나려는데, 뒤에서 남학생들이 단체로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클라라 교관님···!”
그 광경에 클레드는 벙찐 표정이 되어 얼어붙었다.
‘왜들 이래, 이 새끼들···?”
“교관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했더니 오늘에서야 드디어 안되던 자세를 성공했습니다!”
“혹시, 특별 지도를 부탁드릴 수는 없을까요···!”
“근처에 좋은 식당이 있는데, 꼭 식사를 대접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을 열의에 불타는 태도로 클레드를 둘러쌌다. 처음에는 그 반응이 부담스러웠던 클레드는, 어느샌가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서부터 이상한 기분이 올라왔다.
‘···뭐야, 왜 기분이 이러지···?’
평소처럼 놀고 먹어도 자신을 떠받들어주는 남학생들의 태도가 무언가 클레드를 기분 좋게 만들어다. 훈련 중에 흘낏흘낏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도, 부담스러운 태도들도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안돼. 이러면 마치 내가···.’
자신이 정말로 여자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클레드는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훈련시간 끝났다. 징그러운 새끼들 같으니, 꺼져!
일부러 험한 말투를 섞어 쓴 그녀였으나, 그들의 반응은 오히려 뜨거웠다.
““감사합니다!””
‘···빨리 여길 떠야겠어.’
위기감을 느낀 클레드가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남학생 한명이 그에게 물어왔다.
“교관님! 내일도 볼 수 있는 겁니까···?”
“···.”
대답을 고민하던 클레드는 자신도 모르게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앞으로 질리도록 보게 될 거다. 멍청이들아.”
“우오오···!”
학생들의 열렬한 환호속에서, 클레드는 무언가 뒤숭숭한 마음을 지닌 채 퇴근했다.
다음 날, 클레드의 몸은 바로 원래대로 돌아왔고, 그들은 영원히 클라라를 볼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