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루덴의 아이들
* * *
별 볼일 없이 평화롭던 여느 주말이었다. 루나와 소파에서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뒹굴고 있었다. 내 머리를 살며시 움켜쥔 루나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좀 길러보라고 해도 그렇게 귀찮다고 하더니, 무슨 심경의 변화이려나. 살짝 묶일 정도로 길렀네?”
“전에 한 번 어쩔 수 없이 기른 적 있었잖아. 그때도 그렇게 불편하진 않더라고.”
한번 길렀었다가 자른 머리였는지라 이제 기르는 데에 별로 저항감은 없었다. 관리가 좀 귀찮긴 하지만서도 매번 자르는 것도 손이 가고 하니 다시 조금 길러보려는 의도였다.
그녀는 내 머리끝을 잡고 배시시 웃으며 장난을 쳤다.
“···많이 컸네, 우리 사야.”
“···그 말을 너한테 들으니까 좀 기분이 이상한데.”
“그런가?”
우리가 한참 웃고 떠들고 있을 때, 대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유리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내가 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어서 와. 아침부터 어디 다녀왔었나 봐?”
“잠깐 들릴 데가 있었어. 참. 그것보다···.”
유리는 우리 쪽으로 오더니, 루나에게 편지 한 장을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루나가 물었다.
“편지네?”
“루나 앞으로 온 거야. 발신자가··· 헬레나라고 적혀있네.”
유리가 말한 이름에 우리 둘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루나는 곧바로 그녀에게서 편지를 받아들고 내용을 확인했다.
“···.”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무슨 내용이길래···?”
헬레나는 우리에게 부모님과 같은 존재였다. 루덴에 있던 보육원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나를 다른 아이들과 평등하게 대해주셨던 분이었고, 그녀의 배려가 있었기에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배웠던 이 세계의 언어는 모두 그녀로부터 습득했던 것이었고, 내 방출을 번번이 미뤄줬던 것 또한 그녀였다. 헬레나는 우리를 돌봐주었을 때 이미 머리가 하얗게 새어있었다.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편지를 찬찬히 읽어내린 루나가 입을 열었다.
“헬레나 아주머니, 은퇴하셨대.”
그 말을 듣자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
“웬 한숨?”
“···그런 게 있어.”
이제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헬레나는 자연스레 은퇴하여 가족들의 부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편지에 적혀있었다.
편지 봉투를 이리저리 살펴본 루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 장이 더 들었는데?”
편지를 꺼내든 그녀는 잠깐 읽어보더니 그것을 내게 건넸다.
“사야, 받아.”
“엥, 나 받으라고?”
“그래. 이거 네 거야.”
편지를 받아 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헬레나가 나한테···?’
정식으로 입양 절차를 밟았던 루나와 달리 방출되었던 나는 제대로 된 신분이 존재하지 않았었다. 아카데미의 입학 전에는 헬레나와 따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고, 루나가 그녀와 간간히 편지를 교환하는 정도로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물론 신분이 생기고 나서는 사실 완전히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빨리 읽어 봐, 사야.”
“응.”
두근대는 마음으로 편지를 열자 편지에 빼곡히 적힌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야에게. 얼마 만에 네 소식을 전해 들은 지 모르겠구나, 사야. 바르나바라는 근사한 성도 생겼다지? 거기 갈 수만 있다면 꼭 한번 얼굴을 보고 싶은 기분이 들어.
최근에 사람들이 가끔 네 얘기를 하곤 한단다. 너랑 이름이 같은 령사가 엄청난 활약을 하며 제국 전역을 돌아다닌다길래 설마 했는데, 루나의 편지를 보니 그게 진짜 너라는 걸 보고 놀라서 기절할 뻔했어. 그거 아니? 보육원을 관두기 전에 원장님이 네 이름을 꺼내더라니까. 그 아이가 검은 머리에 대한 인식을 많이 바꿔 놓았다면서.
거기까지 읽던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 원장이 날 기억한다고? 진짜 놀랄 일이네.”
옆에서 그 말을 들은 루나가 한마디를 거들었다.
“···난 원장 그 여자 싫어. 맨날 혼내기만 했고.”
“확실히 루나 네가 싫어할 만했지.”
웃으며 그녀의 투정을 받아친 나는 계속해서 편지를 읽어나갔다.
···여기서부터는 네게 늘 말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란다. 아직도 그날이 선명하게 기억나.
그날 들어왔던 수많은 아기 중에서, 넌 유일하게 울지도 웃지도 않는 신기한 아이였단다. 새까맣게 검은 머리가 참 예뻤었지.
그 당시에 보육원은 정말로 재정이 좋지 못했어. 모든 아이에게 충분히 분유를 먹일 수 없을 정도였단다. 결국 양을 절반으로 줄이고도 부족해서, 우린 투표를 통해 굶길 아기를 선택한다는 천하의 몹쓸 짓을 저지르고 말았어.
그 부분을 읽어내리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 기억난다···. 기억나.’
아직 혀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서 옹알이나 겨우 했을 무렵 분유의 양이 절반으로 줄더니 어떤 날은 아예 빈 병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간단했다.
아주 열심히 시위했다.
짤따란 팔다리를 억지로 움직여가며 다른 아이들이 그것을 먹을 때 아주 징그럽게 달라붙었다. 아주 약간이라도 내게 분유를 남겨줄 때까지.
정말이지 신기할 노릇이었어. 그렇게 조용하던 아이가 손가락을 꽉 쥐고 놓아주질 않던 거 있지. 삶에 대한 의지가 무척 강한 아기였단다.
결국 너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내게 말하는 법을 배웠었지. 그 정도로 말을 빨리 떼는 아이는 처음 봤단다. 널 가르치는 하루하루가 놀라움의 연속이었어. 사야.
그렇게 네가 쑥쑥 자라서 보육원에서 내보내야 하던 날이 되었을 때, 정말이지 잠을 한숨도 못 잤단다. 떠나고 나서는 며칠 동안이나 울었는지 모르겠어. 항상 죄책감을 품고 살았단다. 어떻게든 너를 감쌌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지금이나마 네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정말 기뻐서 펄쩍 뛸 것 같았단다. 살아남아 줘서 정말로 고맙구나, 사야. 가슴으로 품은 내 딸.
그 뒤로는 루나에게 적어준 것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편지를 다시 접은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말했다.
“···뭘 새삼 걱정하고 그러셨대. 참나.”
그러자 옆에 있던 루나가 얼굴을 밀착해왔다.
“눈물이 아주 그렁그렁하네, 사야?”
“아니거든.”
사실 편지를 읽어내리는 중간부터 울고 싶어서 혼났다.
우리에게 편지를 가져다줬던 유리가 작게 웃으며 계단에 올라섰다.
“뭔진 모르겠지만, 너희가 웃으니까 좋아 보이네. 이제 볼일들 봐.”
“응. 고마워!”
유리에게 간단하게 감사 인사를 건넨 내가, 무언가 잊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아, 한 명 더 있었는데. 깜빡 잊고 있었네. 루나, 잠깐 나랑 같이 좀 가자.”
루나가 의아한 듯 물었다.
“응? 어딜 가려고?”
“어디긴. 동창회 하러 가야지.”
***
길리언의 보육원은 오늘도 수인 아이들과 인간 아이들이 한데 뒤섞여 뛰어노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루나와 함께 안에 들어선 내가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와, 여긴 여전히 기운 넘치네.”
루나가 손을 흔들며 길리언을 불렀다.
“우리 왔어, 길버트!”
길리언은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답했다.
“반가워. 근데, 길버트가 아니라 길리언··· 인데.”
루나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못 외웠다. 이쯤 되면 일부러 같기도 하고.
내가 해준 이야기를 전해 들은 길리언은 그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헬레나 아주머니가 은퇴를?”
“응. 우리도 방금 막 전해 들은 참이야.”
“···엄청 좋은 분이셨지.”
그녀와 친했던 아이들은 그 험악한 환경에서도 삐뚤어지지 않고 착하게 자라주었다. 루나와 길리언이 그것을 증명했다.
“어거스트가 날 괴롭힐 때마다 항상 도와주셨었지. 그립네···”
그 이름이 나오자 내가 얼굴을 구기며 쓴웃음을 지었다.
“···길리언. 우리 그런 놈 이름은 굳이 꺼내지 말자. 기분 좋은 날에.”
“아, 그랬었지. 미안.”
어거스트는 불우한 환경이 어디까지 사람을 사악하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적절한 예시 같은 녀석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친구 두 명을 노예상에 팔아먹을 생각을 하는 사탄의 자식 같은 놈이었으니까. 지금은 사르카 밥이 되었지만.
우리와 함께 과거를 회상하며 잠깐 추억에 잠겨있던 길리언이 웃으며 물었다.
“참, 너희 점심 안 먹었지? 괜찮으면 먹고 가지 않을래?”
“정말? 우리야 고맙지.”
길리언은 검은개 도적단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는 동안 주방에서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지금은 고기로 하는 요리라면 세말에 있는 어떤 요리사와 견주어도 꿀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다.
길리언의 제안에 루나가 활짝 웃으며 감사를 건넸다.
“고마워! 길레인!”
“···어, 그래.”
길리언이 이름을 정정하려다가 포기하는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내가 폭소를 터뜨렸다.
“지금까지 말한 이름 중엔 제일 비슷했네?”
“···하.”
길리언의 한숨을 들으며 우리는 부엌으로 향했다. 그가 해준 요리를 먹으며 그간 못했던 이야기나, 당시의 그리웠던 이야기를 잔뜩 쏟아냈다.
내 유년 시절에 이 두 사람이 있어 준 것에 대해서, 정말로 기쁘게 생각했다.
오늘의 삽화는 1화의 그림을 자체 패러디해서 그렸습니다. 세월의 흐름이 막...느껴지는...그림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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