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에 전생했다-88화 (88/102)

〈 88화 〉 내 소설에서 작가로 살아보기

* * *

내 방이 생겼다.

유리가 비어있는 방 중 아무 데나 고르라고 하길래 대충 그녀의 방에서 가까운 곳으로 골라잡았다.

안에 가득 들어찬 먼지나 잡동사니를 빼낸 후 청소를 마치고 나니, 네 명이 같이 쓰던 기숙사의 방보다 넓은 방이 생겼다.

겨우 책상과 침대 정도 있는 단순한 방이지만 이곳에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만의 방을 가진다는 의미는 컸다.

'···시작해볼까.'

책상에 바른 자세로 앉은 나는 펜을 집어 들었다.

이제 와서 정말 새삼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여긴 내가 쓴 소설 속의 세계였다. 글 쓰던 버릇을 못 버린다고, 결국 이 세계에서도 살만해지니 펜을 쥐어버리고 말았다.

텅 빈 새하얀 종이를 바라보는 단계. 소설을 쓰는 모든 과정 중에서 가장 즐겁기도 하면서, 또 지독하게 끔찍한 과정에 속했다.

뒤죽박죽인 상태의 머릿속에서 쓸만한 소재들을 가져와 종이에 옮겨 담았다. 요즘은 마음이 안정돼서 그런지, 자극적이고 잔인한 장르보다는 기분 좋게 볼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이 시대에 이런 소재를 생각해 낸 사람은 없겠지···!'

딱 잘라 말해서 나는 글 쓰는 재능은 영 꽝이었다. 작문을 못 한다기 보다는 내용이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전생 때와는 달리, 이곳은 내가 만든 중세 판타지 세상이지 않은가. 성인이 돼서 아예 책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 분명 내가 뭘 쓰더라도 흥미를 느낄 것이 분명했다.

종이가 반쯤 채워지고 나니, 적어놓은 소재들을 쭉 둘러보며 생각했다.

'이거, 어쩌면 대작이 탄생해버릴지도···?'

벌써부터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얽고 얽히는 끈적한 인간관계, 서서히 밝혀지는 진실 같은 것에 대한 망상으로 머리가 가득 찼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될까, 사야?"

유리의 목소리였다. 나는 황급히 종이를 감추고 문을 열었다.

"어···. 어쩐 일이야?"

유리는 내 뒤를 슥 넘겨보더니 물었다.

"그냥. 방 옮기고 잘 지내나 해서 보러왔지. 불편한 건 없고?"

"없어, 없어. 엄청 만족 중이야."

"그래? 다행이네."

유리는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루나 쪽도 물어봐야 할 것 같네. 편히 쉬어, 사야."

"응···!"

유리가 떠나자, 나는 다시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휴."

그녀가 떠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동거동락한 유리라고 하더라도 글 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조금 그랬다. 철저하게 고독한 취미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완전히 독립된 공간에서야만이 온전히 자신만의 글이 나왔다.

그녀가 떠나자 다시 집중해서 종이에 글을 적어나갔다. 어느 정도 틀이 잡히니 생각보다 글이 술술 적혔다. 오랫동안 쌓여있던 창작 욕구가 터져 나와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드디어 1권 분량이 완성되었다.

'드디어···!'

소설의 주된 스토리는 용사였던 사실을 숨긴 채 아카데미의 스승이 된 주인공의 이야기로, 마왕의 핏줄인 여제자를 가르치다가 서서히 정분이 트여간다는 흔한 로맨스 판타지였다.

벌써 스스로 7번째 정독했고 스스로도 만족스레 느꼈지만, 무언가 가슴 속을 채워주지 못하는 찝찝한 기분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지금 나한테 없는 것···."

독자였다.

아무리 공들여 쓴 글이라도, 읽어 줄 독자가 없다면 무용지물이었다. 엄청나게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버린 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아니, 왜 그 생각을 못 하고 있었던 거지···?'

스스로 자신의 글에 만족하고 있다 보니 제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다행히도 나에겐 믿음직한 두 명의 예비 독자가 있었다. 각자 다른 성향을 지닌 루나와 유리에게 감상평을 맡겨본다면 객관적인 지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생각을 떠올린 나는 당장 실행에 옮겼다.

***

내 소설을 전부 읽은 루나와 유리가 거의 동시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루나에게 간 것이 원본이었고, 유리가 들고 있던 것은 심심해서 옮겨 쓴 필사본이었다.

각자의 다양한 반응을 기대하면서 내가 물었다.

"다들 어땠어, 이 이야기···?"

바로 대답해 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루나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으음…"

한참을 고민하던 루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글이 잘 읽혔고, 또··· 문장이 어렵지 않았어···!"

"···같은 말 아니야?"

"···어, 그런가?"

루나에게선 약간 미적지근한 반응이 돌아왔긴 했지만, 아직 유리의 평가가 남아있었다. 남은 시간 동안 소설을 빠르게 한 번 더 둘러본 유리는 단순명쾌한 어조로 말했다.

"읽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기대했던 유리의 반응은 싸늘하게 돌아왔다.

"애초에 왜 주인공이 자신이 용사인 걸 숨기는지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너무 가벼워서 안에 담긴 서사가 전혀 부각되질 않아.

"그, 그랬구나···"

"거기다가 사이 사이에 쓸데없이 집어넣은 선정적인 장면들 때문에, 안 그래도 난해한 스토리가 붕 뜨는 느낌이었고. 솔직히, 내가 왜 이걸 읽고 있어야 하는지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할까."

태풍 같던 유리의 평가가 한 차례 지나갔고, 혼이 나가 있는 나를 루나가 감싸 안으며 말했다.

"유리, 그만해. 그 정도면 충분히 전달됐어···!"

"···조금 지나쳤나?"

사실 유리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평소부터 나 자신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글은 재밌다며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아니야. 자세하고 객관적인 평가 고마워."

오히려 유리의 차가운 평가가 과열되어 있던 머리를 어느 정도 식혀준 기분이 들었다.

***

오늘은 펜을 잡지 않았다. 글을 쓰려고 해도 유리가 남겼던 평가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며 몇 번이고 되뇌어졌다.

'···역시 내 머릿속에서 나온 이야기에는 한계가 있는 건가.'

예전부터 다른 사람의 글은 잘 읽지 않았다. 감명 깊게 읽은 소설의 문체나 이야기 등을 자신도 모르게 가져와 버릴 것만 같았기도 했고, 내가 쓴 것과 달리 미려하게 쓰인 문장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토리 라인을 읽어내리다 보면 스스로가 너무 초라해 보였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결국 그러한 성향 때문인지 작문 솜씨는 좀처럼 늘질 않았고, 발전도 없이 좁은 자신만의 우물 안에서 글을 써 내려가는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어떻게 하면, 재밌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해선 안 될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잠깐, 여긴 내가 알고 있던 소설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잖아…?'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법한 노인과 바다 같은 고전이나 안데르센의 주옥같은 동화 모음집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자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내 몸은 서서히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책상으로 향했다.

'이건 베끼는 게 아니야··· 난 그저,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이곳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싶을 뿐이라고···.'

종이를 빼곡히 글자로 채워나갔을 때쯤에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룻밤이 꼬박 지나있었고, 나는 그대로 종이 더미 위에서 정신을 잃었다.

***

"오늘 문학 교류회에 참석해주신 귀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행사의 진행 순서는···."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뜬 곳은 생소한 인테리어가 놓인 방의 화장대 바로 앞이었다.

'뭐지···?'

내가 어리둥절하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니 뒤에서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가님, 슬슬 일어나셔야죠.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작가님···?'

생소한 호칭에 잠깐 놀랐던 나는, 그간의 잊고 있던 기억을 모두 떠올렸다.

'그래, 난 작가였어···. 그것도 연달아 세 작품을 성공시키며 황제에게까지 인정을 받아낸···.'

자신감을 되찾은 나는 문을 열고 나가서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래층으로 계단을 타고 천천히 내려갔다.

"오늘의 주인공, 시대가 낳은 대문호···! 사야 바르바나 님입니다!"

수많은 박수갈채가 나를 향해 쏟아졌다. 하나같이 지위가 높은 귀족들인데도 내 모습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쏟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체면을 버리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도 보였다.

내가 아래층에 도착하자 수십 명의 인원이 달라붙어 질문 공세를 펼쳤다.

"작가님, 대표작 '미운 병아리 새끼' 잘 봤습니다. 자신의 불후했던 어린 시절을 반영한 소설이라는 것이 사실인가요?"

"이번에 쓰신 '연극 속 엑스트라' 너무 감명 깊게 봤어요! 책에 사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에 대한 관심이 과열되자 경호원으로 보이는 자들이 내게 달라붙은 귀족들을 거칠게 떼어냈다.

"함부로 다가오지 마세요! 작가님 몸값이 얼만지나 아십니까!"

'···인기인은 피곤하다니까.'

어느 정도 상황을 정리하고 나자, 처음 나를 귀족들에게 소개했던 남자가 다가오며 말했다.

"사야 작가님, 괜찮다면 같은 길을 꿈꾸는 어린 문호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깍듯하게 그의 요청을 받아들인 나는 우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나 한 번씩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하죠. 하지만, 이 자리에서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모두가 나의 발언에 집중하는 가운데 내가 말했다.

"자신이 쓴 글을 읽어봤을 때 제 소설보다 재미없었다면, 그건 쓰레기랍니다. 일찍이 포기하고 난로에 장작 대신 던져 넣으세요."

무척이나 무례하게 들릴 수 있을 발언이었지만, 내가 유명인이 되고 나서는 똥을 싸기만 해도 사람들이 알아서 의미를 부여했다.

내 말에 감명을 받은 지망생들은 각자 감동하며 소리쳤다.

"그런 단순명쾌한 해답을 제시해 주시다니···! 역시 대문호십니다!"

"쓰던 걸 전부 태우고 오늘부터 새로이 시작하겠습니다···!"

그 뒤에, 귀빈들과 차례로 인사를 주고받고 있자니 저택 전체에 댕­ 하는 소리와 함께 괘종시계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벌써 12시인가.'

잠은 창작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활동이었다. 한 글자가 천금의 가치를 지니는 나 같은 인물 정도 되면 수면시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칼같이 지켰다.

나는 아직 내게 인사하지 못한 귀족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세요. 피곤하네요."

나를 보러오기 위해 마차를 타고 꼬박 한 달을 보낸 사람도 있다지만 솔직히 알 바 아니었다. 졸리니까 잠이 더 중요했다.

내가 계단을 오르려는데, 뒤에서 무언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야, 잘 지냈어···?"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본 나는 나를 부른 누군가를 째려보며 물었다.

"···누구였더라, 혹시 우리 아는 사이였나요?"

"나잖아, 루나. 네 친구. 벌써 잊은 건 아니지···?"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작게 탄식하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 것도 같고. 여긴 어쩐 일이야?"

"벌써 못 본 지 1년은 된 거 같아서···. 그 뒤론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첫 번째 소설이 전 국가적으로 대박을 터트리자 나는 유리의 저택을 나와 곧바로 저택을 장만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했더니···.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면 할 시간 없으니 이만 가주겠어?"

"잠깐, 하나만 더 말할게. 사야···!"

"···뭔데? 바쁘니까 빠르게 핵심만 말 해줘."

"못 본 지도 오래됐고 해서, 유리랑 내가 저녁이라도 초대할까 하는데 어때?"

"음··· 저녁이라. 저녁 좋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루나는 화색을 띄웠다.

"진짜? 그럼 아마 다음 주 중에···."

"1년 정도 뒤에 일정 잡아둘게."

"1년···?"

"스케줄이 가득해서. 원래는 더 밀려있는데, 너희를 봐서 특별히 당긴 거야. 고맙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네."

"···알았어. 사야···. 다음에 꼭 편지 쓸게!"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내 시간은 비쌌다. 명작을 찍어내기만 해도 인생이 모자랐으니까.

'슬슬 차기 작품 집필에 들어가 볼까···.'

다음에 적당히 베껴 올 문학 작품을 생각하면서, 나는 기다란 복도를 거닐었다.

***

"사야?"

또다시 누군가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뭐야···? 감히 누가 대문호의 침실에 허락도 없이···."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야. 밥 먹게 빨리 나와."

유리가 나를 흔들자 흐릿했던 시야가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내 앞에 놓인 것은 고급스런 화장대가 아닌 원목으로 된 익숙한 책상이었다.

"···어."

아무래도, 꿈이었던 모양이다.

"아침 차려두고 너만 기다리고 있었어. 빨리 내려가자."

"어? 응···."

책상에는 내가 밤새 써놓은 표절작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자는 동안 손으로 잉크통을 넘어뜨렸는지 종이가 새까맣게 물들어 아무런 글자도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깝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녀를 따라 복도로 나오는데, 유리가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받아."

"뭐야, 이 종이 더미는?"

유리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니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눈이 퀭해 보였다.

"밤사이에 네 소설에서 고쳐야 할 것 같은 점을 쭉 정리해 봤어. 그리고 몰랐는데, 네 번 정도 더 읽으니까 나름 재밌는 부분도 좀 있더라."

"···진짜?"

"그래. 주인공이 자기가 용사였다는 걸 대중 앞에서 밝히는 장면은 좀 재밌었어. 물론, 그 뒤로 이어지는 신파극이 다 망쳐놨지만."

"고마워. 이 정도까지 해줬을 줄이야···."

솔직히 그녀에게 감동해버렸다. 나조차도 여러 번 읽다 보면 고통스러운 내 글을 밤사이에 계속해서 읽어줬다니.

"감사는 됐고, 빨리 내려가자. 루나가 계속 기다리니까."

"알았어."

한 달간 썼던 소설은 과거에 썼던 것보다 크게 나아지거나 하진 않았다. 분명 재미도 없을 것이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걸 깨달았다. 결국 남의 작품을 베껴 만든 글은 자신의 노력이 아닌, 그 사람의 땀과 눈물을 훔치는 일이라는 것을.

마음에 껴있던 먹구름이 한층 사라지는 기분이 든 나는 평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는데, 유리가 내게 물어왔다.

"···그런데 사야. 로맨스 소설이라는 건 꼭 남자와 여자 사이의 서사로만 묘사되는 거야?

"무슨 소리야, 그게?"

"···그러니까, 꼭 남녀끼리가 아니더라도···."

내게 무어라 말하려던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됐어. 넘어가."

"아니, 뭔데 그래. 제대로 설명을 해보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아무튼, 앞으로도 글을 쓰는 취미는 계속해서 이어나갈 듯싶었다. 내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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