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비가 추적추적 떨어지는 밤에
* * *
비가 추적추적 떨어지는 밤이었다.
"···그렇게 해서,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 사르카 여신은 복수를 위해 밤마다 꿈에 나와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팔다리를 자르는 고통,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감각, 그리고 전신의 털을 전부 뽑히는 통증을···."
내가 거기까지 말하고 책을 내리자 벌벌 떨고 있는 루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서워···!"
벌벌 떠는 루나와는 상반되게, 유리는 전혀 흥미롭지 않다는 듯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꽤 무섭다길래 기대했는데 별거 아니네."
책을 덮은 나는 유리의 말에 동의했다.
"맞아. 쓸데없이 잔인한 묘사만 잔뜩 있지, 무서운 건 하나도 없잖아."
유리의 저택에서 지내게 우리는 나는 무서운 걸 보자는 내 의견에 따라 서재에서 제일 호러틱해보이는 소설 한 권을 집어와 낭독했었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무섭기는 커녕 오히려 점점 졸려올 정도였다.
혼자서만 덜덜 떨던 루나가 말했다.
"그래도 사르카 여신이 불쌍하지 않아? 인간들과 같이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유리의 생각은 좀 다른 듯 했다.
"인간들 입장도 생각해봐야지. 멀쩡히 잘살고 있는 마을에 그런 괴물이 나타나면 경계하고 보는 게 맞잖아. 게다가, 며칠에 걸쳐서 싫다는 걸 표출했는데도 포기 못 하고 마을에 계속 찾아간 여신이 미련한 거지."
두 사람의 감상 포인트가 많이 다른 듯 보였다. 루나는 사르카 여신의 입장에 이입했고, 유리는 철저하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인물들을 관찰했다.
의견이 갈리는 것을 들은 내가 말했다.
"어차피 정답은 없어. 이런 건 작가 마음이니까."
내 솔직한 감상으론, 그냥 작가가 좀 있어 보이는 고어 피폐물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다른 것도 봐볼까?"
다른 책을 하나 집어 들고 묻자 유리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늦었어. 슬슬 자두는 게 좋을 듯한데. 내일부턴 다시 아카데미 출근이니까."
"···그래. 그게 좋겠다."
이렇게 낭독회는 싱겁게 끝이 났다.
유리를 따라 복도를 걸으면서, 잠자리에 대해 의논했다. 그녀는 비어있는 방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가 이렇게 바로 올 거라곤 생각지 못해서 아직 청소가 하나도 안 돼 있어. 어쩔 수 없이 오늘은 내 방에서 같이 자자. 둘 다 괜찮지?"
유리의 말에 루나와 나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유리의 방을 구경할 수 있었다.
서재 못지않게 책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가구는 고급스러운 책상 하나와 엄청나게 큰 침대만이 놓여있었다.
"···의외로 단출하네?"
"정신 사나운 건 싫어해서. 필요한 거만 두는 편이야."
침대는 세 명이 다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대충들 누워. 어차피 자리는 많으니까."
오늘은 하루종일 기숙사로부터 짐을 옮기고 왔다 갔다 하느라 지쳤던 탓에 눕자마자 피로가 몰려왔다.
`와, 진짜 부드럽네.`
기숙사에 놓인 침대의 모포랑은 차원이 달랐다. 실크같은 촉감에 폭신폭신한 무언가가 몸을 딱 감싸주는 느낌이 환상적이었다.
평소 취침 시간이 칼 같이 정확하던 루나는 눕자마자 잠이 든 것 같고, 나도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다.
“···음.”
누군가가 이를 덜덜 떠는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내게서 등을 돌린 유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유리?”
내가 말을 걸자, 그녀가 몸을 움찔거리며 답했다.
“응!?”
“···안자고 뭐해?”
“아, 사야 너구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잔뜩 있는 채로 한숨을 내쉰 유리가 말했다.
“자려고 했어. 오전에 커피를 너무 마셨나 봐.”
“···그래? 알았어. 빨리 자자, 내일 또 피곤하겠다.”
그녀가 내게서 다시 뒤돌았고, 나는 다시 잠에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하지만 1분도 안 돼서, 그녀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사야.”
“···하암. 왜 그래?”
“···저기, 화장실··· 안 가고 싶어?”
“화장실? 아까 자기 전에 다녀와서 괜찮아.”
“그, 그래? 그럼 말고.”
그녀가 화장실을 다녀오려고 이러나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유리는 침대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점을 의아하게 느낀 내가 물었다.
“화장실 간다며?”
“···”
한참 동안 대답이 없던 유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가줘.”
“···네?”
***
유리는 나와 같이 복도로 나오고부터 부쩍 말수가 줄었다. 나와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무심하게 물었다.
"유리, 혹시 무섭···."
"아니야."
"그럼 왜···."
"···아무튼 그런 게 있어. 묻지 마."
유리는 더이상 묻지 말라는 듯 함축했다.
‘주변을 되게 신경 쓰면서 걷네.’
그녀가 완전히 주변을 경계하는 데 정신이 팔린 것 같아, 장난삼아 손가락 하나를 허리춤에 콕, 하고 찔러보았다.
“꺅···!”
유리는 내 손가락이 닿자마자 기겁을 하며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거의 서로의 볼이 닿을 정도로 붙은지라 심장 소리가 쿵쿵 들릴 정도로.
“···.”
“···.”
한참을 달라붙어 있는 채로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유리 쪽에서 나를 강하게 밀어내며 말했다.
“진짜 죽을 줄 알아. 한 번만 더 그러면.”
“살벌하셔라.”
그녀의 반응이 재밌기는 했지만 죽기는 싫으니 이번에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그나저나, 복도 한번 진짜 길단 말이지.’
쓸데없이 크고 긴 복도를 밝힐 불 하나 없이 걸으면 아무리 담력이 센 사람이라도 무서울 법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복도를 지나서 화장실 문 앞에 도착했고, 유리가 내게 말했다.
“···어디 가지 마. 문 앞에 딱 있어.”
“괜찮아. 어디 안 갈 거야.”
“진짜, 진짜로 어디 가면 안 된다.”
“알았다니까.”
내게 엄중히 경고하고 그녀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는가 싶었는데, 문을 닫으려다 말고 복도 쪽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귀는 막고.”
"주문이 너무 많은데요, 프리지아 아가씨."
"빨리."
내가 귀를 완전히 틀어막는 것을 보고 나서야 유리는 화장실 문을 닫았다.
‘···.’
귀를 막는다곤 막았으나 완전히 소리가 안 들리는 것은 아니라서, 약간 들리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1분쯤 지났을까, 유리가 안에서 다시 나왔다.
“···끝났어. 가자.”
그녀가 내게 말했지만 나는 뒤로 돈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야?”
유리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내가 유치한 대사를 치며 뒤로 확 돌아보았다.
“어디 사르카 여신의 몸에 손을 대느냐···!”
“···!”
그녀로부터 반사적인 헤드록이 걸려왔고 숨쉬기 힘들 정도로 꽉 조여왔다.
“···죽어. 멍청아.”
“항복···. 항복!”
내가 필사적으로 유리의 팔에 탭을 치자 그제야 그녀는 팔에 힘을 풀었다.
“쓸데없는 짓 말고 빨리 들어가 자자. 나 피곤해.”
“알았어, 알았다구. 이제 장난 안 칠게.”
나는 용건을 마친 유리와 함께 다시 침실로 향했다. 루나가 혼자서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침실로.
***
아까와 같은 포지션으로 누운 유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 이번엔 진짜 잘 거야. 너도 빨리 자.”
“···그래.”
말 안 해도, 이미 나는 반쯤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침대에 누워있으면 무척이나 마음이 안정되었다. 맡는 것만으로도 졸음이 쏟아지는 산뜻한 향 때문인지, 실크의 고급스러운 감촉 때문인지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잘 모르겠다. 아님, 둘 다일지도.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면 살아있을지를 걱정하며 눈을 감던 일상이었다. 특히 크리스와 북부 크리오 지방에서 연명하듯 지낼 때는 하루라도 춥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같은 일상들이 전부 꿈만 같다.
‘···?’
잠에 거의 빠져들었을 무렵, 무언가 따듯한 것이 손에 닿았다. 몽롱한 정신탓에 그게 정확히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굉장히 부드러운 느낌이 좋아서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손에 잡힌 무언가는 잠깐 힘이 들어가더니, 이내 가벼워진 느낌으로 내 손을 덮었다.
왠지, 기분좋은 꿈을 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