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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에 전생했다-85화 (85/102)

〈 85화 〉 달의 이면

* * *

이름있는 가문의 양녀이자 현재 령사 아카데미의 전투 교관을 전담하고 있는 루나 그레이스는, 아카데미의 학생들에게 있어 언제나 우상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매력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유의 밝은 모습에서 전파되는 긍정적인 에너지는 누구나가 인정할 정도였다.

실제로 그 매력에 반한 뭇 남성들로부터 몇 번인가 고백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루나 그레이스는 그럴 때마다 정중하게 그것을 거절했다.

오늘도 령사들의 훈련 지도를 끝낸 후, 루나는 몸을 가두던 갑옷을 벗었다. 그리고 땀을 씻어내기 위해 욕조에 몸을 담갔다.

하루 중 유일하게 그녀가 완벽하게 혼자가 되는 시간이었다. 떠들썩한 분위기는 이제 없고, 오로지 욕조 안에 자신만 혼자 남았다.

스스로가 참을 수 없는 괴리감이 몸을 찔러왔다. 그때마다, 루나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단순히 외로움 때문일까? 그렇기에는 그녀는 누구보다도 다양한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았다.

모두가 밝고 쾌활하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사실 누구보다도 많이 울었다. 혼자 남을 때면, 지칠 정도로 울어댔다.

언제나 밝은 모습만을 보이는 루나 그레이스의 이면이었다.

***

얼마 전 나는, 유리에게서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그러니까, 진짜로 네 저택에서 같이··· 살자고?"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진지한 표정으로 되묻자 유리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 사야. 벌써 1년째 기숙사 생활 중이잖아."

이제는 정식으로 령사가 되었지만, 지낼 곳이 없어 아직도 아카데미의 기숙사 방을 빌려 생활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오빠가 같이 지내는 것 말고는, 사람이 없어서 저택이 텅 비었어."

실제로 유리의 저택에는 안 쓰는 방이 더 많았다. 유리는 내 대답을 바로 들을 생각은 아니었는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천천히 생각하고 말해 줘. 너도 여러 가지 고려할 게 있는 모양이니까."

"···알았어. 결정하는 대로 알려 줄게."

이렇게 해서, 유리에게 동거를 권유받게 되었던 것이었다.

평소와 같은 주말 아침을 맞이한 나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가 구워지는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코를 자극했고, 거기에 자연스럽게 이끌려 냄새의 근원지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숙사 방에 딸린 작은 부엌에서 루나가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 중이었다. 뒤에 서 있던 내가 그녀에게 먼저 인사했다.

"좋은 아침, 루나."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네? 조금만 기다려. 음식 곧 다 될 거야, 사야."

"···아, 참. 그러고 보니 너한테 얘기할 게 있었는데."

"뭔데?"

분주하게 음식을 조리하던 루나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유리가 저택에서 같이 살자고 했어."

­쨍그랑.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나가 들고 있던 식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 언제부터···?"

"음···. 빠르면 당장에라도 된다고 하던데. 유리한테 대답하기 전에 먼저 네 생각도 좀 들어보고 싶어서, 루나."

"···."

말없이 다시 떨어뜨린 식기를 주워 든 루나는 평소보다 약간 차분한 톤으로 이야기했다.

"좋지 않아? 거기라면 여기보다 훨씬 넓고, 방도 많을 테고."

"그렇지? 음식도 가정부가 와서 해주고 가더라니깐. 깜짝 놀랐잖아, 진짜…"

"그래? ···."

말수가 부쩍 줄어든 루나가 접시에 음식을 옮겨 담으며 말했다.

"자, 밥 먹자."

오늘 메뉴는 식당에서 가져온 베이컨과 달걀을 이용한 모양이었다. 기름진 베이컨을 크게 한입 베어물은 나는 행복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말도 안 된다. 식당에서 먹을 때는 이런 맛이 전혀 안 났는데. 어떻게 한 거야?"

"그냥 조미료 좀 더 넣고. 이것저것."

"아···."

평소라면 신나서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대답했을 루나일 텐데, 오늘따라 반응이 딱딱했다. 나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맞다. 클레드가 술집에 새로 단 간판 봤어? 촌스러운데 다들 말은 못 하고, 웃겨 죽는 줄 알았잖아."

"응. 구리더라."

"···."

침묵의 밥상이 계속 이어지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내면에 있던 인비디아가 말을 걸어올 정도였다.

[ 사야,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게냐···? ]

'나도 몰라, 오늘따라 무서워 죽겠어.'

차라리 뭐 때문에 그러는지 시원하게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건만, 평소처럼 밝게 미소를 지으며 묵묵히 식사만 이어가는 루나는 공포 그 자체였다.

건조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고, 루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먼저 일어날게."

"어디 갈 데 있어···?"

"아니. 그냥, 좀 피곤해서 더 자려고."

묵묵히 식탁 정리를 마친 루나는 자신의 침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누워버렸다.

`···모처럼 쉬는데, 밖에 나가자고도 안 하네.`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잠시 혼자 있게 해야 할까도 생각했지만, 모처럼 여유롭게 같이 있는 시간을 그런 식으로 보내고 싶진 않았다.

"루나, 잠깐 실례할게."

이불을 뒤집어쓴 루나의 침대에 걸터앉아, 말을 걸었다.

"···아까 내가 한 얘기 때문에 그래? 저택 이야기라면 네가 싫다면야 당연히…"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뭐 때문에 그래?"

"···."

내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자, 결국 그녀는 슬그머니 자기 얼굴을 덮고 있던 이불을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약간 붉어져 있는 루나의 눈시울이 눈에 들어왔다.

"···울었어?"

"아니!"

루나가 고개를 흔들며 즉답했지만, 이내 코를 훌쩍이며 말을 고쳤다.

"···사실 맞아. 울었어."

"···뭐 때문에?"

"화났었어."

루나의 대답에 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나 때문이야···?"

"너한테 그런 게 아니야. ···스스로한테 화나서 그랬던 거야."

내 시선을 피해 바닥을 내려다보던 루나는 부끄럽다는 얼굴을 하며 말을 이었다.

"···사야, 살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곧잘 친해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잖아."

"···응."

"나는 그게 안 돼."

루나는 어느새 나에게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해왔다.

"넌 벌써 그렇게나 새로운 사람들에 적응하고 익숙해져 가는데, 난 아직 어릴 때로부터 하나도 벗어나질 못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루나 네가 왜···."

오히려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을 쭉 받아왔던 건 나인 줄 알았는데,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녀가 왜 그렇게 느꼈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전부 만들어진 거야."

"뭐···?"

"...늘 남들한테 맞추는 이 성격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전부 만들어진 거라고."

"···왜 그랬어?"

"그편이, 외롭지 않으니까. 사야."

조금씩 감정이 격해지던 루나는, 결국 속내를 쏟아부었다.

"더 이상 채워지질 않아. 너 이외에 그 누구하고도 대화를 해봐도, 어릴 때 느꼈던 감각이 채워지질 않아, 사야."

그 말에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어릴 적 그녀에게 애정을 쏟아붓고 홀연히 떠나버린 후로, 루나는 얼마나 외로움을 참아오고 있던 걸까.

"그간 수없이 사람들을 상대하고 부딪혀봤어. 설령 아무런 감흥이 없더라도, 어색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서 더 열심히 해왔어. 그런데, 그랬었는데…"

루나는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눈물이 고인 채로 말했다.

"아무런 감흥이 없어. 나만 세상에 겉도는 것처럼. 이래서는 마치, 내가…."

"루나."

내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그제서야 그녀가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동안에 내가 큰 오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스스로 잘 해내왔다고 생각한 루나는, 아직도 일부분이 보육원 때에 그대로 갇혀 있는 채였다.

이런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딱 한 마디 뿐이 없었다.

"···루나. 그때의 나는 이제 없어."

내 말에, 루나가 어릴 적의 표정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없다고…?"

"그래. 그리고, 그때의 너도 이제 여기 없어."

보육원 당시에 정신적으로는 이미 성인이었던 나와 달리, 그녀는 정말로 어린아이 그 자체였다.

어른보다 더 어른처럼 자신을 챙겨주었던 나를 자신도 모르게 의지하고 있었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그때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을 깨고 나와야 할 때였다.

"난 너한테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루나."

"···."

"네가 매일 스치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일 뿐이니까."

처음엔 충격을 먹은 듯한 표정의 그녀였지만, 점차 머릿속이 냉정하게 돌아오는 듯했다. 그리고는, 작게 내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래."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끝났다. 남은 것은, 그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푸하하···!"

"···?"

루나가 갑자기 웃어버리자, 약간 당황해버렸다. 그녀는 눈물을 손으로 닦으면서 내게 말했다.

"하아···. 우리 되게 바보 같은 소릴 진지하게 하고 있었던 거 알아?"

"···네가 그러면 내가 갑자기 부끄럽잖아···."

"미안, 미안···! 갑자기 너무 즐거워져서 그만···."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문득 그녀의 얼굴을 보니 그런 생각이 날아갔다. 복잡한 심경이 여러 가지 얽혀있는 아주 제대로 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웃음을 그친 루나는 개운해졌다는 듯 말했다.

"이제 괜찮아졌어. 사야."

"···다행이네."

그렇게 말하며 시계를 보니 슬슬 시장이 문을 열 시간이었다.

"괜찮아졌으면, 평소처럼 장 보러 나갈까?"

"좋아. 근데, 그전에···."

그녀가 코를 훌쩍이며 나를 바라봤다.

"좀 더 울어도 될까?"

"···응. 시원해질 때까지 마음껏 울어."

루나는 나와 가까이 붙은 뒤,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과거를 놓아준 그녀이지만, 그래서인지 오히려 어릴 적의 모습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어리광 부리는 걸 그렇게나 좋아하던, 천진난만한 소녀 루나로.

그녀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내가 말했다.

"맞다, 아까 했던 유리의 저택 이야기 말인데…"

“아, 그거···.”

“유리한테는 내가 말해둘게. 루나는 아무래도 저택에 가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거 같다고.”

“···그래, 고마··· 어?”

내 말을 듣고 고맙다고 말하려던 루나가, 눈썹을 꿈틀대며 다시 물었다.

“사야. 혹시 그 권유에, 나도 포함돼 있었던···거?”

“어? 응. 유리가 이왕이면 북적한 게 좋다고 하더라고.”

“···.”

아무 말 없이 아래를 바라보던 루나는, 잔뜩 심술 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걸 처음부터 말하란 말이야, 사야···!”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루나에게 무진장 혼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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