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굶주린 기억
* * *
식탐의 굴라. 아르모니아 제국의 사람들 중,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자는 드물었다.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공포의 상징이었던 고대종 사르카가 분노의 이라였다면, 실질적인 피해를 가장 많이 끼친 고대종은 단연코 식탐의 굴라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이름 앞에 붙은 식탐이라는 이명답게, 만물을 소화할 수 있는 위장을 가진 굴라는 몇십 년 주기로 깨어나는 것을 반복하며 마을 하나에 커다란 재앙을 가져다주고 배를 채우면 다시 잠에 빠져들기를 반복했다.
그 해, 그가 루덴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깨어났기에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마을에는 몇몇 마을 사람과 파견된 령사들만이 남아 필사적으로 지켰으나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든 어른이든 오스테온의 성분을 가진 인간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킨 굴라는 심지어 령사들이 발사한 주문까지 먹는 기염을 토했다.
EP. 68 굶주린 기억
령사들까지도 반쯤 포기하고 있었을 때 즈음, 중간에 합류한 령사 하나에 의해 판도가 바뀌었다. 자신의 칼 한 자루와 수십 개의 촉매만을 가져온 비올레는, 아직 살아있는 령사에게 다가가 물었다.
"세말에서 지원을 왔습니다. 피해 상황은 어떻습니까?"
머리에 피를 잔뜩 흘린 그 령사 남성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세말에서 파견된 건 자네 혼자인가..?"
잠시 전선에서 물러나 있던 령사는, 깡마른 체형의 하얀 장발을 지닌 사내를 보고 혀를 찼다. 지원자가 그이 한 명 밖에 없었다는 것은, 사실상 세말 본부에서도 굴라 토벌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는 이야기였다.
"이미 틀렸네. 령사가 절반이 넘게 죽어 나갔어. 저런 괴물을 상대하는 건 미친 짓일세. 자네도 괜한 목숨 낭비 말고 돌아가게."
그가 조언했지만, 비올레는 망설이지 않고 칼을 뽑아 굴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봐..!”
“비켜주십시오.”
그는 선두에 서서,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주문을 전부 쏟아부었다. 일찍이 전투에 있어 무시무시한 재능을 보였던 그이지만 만물을 집어삼키는 괴물 앞에서 주문 따위는 아무리 퍼부은들 먹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주문이 듣지 않는가..’
마법이 먹혀들지 않음을 확인한 그는 주문을 외는 것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굴라를 향해 참격을 내질렀다. 그의 칼날이 닿은 자리가 선명하게 썰려나갔다. 굴라의 피부가 다른 고대종에 비해 단단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방어력이 필요 없을 정도의 무식한 회복력이 있었기에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살이 베이면 몇 초 안되어 말끔하게 회복시켰고, 자신의 영양분으로 소화할 것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기서 끝이라면 다행이었겠지만, 불행히도 굴라에게는 생각지 못했던 능력이 존재했다. 비올레의 연속 참격에 의해 서서히 회복이 더뎌지던 굴라는,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전방을 향해 소름 끼치는 고주파를 발산했다. 주변의 령사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귀를 틀어막더니 하나둘 팔을 내려놓고 차렷자세로 섰다.
‘세뇌의 종류인가..!’
암흑계 령사이기에 주문에 어느 정도 내성이 가능했던 비올레와는 달리, 다른 계열의 령사들은 직접 자신의 목을 그어 자결하는가 하면, 표적을 비올레로 전향하고 달려들기까지 했다. 그로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른 령사들을 베어낼 수 밖에 없었다. 굴라에게 세뇌능력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던 그였다. 하지만 방금 굴라가 시전한것은, 명백히 암흑계열 주문인 세뇌였다.
‘어찌 이런 잔혹한 마물이…’
싸움을 지속한 지 약 반나절이 지났을 땐 전장에 비올레만이 남지 않았고,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령사들의 몸뚱아리는 무기력하게 굴라의 회복수단으로 사용될 뿐이었다.
굴라와 비올레, 어느쪽에게 있어서도 일생 가장 힘든 전투였다. 둘의 싸움은, 무려 삼일 동안이나 지속됐다. 굴라에게 있어 거의 모든 공격을 흘려내는 비올레는, 세뇌에까지 면역이 있던 터라 굴라의 입장에서는 꽤나 까다로운 상대였다. 어느덧 그 많던 령사들의 시체는 전부 굴라의 뱃속으로 사라졌고, 전장에 남아있는 생물은 굴라와 비올레 둘 뿐이었다.
“그르르르…”
“기다려라..!”
굴라가 회복을 위해 도망치려고 하면, 비올레는 집요하게 달라붙어서 칼질을 한 끝에 그를 땅밖으로 끌어냈다. 둘 중 하나가 죽지 않는 이상, 싸움은 끝나지 않을 듯 싶었다.
굴라를 땅밖으로 끌어낸 비올레가, 누워있는 굴라를 향해 결정타를 먹이려던 순간이었다. 심장의 박동이 크게 울리고, 칼을 들고 달리려던 비올레는 직감했다.
‘...한계다.’
순식간에 회복하던 굴라의 재생능력이 한계에 다다를 정도로 몰아붙였던 그였으나, 종족의 한계가 결국 비올레의 발목을 붙잡았다. 비올레의 관절은 이미 움직이는게 기적일 정도로 혹사당했고, 삼일째 수분한번 제대로 섭취하지 않은 몸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의 공격에 바닥에 쓰러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굴라를 눈 앞에 두었지만, 비올레는 더 이상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꿇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회복을 마친 굴라가 자신을 영양분으로 삼으리란 것을 직감했다.
[ 강하군. ]
그러나,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노려보던 굴라가,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인간이라기엔 지나치게 이질적인 음성이 그의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지능을 가지고 있었나?”
수천 년을 깨어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굴라는 자신이 섭취한 것들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양의 지식을 몸에 축적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지식 또한 일반적인 생물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제외한 다른 개체에게 소통이란 행위를 시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네 몸에는 이미 진작에 한계가 찾아왔다. 그렇지? ]
“...”
굴라의 말대로, 그가 굴라를 토벌한다고 한들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기에 살아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이미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을 마친 굴라였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비올레를 먹지 않고 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비올레가, 자조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뭘 망설이지?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먹이인 인간이지 않느냐.”
굴라의 감겨있던 큼지막한 눈이 떠지며, 검은 눈동자에 비올레의 모습을 생생히 비추었다.
[ ...생각이 바뀌었다. 너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아까워. ]
굴라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눈을 마주치고는, 이렇게 말했다.
[ 네 몸을 원한다. 인간. ]
비올레는 그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그에게 되물었다.
“...몸을 원한다고?”
세상에 몇 안 되는 존재로서 파멸적인 힘을 지닌 채 태어난 굴라였지만, 가진 힘을 활용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 지난 수천 년간 세상이 몇 번이고 변하는 것을 지켜봐 왔다. 수많은 지식을 쌓고 강함을 길렀지만, 내가 깨어있을 수 있는 시간은 몇십 년 중 단 며칠뿐이었지.]
굴라가 느낀 것은, 이제 물질적인 허기가 아닌 시간에 대한 강한 갈증이었다. 지금보다 더 더 기나긴 삶을 살아 숨 쉰 채로, 이 세상을 영위하고 싶은 그였다.
[ 내겐 시간이 필요하고, 너는 힘을 원한다. 그렇지 않나? ]
‘꺼져라. 내 몸을 빌려 세상에 무슨 혼란을 가져올 줄 알고.’
비올레는 그의 제안을 가뿐히 거절했다. 굴라는 그런 그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침착한 음성으로 다시 되물었다.
[ …당연히, 네 몸에 있는 동안 인간 세상의 정세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오히려, 영원한 평화를 약속하지. 그 몸의 결정권은 너에게 넘기마. ]
비올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영원한 평화….?’
[ 나는 네 몸을 빌려 일생을 깨어있는 인간의 삶을 영유하고, 너는 인간들을 사르카로부터 지킨다. 지나치게 간단한 거래다. ]
‘.........’
비올레가 그의 제안을 고민한 이유는 하나, 그는 지독할 정도로 평화에 집착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 간의 사소한 갈등조차도 몸서리치며 혐오했던 그에게, 아르모니아 제국은 최악의 땅이었다.
제국 전역으로 퍼진 가난은 사람들 사이의 부정적인 감정을 널리 퍼뜨렸고, 거기에 더해 사르카라는 괴물들까지 인간들을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게 했다. 만일 자신에게 그 모든 것들을 멈출 힘이 있다면, 비올레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기필코 그것을 실천해 낼 인물이었다.
[ 내 힘이 궁금한가? ]
굴라는 자신의 힘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의 진정한 능력은, 포식한 생명체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붙은 이명처럼, 어떠한 힘을 얻더라도 생물이 소화 과정을 거치듯 굴라의 몸에서 언젠가 점차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이 온갖 방법으로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 그에게 어울리는 끔찍한 힘이자, 저주였다.
허기에 사로잡혀 동시대에 태어난 같은 고대종인 색욕의 럭셔리아까지 통째로 집어삼킨 그이기에, 굴라와 하나 된 비올레가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었다.
[ 오랜 세월, 너희 인간들을 비롯해 수많은 생명체들을 포식하며 힘을 비축시켰다. 네게 이런 힘이 있다면,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 쯤은 간단한 일이겠지. ]
굴라는 그의 눈을 통해 강렬한 갈증을 보았다. 그것은 평화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갈증이었다. 그렇기에, 굴라는 그 점을 더욱 파고들었다.
굴라기 비올레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와, 그의 생각을 물었다.
[ 제안을 받아들이겠느냐? ]
그는 굴라가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에 들어 한 생물이자, 첫 번째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영생을 포기하면서까지 인간의 삶을 원한다는 굴라의 말에, 비올레는 어딘가 강하게 이끌렸다. 여느 때보다 말끔한 정신으로 그는 답했다.
‘...받아들이겠다.’
인류 역사상 인간과 사르카 간의 최초의 소통이자, 두 종족간의 거래였다.
[ 거래 성립이군. ]
다음 순간 굴라는 그를 통째로 집어삼켰고,
둘은 곧 하나 된 존재로서 다시 태어났다.
굴라를 흡수한 그의 앞길은 모든 게 순조로웠다.
고대종을 단신으로 토벌한 공로를 인정받은 비올레는, 단숨에 령사단장의 자리에 올랐다. 물론 굴라는 그의 몸속에서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알 리는 없었다. 모든 것들이 만족스럽게 돌아가던 그때, 문제가 발생했다.
“우욱…!”
연설을 마친 비올레가, 방에 뛰어 들어가 문을 닫고 대량의 피를 토해냈다. 단순히 몸이 적응하는 단계라고 생각했으나, 이상한 징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서서히 손끝이 검게 물들더니, 언젠가부터는 장갑을 끼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넓게 번져있었다.
‘굴라…!’
그가 신경질적으로 굴라를 부르자, 그가 답해왔다.
[ 왜 그러지, 인간? ]
‘ 몸에 무슨 짓을 한 거냐!’’
나날이 달라져 가는 그의 신체 부위는, 점점 사르카를 닮아가고 있었다.
[ 왜 내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군. 겨우 인간의 몸으로 그만한 힘을 누리면서 몸이 멀쩡하게 유지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가? ]
굴라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지으며 그를 비웃었다. 그리고, 그에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 정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싶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지.]
그가 말한 방법이란 바로, 다른 인간으로부터 영혼석을 수급하여 섭취하는 것이었다. 영혼석이란 인간이나 오스테온이 죽고 난 뒤에 나오는 물질이었기에, 정상적으로 수급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네 놈.. 처음부터 그럴 작정으로..’
치를 떠는 비올레를 향해, 굴라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 이제 와서 왜 그러는 거지? 이 정도 각오는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만. ]
‘평화적인 방법이 있을 거다..’
처음에 그는 그저 전장에서 사망한 령사들로부터 나온 영혼석을 섭취하는 것으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몸은 더 많은 양의 영혼석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젠장, 어째서냐..’
이제는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닌 영혼석이 아닌 이상, 효과가 극히 미미했다. 영혼석을 제때 수급하지 못하다 보니 어느새 비올레의 팔 한쪽은 완전히 검게 물들어갔다.
[ 네가 적응한다면, 사르카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걸. ]
절망적인 기분에 빠진 비올레를 향해, 굴라는 또다시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그를 희롱했다.
‘영혼석… 더 많은 영혼석이 필요해..’
비올레는 생각했다. 가장 활기를 띠며, 건강한 영혼을 가진 령사들이 넘쳐나는 장소를.
‘아카데미..!’
아직 실력이 채 갈고닦아지지 않은 령사들이 모여있는 곳이였다. 그곳에서라면, 령사 하나가 임무 중에 사라지는 일이 있더라도 미숙한 실력으로 인한 사고 따위로 처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설령 자신이 직접 해치지 않더라도, 위험한 임무 중에 죽어준다면야 유해를 수습하며 영혼석만을 거두어들이면 될 일이었다.
‘비겁한 짓이 아니야... 단지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 그들이 조금 희생할 뿐..’
이 무렵을 기점으로, 비올레의 성격은 점차 비틀어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훌륭한 직책과 업적을 내세워 손쉽게 아카데미의 총장 자리를 차지했고, 령사들을 일부러 위험한 임무에 보내며 사망한 령사들로부터 몸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혼석을 수급해나갔다.
그런 식으로 위기를 잘 넘기는가 싶었지만, 식탐의 저주라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은 영혼석을 받아들인 그의 몸은 이제 대량의 영혼석을 쏟아부어도 돌아오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대체 왜지..?’
이미 다음 달 분의 영혼석까지 전부 집어삼킨 그였지만, 검게 물들어가는 손끝의 조직은 퍼져나가는 속도만 줄어들었을 뿐 전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깨달았다.
‘보다 강력하고, 짙은 영혼…’
비올레 자신과 비슷한 급의, 아주 강한 영혼을 지닌 령사의 영혼석이 필요했다. 영혼석의 질이 훌륭하다는 것은 해당 령사가 그만한 잠재력을 가졌다는 증거 그 자체였다. 따라서 그것을 취할 수만 있다면, 그의 몸을 유지하는데 분명 엄청난 효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마침 그 해의 발현식에, 유리 프리지아가 참석하게 되었다. 발현식부터 전에 없을 기록을 세운 그녀의 영혼석이 최상품이라는 것은,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 총장직을 달고서 자기 학생을 죽인다고? 내가 보아도 끔찍한 취미군. ]
굴라가 비웃음을 띄며 뭐라고 하든, 비올레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유리 프리지아를 죽이고, 다신 없을 최상급의 영혼석을 취하는 것으로만 그의 머릿속이 가득 찼다.
‘가만, 굳이 내 손으로 해결할 필요가 없지.’
자신이 직접 목숨을 빼앗는 것은 상당한 위험 부담이 따랐고, 무엇보다 그녀를 죽이는데 구태여 그의 힘까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머리맡에 둘 수 있으면서, 언제든 유리에게 접근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그의 생각이 미친 곳은, 자신이 입양한 수도원의 아이들이었다.
수도원장의 뒤로, 곱슬기가 서린 갈색 단발머리의 소녀가 다소곳하게 서 있었다. 그녀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비올레는, 원장을 향해 물었다.
“그녀인가요. 령사가 되고 싶다고 했던 아이가?”
비올레의 물음에, 수도원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이 아이의 억지일 뿐인데, 입학부터 수료까지 전부 지원해주신다고 하시니….”
카르네는 서류상으로 비올레의 양녀였지만, 그를 사석에서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까이 와 보거라.”
그녀를 가까이 부른 비올레는, 카르네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지금부터 네 성은 에커만이란다. 수도원에서 지냈다는 사실도, 너를 돌봐준 자들도 모두 잊는 게 좋아.”
사실상 존재하지 않을 에커만 가문의 양녀, 카르네 에커만으로 살 게 된 그녀는 비올레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완벽한 인물이었다.
언제든 그녀가 잠들어 있을 때 침대맡에 접근해 유리 프리지아를 노리라는 구체적인 세뇌를 걸 수 있었고, 그의 당부대로 카르네는 멋지게 유리의 팀에 녹아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유리를 죽이게 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예정대로였다면, 유리의 영혼석이 단련을 통해 가장 무르익을 시점인 인비디아 부화 직전에 카르네는 그녀를 죽여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관찰하면서 그의 생각은 점차 변해갔다.
정확히는, 유리를 보는 ‘그들’의 생각이 변화했다.
무도회 직후, 비올레는이미 카르네에게 풀렸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카르네를 유리를 죽이는 데에 이용하려 들지 않았다.
[ 계획이 바뀌었다. ]
이제는 그의 정신에 거의 완벽하게 녹아들어 융합된 굴라가, 다른 생각을 품었기 때문이다.
[ ‘우리’의 몸을 이사하는 거야. 더욱 강력한 숙주로. ]
이미 비올레의 몸은 텅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유리의 영혼석을 무리하게 얻어내 봐야, 썩어가는 몸을 잠시나마 더 연명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미 굴라와 비올레의 정신체가 적절하게 혼합된 그 생물은 생각했다.
지금보다 좋은 몸으로 옮겨가며, 영원한 삶을 영위하자고.
클레드는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꼼짝없이 자리에 굳은 채,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하고 그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을 뿐이었다.
“...후. 누군가에게 털어내고 나니 속이 참 시원하군. 그러고 보니, 당시에 자네도 굴라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었지?”
비올레가 몸을 일으켜, 클레드의 안구를 핥았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클레드에게, 끔찍한 감각이 여과 없이 전해졌다.
“자네 영혼은 쓰레기 그 자체라네. 옆에 둘 가치도 없는 쓰레기지. 하지만 지금 자네를 제거하는 건, 아카데미 측에서도 여러모로 잡음이 많이 들려올 것 같군.”
개운해진 표정으로 활짝 미소를 지은 비올레는, 상기된 얼굴에서 입꼬리만을 들어 올렸다.
“이사가 끝날 때까지만, 지하에서 조용히 지내주게나. 가볍게 한 달 정도 지내다 보면, 그곳도 꽤 괜찮은 곳이란 걸 알게 될게야.”
술에 취한 클레드가 분별력을 잃고 면전에서 자신을 모욕했다는 꽤나 억지스런 이유를 대며, 그를 감옥에 잠시 수감할 생각이었다. 비올레는 검게 침식된 안구를 드리우며 말했다.
“기대하고 있게나. 새로이 태어난 ‘우리’가 자네를 맞이하러 갈테니.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