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2)
* * *
병사를 따라 폐허가 된 유적지에 도착한 유리는 흥미로운 듯이 주변을 탐색했다. 그녀를 안내한 병사는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며 주변을 살폈다.
"이곳인가요? 그 괴물이 자주 출몰한다는 장소가?"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령사님,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아, 잡아둬서 미안해요."
유리가 감사를 건네자마자, 그는 잽싸게 이곳을 빠져나갔다.
유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인간과 사르카의 중간 형태를 띠고 있다는 괴물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사르카는 본래 인간에게 적대적인 성향을 보이는 생물체였다. 덕분에 사람들로부터 공포를 일으켜, 수많은 거짓 소문과 엉터리 신화 같은 것을 남기었다.
그림에 묘사되었던 그것의 생김새는 어딜 보나 사르카와 인간의 중간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 생물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 따라서 유리는 이번 일도, 야간에 사르카를 마주친 사람들의 공포심으로부터 와전된 소문 따위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뜬 소문을 잠재우는 것도 내 의무니까…'
그녀는 한 시간이 넘게 유적지를 정찰했으나, 사람들이 말하는 것 같은 수상한 생물체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돌아가자.'
그때였다.
툭.
정찰을 마치고 돌아가려던 유리는,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
그리고, 자신이 부정하던 존재와 마주했다.
누구 할 것 없이 경직되어 서로를 바라본 두 사람은,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서로를 마주친 그들은, 섣불리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았던 것이다. 사야를 향해 인비디아가 사념을 전해왔다.
[ 왜 경계하는 거지? 저건 네가 알던 인간이 아니더냐? ]
'...그렇긴 한데. 어딘가 위화감이..'
자신의 생김새가 많이 달라져 있다고는 하나, 유리가 사야 자신의 얼굴을 모를 리는 없었다. 평소 유리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오랜만에 마주친 사야를 보며 저런 표정을 짓고 있진 않을 것이다. 사야에게 비친 그녀의 표정에는, 명백한 적대심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파고스!"
수십 개의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사야를 향해 날아왔고, 그녀가 그것을 피해내자 타고 있던 나무가 볼품없이 깎여 앙상한 형상만을 남겼다. 둘 사이에 끼어 알 수 없는 심리전을 느낀 인비디아가, 사야에게 사념을 보냈다.
[ 뭐야, 이게 인간들의 반가움 표시인 것이냐..? ]
'그럴 리가.'
사야는 집요하게 날아드는 주문을 피하며,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시도했다. 양손으로 마법을 구사하던 유리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그녀를 향해 외치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기다려!"
사야가 사라진 후로도 마법에 부단한 시간을 할애했던 유리는, 이제는 약물의 도움 없이도 상시 고출력의 마법을 퍼부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오죽하면 령사들 사이에서 그녀의 참전 여부가 전투의 판도를 좌지우지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순식간에 유적지 일대가 빙판으로 뒤덮이고, 유리의 얼음은 지성을 지닌 생물체처럼 형태를 바꿔가며 사야를 뒤쫓았다. 마법만으로 자신이 쫓는 대상을 제압할 수 없음을 깨달은 유리는, 자신의 오스테온의 힘까지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기간타스!"
유리가 그의 이름을 외치자 사야의 앞에 검푸른 갑주를 두른 빙하의 골렘이 소환되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척 보아도,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기간타스의 모습보다 훨씬 달라져 있었다.
'미친, 저게 뭐야..?'
강해진 유리의 힘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전신에는 빙하를 가득 두른 오스테온은 두 배는 커진 몸집을 이용해 얼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대검을 사야를 향해 휘둘렀다. 검이 지나간 자리에 땅이 솟아오르며 강한 흔적을 남겨냈고, 그것을 피해내려던 사야를 땅에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인비디아, 날개..!'
사야의 등으로부터 검은 날개 조직이 형성되며 날아올랐고, 그를 놓칠세라 무서운 기세로 유리의 속박 마법이 솟아오르며 사야를 바짝 뒤쫓았다. 마법의 속도가 그녀를 훨씬 웃돌았기에, 솟아 나온 빙하 가시가 사야의 변형된 뒷다리를 관통했다.
[ 사야, 왼쪽 다리를 당했다. ]
'버려. 재생시키면 되니까.'
한쪽 다리가 속박된 것을 알아챈 그들은, 속박당한 부위를 망설임 없이 끊어냈다. 그리고는, 홀연히 그 자리를 벗어나 멀리 날아 사라져버렸다.
'스스로 다리를..?'
남겨진 다리 조직에 가까이 다가간 유리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사르카 중에서도 상위 종에서만 가능한 조직 재생이 저것에게도 가능하다는 의미처럼 보였다.
'..역시, 보통 개체는 아니야.'
가루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조직을 보며 서 있던 유리는, 오스테온을 거두고 자리를 떴다.
오랜만의 휴식을 부여받은 유리는, 모처럼이니 저택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법을 난사하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자신이 살던 저택의 문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그리고 그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이가 지긋한 그녀의 집사 알프레드가 문 옆에서 인사했다.
"네, 이번엔 정말로 오랜만이네요."
그녀가 후계자 교육을 받기 시작한 이후, 1년 반 동안에 저택에 발을 들인 횟수는 3회가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목욕물을 준비해뒀습니다. 원하시면 바로 들어가시지요."
미리 준비되 있던 욕조에 유리가 몸을 담구었다. 예전 같으면 물 위로 찰랑이며 띄어 올라왔을 긴 생머리가 없으니,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었다.
'...그건 대체 뭐였지?'
그녀는 자신이 놓친 이형의 생물체를 떠올렸다. 분명 사르카의 형체도 있었지만, 인간 여성의 얼굴을 지녔었다. 발각 즉시 제거하려고 마음먹었으나, 그것을 마주친 유리는 생각보다 인간의 모습이 강한 모습 탓에 망설이고 말았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 생물이 유리 자신의 마법에 대한 대처 방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같은 계열의 마법을 공유하는 빙령사들조차도, 유리의 마법을 피해내기란 쉽지 않았다. 워낙 자유분방한 빙결 마법을 피해내려면 충분히 그 기술들에 익숙해져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직선 방향으로 날아드는 빙결탄을 정확히 피해냈고, 수증기에 닿기만 해도 얼어붙는 것을 알고 있는지 한 차례도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비록 마지막에 기간타스의 힘을 빌려 한 방 먹이긴 했지만.
아마도 그것이 고도의 지능을 지녔거나 혹은 인간의 말을 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 그녀였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버렸다. 인간을 닮아있다곤 하나 결국 사르카다. 제국의 국민에게 위협을 주는 이상, 망설임 없이 제거하는 편이 옳다.
'....왠지, 어지럽네.'
그녀는 몰려오는 현기증에, 좋아하던 목욕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 채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것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느낌이 묘한 불쾌감을 가져다주었다. 대충 물기를 닦은 후, 옷을 걸치고 복도로 나왔다.
"좋은 시간 되셨습니까, 아가씨?"
"..네. 그럭저럭이요."
가만히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노인은, 유리에게 이상한 종이를 건네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쓴 편지처럼 제대로 인장도 박혀있는 물건이었다. 그것을 받아든 유리는 어리둥절하며 그에게 물었다.
"...이건 뭔가요?"
"유리 님이 부탁하셨던 물건입니다."
"네?"
자신이 부탁해놓고도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몇 개월 전에 아가씨가 제게 부탁하셨지 않습니까? 저택에 다시 왔을 때 이걸 돌려주라고 하시면서.."
"그, 그랬었죠. 제가."
그렇게 대답한 그녀였지만, 실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집사가 떠나고, 복도에 홀로 남겨진 그녀는 조심스레 종이를 펼쳐 그 내용을 확인했다.
'...!'
그것이 누구에 의해 쓰인 것인지를 깨달은 유리는, 경악하고 말았다.
클레드가 비올레의 행동에 의문을 품게 된 것도 벌써 1년이 넘었다. 그동안 그는 자신의 정보력을 총동원해서, 단장에 대한 뒷조사를 해왔다. 그러나 뒤를 캐면 캘수록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더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전혀 없단 말이지..'
한 달에 한번 그에게 대량의 영혼석을 가져다주는 지금이, 증거를 잡아낼 유일한 기회였다.
"..단장님, 클레드입니다. 영혼석을 가지고 왔습니다."
"....들어오게."
최근의 비올레는 부쩍 살이 빠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남들에 비해 짧은 삶을 영유하는 령사들이 다 그렇지만, 비올레의 나이도 어느덧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명까지 바쳐가며 전투를 지속해왔던 그이기에, 살날이 오래 남지 않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늘 고맙군. 클레드 자네와 제자인 유리 덕분에 안심하고 은퇴할 수 있겠어."
"..과찬이십니다."
그가 유리에게 단장직을 넘겨주고 나면, 앞으로 그를 마주칠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클레드에게 있어서는 정체를 밝혀낼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클레드는 단장실의 문을 닫는 척하며, 살짝 열린 틈으로 눈을 가져다 댔다.
'..대체, 저걸로 뭘 하는지 알아야겠어.'
늘 궁금했던 것을, 드디어 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만족스럽게 영혼석들을 하나하나 살피던 비올레는, 갑자기 입을 비정상적으로 크게 벌렸다.
'...!?'
클레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우악스럽게 벌어진 단장의 입으로부터, 꾸물거리는 무언가가 튀어나와 영혼석들을 모두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 굶은 짐승이 고기를 탐하듯 먹음직스럽게 그것들을 해치운 비올레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젖히고 미소지었다.
'저런 건, 이미 인간이 아니야..'
그의 끔찍한 모습을 목격한 클레드가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했을 때, 비올레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몸이 꼿꼿이 굳었다.
"남을 엿보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클레드."
'..!?'
클레드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꼭두각시 인형이 돼버린 것처럼 스스로 다시 단장실의 문을 열고 비올레의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비올레는 이제 정체를 감출 생각도 없는지, 인간의 눈에서 나오기가 불가능한 보랏빛 광채가 눈동자에 강하게 배어있었다.
"요 몇 개월간, 내 뒤를 열심히 캐고 다녔더군."
"...."
인형이 되어버린 것처럼 두 눈을 뜨고 움직이지 않는 그에게, 비올레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마침 잘 됐어. 실은, 새로운 몸으로 이사하기 전에 나도 이 얘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다고 생각했다네. 어차피 완전히 이사를 마친 후엔, 자네를 제거할 생각이니 꺼릴 것도 없겠지."
'..새로운 몸? 이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움직일 수 없게 된 클레드를 앞에 두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이어나간 비올레는,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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