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1)
* * *
유리가 비올레로부터 후계자 교육을 받기 시작한 지 어언 1년 반.
그녀는 언제나 남들보다 높은 곳을 바라봤다. 어느 분야의 수재가 등장하면 반드시 그를 뛰어넘어야 직성이 풀렸고, 검술 대련에서 지면 이길 때까지 다시 붙어서 완결 무도한 승리를 따냈다.
그러나 요즘 그녀의 삶에는, 흥미랄 것이 전혀 없었다.
아카데미 입학 이후 최대의 목표라고 할 수 있었던, 언젠가 자신을 이겨놓고는 홀연히 사라진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리는 그것을, 늦여름의 무더위로 인한 기억의 변덕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EP. 66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1)
유리의 짧게 자른 반묶음 머리가 단장실의 거울을 통해 비추고 있었다. 후계자 교육을 시작한 유리는, 어릴 적부터 길러오던 자신의 머리를 과감하게 잘라냈다. 자신이 왜 그런 심정이 들었는지는, 지금에 와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요즘 생각이 많은 것 같구나, 유리."
비올레가 평소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건넨 걱정에, 유리는 잡생각을 멈추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최근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나? 단장직을 이어받는 것이 부담이 된다던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단장님.'
유리에게 단장직을 이어받는 것 따위는 걱정거리가 되지 못했다. 지금의 그녀에게 나타난 문제는, 삶이 지나치게 무료하다는 것이었다.
비올레가 건강상의 악화를 이유로 전장에서 사실상 물러난 이후, 유리 프리지아에게는 이제 령사로써 뛰어넘을 목표로 삼을 만한 대상이 더 이상 남지 않았다.
오로지 강해지는 것을 삶의 지표로 살아왔던 그녀로서는, 뛰어넘을 목표의 부재가 세상의 종말 따위보다 더 큰 문제였다.
비올레는 그녀를 유심히 살피더니, 의외의 제안을 해왔다.
"유리. 혹시 다른 령사들을 가르쳐 볼 생각은 없나?"
그의 질문에, 유리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가르친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쉽게 말해서, 아카데미의 교관직을 맡아 달라는 거네. 물론 임시직으로서. 자네가 후계자 인수 과정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지난 19년 하고도 반년의 일생동안, 유리는 누군가에게 배움만 받아 보았을 뿐 자신이 다른 이를 가르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확히는, 그럴 이유를 찾지 못했다.
"현재 제국에서는 자네만큼의 실력자는 거의 없다시피 하지. 지닌 노하우를 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전수한다면, 제국 령사들의 수준도 더욱 올라가지 않겠어?"
유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학생들을 잘 가르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교육 지도라는 미지의 분야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교육이라….'
단순히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글과 언어로써 상대에게 전달하는 행위일 뿐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대에 따라 결과는 화학적 상호작용처럼 다양하게 도출되었다.
지금은 비록 제국에서 유리 자신을 상대할 령사가 없을지라도, 그녀가 지닌 마법적 지식을 전수하다 보면 언젠가 자신을 뛰어넘을 령사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묘한 두근거림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유리는, 비올레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알겠습니다. 후계자 교육을 겸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학생들을 지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네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네."
탁.
유리가 마지막 문장을 적고 분필을 내려놓은 후, 시계를 바라보았다.
"할당된 시간이 충분치 않아서,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교관님! 질문 있습니다!
그녀의 첫 수업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향해 수많은 학생의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발현식에서 4분대 기록을 끊었다는 게 사실인가요…?
인비디아와의 전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남자친구 있으십니까…!
질문이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강의실 내부가 소란스러웠기에, 유리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질문이 잘 들리지 않으니 차례대로 한 명씩…"
교관님. 마법의 발동 기제가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아내신 건가요…?
'발동 기제..?'
마구잡이로 섞여 들려오는 수많은 질문 중에서, 유리에게 유독 선명하게 들려온 한 가지의 질문이 있었다.
그 질문을 들은 유리는, 방금 발언한 학생을 콕 찝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 령사님. 다시 한번 말해볼래요?"
자신이 지목당할 것이라 예상치 못했던 학생은, 쏟아지는 시선에 말을 더듬으며 질문을 다시 되뇌었다.
"...어.. 마법이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아내신 건가요…?
"...."
그의 질문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었음에도, 유리는 쉽사리 답변하지 못했다.
'기억해 내자. 내가 어떻게 그걸 알아냈더라…?'
그녀는, 자신의 기억 밑바닥부터 샅샅이 뒤져내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대체 왜?'
그런 당연하고도 중요한 사실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녀에게 누군가가 그 지식을 전해주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녀에게는 마법이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는 그 원리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시약까지 만들었을 정도로 선명하던 기억이지만, 어째서인지 그자의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에게 그 지식을 알려 줬다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했을까?
무언가의 요인에 의한 한순간의 기억 착란이, 그녀에게 있어 이질적인 의문을 가지게 한 건 아니었을까.
"..죄송합니다. 바쁜 관계로 질문에 대한 답변들은 다음 강의 이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끝내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고, 질문을 쏟아내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강의실에서 빠져나왔다.
'...뭐지?'
그 질문을 들은 순간부터, 알 수 없는 불쾌감이 그녀를 괴롭혀왔다. 기억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억지로 멀어지는 그 느낌은, 마치 누군가 뇌를 꺼내 희롱하는 느낌까지 주었을 정도였다.
'...비올레 님에게 가야 해.'
그녀는 이런 느낌을 가질때마다, 언제나 비올레를 찾았다. 그를 만나 대화를 가지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불쾌한 감각이 눈 녹듯 사라졌다.
유리는 내심 그것을, 스스로가 비올레에게 깊은 존경심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비올레와 앞으로의 일들이나 고민에 대해 대화하다 보면, 불안한 감정은 사라지고 마음 한편에 온화함만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지루한 주말이었다. 책을 한 권 빌려온 카르네가, 한 페이지를 채 못 넘기고 다시 그것을 덮어두었다.
"쓰레기가 따로 없네."
그녀가 극심한 지루함을 느끼던 찰나, 주방으로부터 루나가 금발을 찰랑이며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푸딩이야?"
디저트라면 사족을 못 쓰는 카르네였기에, 이미 그녀의 머릿속은 그것을 입에 집어넣을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접시를 내려놓고 장갑을 벗어 던진 루나가,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먹어 봐. 신작이야."
바로 한 스푼을 떠 입에 베어 문 카르네는,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달콤하지만 어딘가 씁쓸한 맛이 강한, 결코 맛있다고는 할 수 없는 푸딩이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자세히 관찰하던 루나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실패구나? 그렇지?"
최대한 그녀를 위로할 수 있는 말을 해주기 위해, 카르네는 최대한 긍정적인 말을 생각해냈다.
"그럴 리가…! 거의 완벽해졌어. 몇 번만 더 해보면 그때 그 맛이 날거야…. 아마도."
최근 들어 루나의 요리에는 어딘가 나사가 빠졌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예전과는 달리 미묘한 맛의 차이가 있었다. 매일같이 거르지 않고 그녀의 디저트를 먹어왔기에 그 차이를 극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카르네는, 그 이유를 계속 궁금해했다.
"우리 둘 말고는 먹을 입이 없으니, 실험해볼 수가 있어야지. 원…."
카르네의 말을 들은 루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유리는 주는 대로 전부 맛있어하잖아. 그 애가 주는 의견은 참고가 안 돼서 곤란해. 그래도, 가끔 얼굴은 비추면 참 좋을 텐데."
"..."
유리는 두 사람과 달리, 후계자 교육을 시작한 뒤로는 빠르게 월반을 반복하며 이미 아카데미를 정식으로 졸업했다. 인수 기간 동안은 사적인 만남이 거의 불가능했기에 유리의 침대는 언제나 비어있는 채 가지런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그런 그녀의 침대 옆으로, 또 하나의 비어있는 침대가 카르네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 자리의 주인을 잠시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른 바보는 맛 하나는 잘 봤는데. 거짓말해도 표정으로 다 드러나니까. 사야가 네가 태운 걸 먹고 지은 표정 기억나? 그거 진짜…."
거기까지 말하던 카르네는, 황급히 말을 멈추고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는, 난처한 표정으로 루나에게 사과했다.
"미안, 루나. 이름은 말하지 말아 달라고 네가 부탁했는데…"
루나에게는 사야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아픈 기억이었다. 깊은 상실감에 빠져있던 그녀가 선택한 것은, 사야라는 이름을 일상속에서 빨리 지워내려고 노력하는 것이었으니까.
"아니야. 먼저 떠올리게 한 건 나였으니까. 이젠 슬슬 익숙해졌어."
카르네는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유리가 이번에 마법 과목 임시 교관을 맡았다더라. 그런 소식은 우리한테 제일 먼저 말해줘야 하는 거 아냐? 섭섭하다, 섭섭해."
"그거 대단하네! 후계자 교육만으로도 바쁠 텐데."
순수하게 기쁜 표정을 짓는 루나와는 달리, 카르네의 표정에는 약간 그림자가 져 있었다.
"...있잖아, 루나.."
"왜 그래?“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던 카르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굳이 이런 소리 하면 기분만 잡칠 거야."
카르네의 말을 들은 루나가, 그녀를 추궁해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뭐 숨기는 거 있지?"
루나의 눈이 반짝거리며 자신을 추궁해오는 것을 느낀 카르네는,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루나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루나가 끈질기기 물고 늘어질 것을 알았기에, 순순히 말해주기로 했다.
"...얼마 전에 밖에서 유리를 마주쳤었어.”
카르네가 유리를 발견하고 기뻐하며 인사하자, 그녀 또한 반갑게 맞아주며 인사했다. 잠깐 못 나눴던 이야기를 나누던 카르네는, 이런 주제를 꺼냈다.
"예전처럼 네 명이서 같이 다닐 때가 그립네. 그때는 시끌벅적하니 재밌었는데."
돌아온 유리의 대답은, 어딘가 이상했다.
"...네 명? 무슨 소리야. 우리 팀은 원래부터 세 명이었잖아."
카르네는 그녀의 대답에 위화감을 느끼곤, 사야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물어보았다. 그러나 유리에게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다' 따위의 답변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카르네는 루나가 타 준 찻잔에서 홍차를 비워내고, 다시 탁자에 내려두고 말했다.
"....그녀는, 사야라는 인물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어."
비올레를 찾아간 유리는, 그에게서 잠시 휴식이 필요해 보인다며 외출을 권유받았다. 그의 조언대로 잠시 바깥 구경을 할 겸 오랜만에 아카데미 밖으로 나온 그녀의 앞에, 시끄러운 광경이 보였다.
'..병사들이잖아?'
제국 병사들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고, 유리가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죠?"
"누구야, 지금 바쁘…"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병사는, 경직되어 곧바로 경례 자세를 취했다.
"..아이고, 령사님 아니십니까…! 여기는 어쩐 일로…."
"인사치레는 됐어요. 최근 병사들이 활발히 돌아다니는 것 같아서, 그 이유를 좀 물을 수 있을까요?"
"아하, 그런 거라면야…."
그는 벽에 붙이려던 커다란 종이를 하나 펼쳐, 기이하게 생긴 그림을 보여주었다. 인간의 것처럼 보이는 얼굴과 몸통에, 사르카의 팔다리와 꼬리 같은 것이 달린 기이한 생물체의 그림이었다.
"이건…?"
"최근, 사르카가 많은 지역에 출몰한다는 괴생명체입니다. 주민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불안이 날로 커지고 있어서, 황실 측에서 경비를 늘려 보안을 한층 강화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다시 한번 그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사르카의 특징을 지닌 인간이라.'
이질적인 존재에 흥미가 돋은 그녀는, 병사에게 물었다.
"그 괴물이 자주 출몰한다는 장소가 어디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