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에 전생했다-44화 (44/102)

〈 44화 〉 궁수 바르나바 (3)

* * *

퍽 소리와 동시에, 계란이 시원하게 터져나갔다.

"하아.."

이걸로 못해도 계란 10판째는 해 먹었지 싶다.

계란 범벅이 되어있는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클레드는 생계란을 쭈욱 들이키며 말했다.

"식량창고 계란을 혼자 다 해먹을 생각인가 보구나."

"..계란은 새알에 비해 너무 무겁다구요. 싸우는 내내 흔들려서 집중도 안 되고..."

"네가 선택해서 한 훈련이다. 악으로 버텨라."

그에게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 왠지 머리가 어지럽다.

"그러고 보니, 그날 밤에 율리우스라는 자가 마셨던 액체의 성분을 밝혀냈다고 하더군."

"뭐였어요, 그건..?"

율리우스는 루나의 검에 의해 목이 베이기 직전, 이상한 병에 담긴 보라색 액체를 마셨다.

그 결과, 그의 몸은 사르카와 합쳐진 듯 흉측하게 변형되기 이르렀다.

"비올레 단장님께선 학생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지만, 너희에겐 말해주는 편이 좋겠지."

그는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내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고대종 사르카의 피라는구나."

"고대종의….!?"

일반적으로 사르카의 피 같은 구성요소는 이상 죽자마자 산화될 터인데, 지금의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다는 고대종의 피가 어떤 식으로 남아있었던 걸까.

'아니, 얼린다면..'

생각해보면 그날 율리우스가 사르카를 얼려서 피를 채취했고, 그것을 우리에게 뿌려 마법이 나오는 것을 일시적으로 막았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그런 많은 양을 보존하고 있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가 마셨던 액체는 얼어있기는 커녕 완전한 액체 그 자체였다.

고대종의 시체는, 죽어서도 산화되지 않는다는 건가..?

“사야, 집중해라.”

생각에 집중하고 있을 때, 클레드가 말을 걸어왔다.

“죄송해요.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는 나를 쓱 훑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이번엔 두 개나 지켰군. 성장이 꽤 빠르구나.”

“지금 칭찬하신 거예요?”

“자만하지 마. 지금 상태로도 숙련된 수인 전투원에게는 한참 못 미친다.”

‘듣기 좋은 말 한번을 해준 적이 없다니까.’

그러나, 결국 단련을 시켜주는 데에 있어서는 훌륭한 교관이다.

잠시나마 그가 전투 교관임을 의심했던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할 정도로.

“참고로 내가 네 나이 때는 수인 도적단원이랑도 싸워서 이겼지. 그 정도로는 해야 할 거다.”

“저도 그 정도 실력은 되지 않나요? 수인 도적단원? 아무튼.”

실수로 검은개 도적단이라고 말한 뻔 했다.

“그 소릴 들으면, 흑랑이 웃겠군.”

오늘의 훈련은 이걸로 끝이 났는지, 그가 주먹을 내렸다.

'..흑랑?'

“...흑랑이 누구예요?”

“음?”

“방금 그러셨잖아요. 흑랑이 웃겠다고.”

“예전 용병일 적의 동료다. 수인족 체술을 전수해 준 놈이지.”

'..흑랑, 흑랑이라.'

그 직관적인 이름과 수인이라는 점은, 어딘가 익숙한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있어요, 그 흑랑이라는 사람?”

“...그 놈? 용병 일을 같이 하다가, 도중에 뜬금없이 도적단을 만든다며 나갔었지. 그리고 몇 년 안 가서, 령사에게 죽었다고 들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그의 예전 동료였다는 자는, 검은개 도적단의 창시자였던 흑랑이란걸.

“...죄송해요, 괜한 걸 물었네요.”

“미안할 것 까지야. 각자 다른 길을 선택했을 뿐이야.”

루덴 출신의, 흑랑이란 이름을 가진 도적단 우두머리의 수인은 내가 아는 한 한 명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1대 대장의 기술을 간접적으로 전수받고 있었다는 거겠지.

클레드의 친구가 그였다니.

“이제 계란 들고 여기 올 일도 곧 없겠군. 아쉽구만, 매일 공짜 술이었는데.”

“..그게 아쉬운 거예요?”

“그래. 네가 좀 더 굼뜬 녀석이었다면, 한 달이고 1년이고 술을 얻어먹었을 텐데 말이다. 배우는 게 빨라. 그 시절의 나보다도.”

그의 손이, 내 머리에 올려졌다.

“...뭐 하는 거예요?”

“가끔은 다른 분위기의 옷도 좀 입고 그래라. 그래도 여자애 아니냐.”

“제 옷이 뭐가..”

“동네방네 도적단원 소속이라고 홍보하고 다닐 거냐? 녀석.”

“....!”

뭐야, 알고 있었어…?

"임무로 도적 소탕따위를 가면 꼭 사야 너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더군."

괜히 속고 있던 것 같아서,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다른 분위기의 옷이라.’

그러고 보니, 도적단 옷 두 벌만 계속해서 돌려입었을 뿐 다른 옷을 입으려고 시도했던 적이 없다.

매일 같은 옷만 입는 클레드가 그런 말을 할 정도면, 남들은 얼마나..

“뭐, 굳이 이 얘길 꺼낸 건 다른 건 없고.. 좀 있으면 열릴 무도회 말이다. 알고 있지?.”

“네. 알고 있는데.. 그건 왜요?”

“거기서 네가 해야 할 임무가 있다.”

클레드가 뜬금없이 무도회 얘기를 왜 꺼내나 했더니, 갑작스런 임무 이야기다.

“임무요? 저희 팀에서 지금 멀쩡한 사람은 저뿐인데 뭘 어떻게..”

“개인 임무야. 비올레 단장님께서 내게 무도회의 호위를 맡아주라더군. 그리고, 무기를 가지고 무도회장에 섞여 있을 학생들도.”

일반적으로 무도회 같은 행사에는 치안을 위해 무기를 지참하지 못하지만, 총장님의 재량으로 호위를 담당하는 학생들에게 그걸 예외로 해준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네가 그걸 좀 맡아주면 좋겠는데.”

“네..?”

“뭐, 옷은 적당히 아무거나 입고와도 좋다. 어차피 별로 신경 안 쓰지?”

“..알았어요.”

그런 소릴 들으니, 왠지 못마땅한 기분이 드는 건 왜지.

어쨌든, 그의 요청대로 무도회장에 무기를 지참하고 섞여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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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장의 귀퉁이에 위치한 사격장에서 크리스의 자세 교정을 받으며 활쏘기에 임했다.

활 시위를 당겼다 놓을때마다, 옆에 있는 그의 잿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으음.. 역시 적응이 안됀단 말이지."

평소에 사용하던 석궁을 내려두고, 얼마 전부터 그가 추천해 준 숏 보우를 연습해보고 있다.

위력은 석궁에 비해 한참 떨어지지만, 무게나 휴대성이 석궁에 비해 압도적이라 각각 장단점이 있는 편이었다.

“그래도 이제 곧잘 맞추시네요. 오랫동안 쇠뇌만 써 오셔서 그렇지.”

“저도 크리스처럼 쏘려면 몇 년 걸릴까요?”

크리스의 활 실력을 말하자면, 영화 속에서나 볼법한 화살 위에 화살 겹쳐쏘기를 현실에서 재현하는 정도의 실력자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작은 활부터 사람 키만한 장궁까지, 활이라는 못다루는게 없지 싶다.

“으음.. 사용하는 근육 자체를 바꾸고 단련하는 과정부터 시작해서, 거기에 성별같은 신체적 차이를 고려한다면..”

“됐어요, 그냥 장난으로 해본 말이에요..!”

“죄송해요. 또 멋대로 불타버렸네요.”

그가 진짜로 계산을 시작하기에 빠르게 중지시켰다.

역시 뭐 하나에 진심인 사람들은 달라도 다르구나.

“그나저나, 오늘은 분위기가 좀 다르시네요. 뭐라 할까, 좀 더 여성스럽다고 할까..”

“..그런가요?”

매일 같은 옷이라고 지적받아 길게 내려오는 평범한 흰색 원피스를 입어봤을 뿐인데, 움직이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발이 계속 걸려 넘어질 뻔 하는가 하면, 쉽게 오염되곤 한다.

“맞다. 크리스 씨는 황녀님에게 무도회에서 같이 추고 싶다고 말 했어요?”

“아뇨, 아직 무도회의 무짜도 못 꺼냈는걸요..”

“좀 더 자신감을 가지지 그래요? 무려 황녀의 호위를 맡고 있는 데다가, 얼굴도 반반하고.”

잘생겼다고 하면 잘생긴 편의 얼굴이라,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짜증 난다.

이 짜증이 확실한 보증 수표지, 암.

“..아무리 그래도, 저는 결국 평민일 뿐인걸요. 사야.”

“..크리스 씨, 평민이었어요?”

나이에 걸맞지 않는 화려한 경력덕분에 당연히 귀족이겠거니 했는데, 의외의 사실이었다.

“네. 그 때문에 아직도 제가 호위에 오른 걸 안좋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고요. 그런 제가, 감히 황녀님께 춤이라도 신청했다간..”

“..그게 뭐 어때서요? 분명 좋아하실 거에요.”

“..상냥하시네요, 사야 씨는.”

솔직히, 부러움에 차서 황녀님과 크리스의 춤을 지켜보는 귀족 놈들의 얼굴을 상상하는게 즐겁다.

분명 황녀님 눈에 들기 위해 힘깨나 들였을 텐데, 그걸 보면 얼마나 통쾌할까.

상심해있는 그를 위해, 자기소개를 조금 해줬다.

“평민인 게 뭐 어때서 그래요. 저는 고아에요. 성씨도 없는걸요. 부끄럽게도”

“...그게 다가 아닌걸요.”

“..네?”

그의 대답에 내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크리스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깐.. 사야 씨의 그런 점은 전혀 부끄러울 만한 게 아니라는 거죠?”

지금 누가 위로를 받는 건지.

“아무튼, 이런 저도 당당히 다니니까, 크리스 씨는 좀 더 자신감을 가져요.”

“..고마워요. 덕분에 좀 용기가 생기는 것 같네요.”

“그 용기가 좀 빨리 차올라야 할 거예요. 무도회가 당장 며칠 남지 않았으니.”

어느새 무도회도 당장 얼마 남지 않았고, 그 전에 그가 무사히 이사벨에게 제안을 하기를 빌 뿐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무도회의 테마, 가면이라고 했죠? 사야 씨는 어떤 가면으로 할지 정했어요?”

“네? 저도 온다는 걸 아셨어요?”

“..아니었나요?”

“아뇨, 가긴 갈 건데… 누가 물어본 적은 없어서요.”

나도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무도회에 참석하게 될 거라고 알지 못했으니, 그가 갑자기 물어오기에 당황해버렸다.

팀원들은 죄다 아파서 누워있고, 한 명은 절대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태인데.

나 혼자 그런 분위기를 즐기러 가는 것 같아서 조금 그렇다.

어찌 됐든, 이건 임무니까.

“..다행이네요. 사야 씨가 안 오시면 아는 얼굴이 없어서 심심할 뻔했는데.”

“어차피 거기서도 전, 혼자 겉돌고 있을 거예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즐기다 가세요.”

‘그나저나, 옷차림은 어쩌지..?’

게다가 무도회라 하면 당연히 드레스가 기본일 텐데, 이번에는 유리의 도움을 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다음 주에 무도회장에서 마지막이겠네요. 사야.”

다음 주면 이제 무도회고, 그에게 궁술 수업을 받는 것도 이제 끝이다.

“..솔직히, 제가 크리스 씨한테 도움이 된 건 줄은 모르겠네요. 궁술을 배우기만 했을 뿐이고.”

“아니요, 덕분에 마음이 정리됐는걸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꼭 원하는 바를 이루길 바래요. 크리스.”

“..고마워요. 결심이 섰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런 크리스의 손을 빤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뭐에요?”

내민 손은 감사의 표시일까.

나도 잠시나마 궁술 스승이 돼주었던 그에게, 감사의 의미를 담아 악수를 받아들였다.

“제 춤 상대가 되어주시겠어요, 사야?’

“...네?”

잘못 들은 것 같아, 한 번 더 되물었다.

“저기, 제가 잘 못 들어서 그런데..”

“제 춤 상대가 되어주실 수 있냐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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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넣을만한 삽화가 없어 여러분이 말씀해주신 계란 범벅 사야를 넣는 걸로 대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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