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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에 전생했다-42화 (42/102)

〈 42화 〉 궁수 바르나바 (1)

* * *

복잡한 머리도 진정시킬 겸, 클레드 교관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내 수인족 체술을 제대로 활용하는 법을 알려준다고 하기도 했고, 생각을 비우려면 훈련만 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술병을 들고 오라고 했었나.’

미성년자에게 술 심부름이라니.

뭐, 정신적인 나이로 치면, 클레드와 나는 거의 동년배겠지만.

평소와 같은 외출복으로 허름한 술집에 들렀다.

험악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공간인 탓에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다지 고와 보이진 않는다.

“..술 한 병 주세요. 제일 싼 거로 다가.”

인상 더러운 남자는 나를 한번 흘겨보더니, 무시하고 자신의 할 일을 계속했다.

“저기요, 제 말 안 들려요?”

“나 참, 날도 더워 죽겠는데 재수가 없으려니까…”

“..뭐요?”

그는 인상을 팍 쓰고, 내게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곳 가라고. 우리 가게는 검둥이는 사절이니까. 저거 안 보여?”

그가 가리킨 표지판을 보자, 사르카가 그려진 그림에 빨갛게 X자가 쳐져 있다.

검게 칠해진 사르카가 의미하는 것은, 아마 나와 같은 검은 머리를 지닌 사람이겠지.

‘세말같은 수도는 차별이 좀 덜하려니 했는데, 여전하구나.'

생각해보면 거리에서 마주치는 행상인들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그런지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진 않았지만, 나를 그다지 반기는 눈치는 아니였다.

'..내가 더러워서 나간다.'

괜히 문제를 일으키기도 싫었고, 그냥 다른 가게로 가려고 등을 돌렸다.

"오랜만이네요. 령사님."

어디서 들어본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후드를 벗고 드러난 얼굴로부터, 그녀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황녀님!?"

내 한마디에, 주변 사람들이 수다를 멈추고 일제히 이쪽을 바라봤다.

"쉿! 제가 여기 온 건 비밀이에요!"

"아, 죄송해요."

잠시 후 가게 내부가 다시 떠들썩해지자, 그녀가 술집 주인장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어색한 목소리 톤으로, 주문을 하기 위해 그를 불렀다.

"흠흠, 저기요?"

"옙!"

나를 대할 때와는 달리, 군기가 바짝 들어가 있다.

"제일 비싼 거로 한 병 내주시겠어요?"

제일 비싼 거라는 말에, 주인장의 눈이 휙 돌아간다.

"그런 거라면, 이 30년산 드로시아가 제일이지요!"

그녀의 요청에, 주인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술을 꺼내왔다.

황녀는 받은 술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유심히 그것을 살폈다.

"확실히 좋은 술이네요. 그런데.."

"..그런데?"

그녀는 손가락으로 표지판을 가리켰다.

"머리색에 대한 차별 분위기의 조장은, 5년 전부터 법으로 금지했을 텐데요."

주인장의 머리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당황했구만, 저 자식.’

"저, 저런 게 왜 아직까지 달려있는지 저도 알 길이 없네요. 당장 철거할 생각이었습니다! 하하하! 뭐하냐, 당장 없애지 않고!"

그는 종업원을 시켜, 그 자리에서 표지판을 내려버렸다.

"법을 준수하시는 그 모습, 보기 좋네요."

"그럼요, 사람이 법을 지키며 살아야죠"

법은 개뿔. 가게 위생이나 더 신경 써라.

"이만 갈까요, 령사님?"

왠지 기분이 들떠 보이는 그녀와 함께 술집을 나왔다.

"이사벨 황녀님이 이런 곳엔 어쩐 일이에요..?"

전혀 예상치 못한 그녀와의 만남에 깜짝 놀랐었다.

"주말에는 이런 복장으로 자주 시내를 돌아다녀요. 아바마마께선 저번 일로 외출하는 걸 걱정하시지만, 전 답답한 걸 영 못 참는 성격이라서요."

저번 일이라면, 율리우스에 의한 납치사건을 말하는 거겠지?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 율리우스의 최후에 대해 들려줘야 했다.

"..황녀님. 율리우스는.."

"들었어요. 괴물이 되어 죽었다죠."

"알고 계셨군요."

그만한 규모의 사건이었으니, 아카데미 측에서 황실에 사건을 전달한 모양이었다.

“그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이미 죽은 자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언급하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네요. 당신에겐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하는데, 입이 열 개라도 모자라요. 정말 고마워요.”

그녀도 내심 그의 사망 소식에 마음을 놓았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위험한 곳을 혼자 돌아다녀도 괜찮아요? 아무리 그래도 황실 분이신데.."

"혼자 왔다고 말한 적 없는걸요? 새로 고용한 호위가 아까부터 계속 사야 님의 머리를 겨누고 있답니다."

"네!?"

깜짝 놀라 주변을 살펴보아도, 나를 겨누고 있다고 생각될만한 자는 보이지 않았다.

"활을 거둬요. 크리스."

'어딜 보고 말씀하시는 거지..?"

그녀의 시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곳을 향해 있었다.

잠시 후, 나무 위에서 누군가 사뿐하게 내려왔다.

"실례했습니다, 령사님. 제 임무인지라 경계할 수밖에 없었네요."

내게 인사를 건넨 소년은, 회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앳된 얼굴을 지닌 기사였다.

정확히는, 검은색에 가까운 잿빛의 머리카락이다.

"세말 궁병대 소속, 크리스 바르나바입니다."

그가 내민 악수를 홀린듯 받아들였다.

"..전 사야에요."

남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성이 없다는 건 간접적으로 신분을 나타내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이름만을 말하는 건 몇 번을 해도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는다.

"당신이 사야 님이셨군요..! 황녀님께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제 얘길 하시던가요?"

"그럼요. 오죽하면 꿈에서도.."

"크리스. 거기까지 하죠?"

이사벨이 그의 옆구리를 치며

"넵, 황녀님!"

"하여간 대답은 잘한다니까.."

"두 사람, 꽤 친해 보이네요?"

기간으로 따지면 크리스가 새로운 호위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텐데, 마치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사이 같았다.

"그렇게 보였나요? 크리스와 저는 구면이거든요. 몇 년 동안 제 담당 궁술 교사였어요."

‘궁술 교사라고..?’

그의 나이는 기껏해야 내 또래 정도인데, 황실의 궁술 교사를 하고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황녀의 소개에 크리스는 멋쩍은 듯 얼굴을 긁었다.

“..사실 황녀님과 이야기할 기회는 없었지만요. 전에 계시던 호위 분이 워낙 엄격하던 분이셔서..”

“그 호위가 이제 당신인걸요, 크리스.”

“그러고보니 그렇네요. 하하..”

순진무구하게 웃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과연 내가 봐도 호위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어라, 쇠뇌를 사용하시네요. 령사님?”

쇠뇌? 석궁을 말하는 건가?

“아, 이거요?”

그가 내 석궁에 관심을 보이기에, 그에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이렇게 작은 걸 보는 건 처음이에요. 실용성 때문에 만드는 사람이 적을 텐데..”

크리스는 내 석궁을 살피더니,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데요. 최근에 줄이 좀 느슨하단 느낌을 받진 않았어요?”

“..그러고보니, 위력이 좀 떨어졌다는 느낌이..”

오랜 기간 제대로 된 관리 없이 방치하다 보니, 석궁의 상태가 어떻게 변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

“제게 맡기시면 고쳐서 돌려드릴게요.”

“네? 그래도 돼요?”

“그럼요. 황녀님 목숨의 은인이신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드려야죠.”

“맡겨도 될 거예요, 사야. 이런 쪽에 있어서는 그만한 전문가가 없거든요.”

이사벨 황녀님까지 그렇게 말씀하시니, 내가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지.

긍정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석궁을 넘겼다.

“믿어줘서 고마워요. 쇠뇌는 이번 주 중으로 제가 직접 찾아가서 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더 고맙죠.”

슬슬 둘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는 찰나에, 황녀가 나를 붙잡고 술병 하나를 건넸다.

“참, 이거 가져가셔야죠.”

“황녀님, 이건?”

“아까 술집에서 드리려고 산 거에요. 저번에 아바마마랑 밤새도록 드신 걸 보면, 사야도 어지간히 술을 좋아하나 봐요?”

‘30년산 드로시아..?’

그녀가 넘긴 술은 딱 봐도 가격이 어마어마할 것 같은 고급 술이였다.

“이런 걸 받아도 되요?”

“받아주세요. 그쪽에게 주려고 산 건데, 거절하시면 서운해요.”

"가, 감사합니다. 이사벨 황녀님."

싸구려 술 하나 사러 왔다가 무기 정비에, 값비싼 술까지 얻었다.

이렇게 다 받아도 되나 몰라.

“이만 돌아가 봐야겠네요. 만나서 좋았어요, 사야.”

“네, 저도요.”

두 사람에게 나도 인사를 건넸다.

그들과 헤어지려고 돌아서는데, 크리스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귀걸이 멋지네요. 령사님.”

“..?”

그는 그런 말을 남기고, 미소지으며 멀어졌다.

왜 갑자기 그걸?

영문을 모른 채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둘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햇빛이 쨍쨍 내리 찌는 오후, 나무 그늘에 걸터 자고있는 클레드에게 술을 들고 찾아갔다.

“수업료 가져왔어요, 클레드.”

“으음…. 음냐.”

코를 골며 자다가도, 술 소리에 바로 잠이 깨는 모습이다.

“어디, 뭘 가져왔나 한번 볼까.”

그는 내게서 술병을 뺏어 들고, 그 정체를 확인했다.

“......”

그리곤, 오랜 침묵에 빠졌다.

왜 그러지? 마음에 안 들었나?

“클레드..?”

“...감동했다.”

“네?”

클레드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를 껴안는다.

“뭐에요, 갑자기..!”

“너의 열정, 충분히 전달됐다. 사야!”

왜 갑자기 안고 난리야, 징그럽게..!

“..아니, 울어요?”

“30년산 드로시아 …! 내 일생, 이런 술을 먹는 날이 올 줄이야.”

더운데 끈적하게 달라붙어서 짜증난다.

“자, 수업을 시작해볼까?”

눈에 빛나는 광채와, 맑은 목소리를 지닌 클레드가 내게 말했다.

누구야, 당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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