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반쪽짜리 기사 (3)
* * *
“이번에 황실기사단에 새로 전임 오게 된, 루나 그레이스라고 합니다!”
지역 기사들 중에서도 특출난 성과를 보였던 나는, 기사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실기사단에 배정받았다.
그 시절의 나는 머리도 짧게 자르고, 표정에는 밝은 빛이 가득했다.
야심 차게 인사를 건넸지만, 누구 하나 내 인사를 받아주는 자는 없었다.
황실기사단, 기사들 중에서도 높은 곳만을 바라보는 자들의 집합소.
각자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하는 만큼, 그들에게 있어 나는 한낱 경쟁상대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아무도 나와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들에겐 안타깝지만, 나는 그렇게 고독함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식당에서, 그릇을 들고 기사들이 모여있는 자리에 앉았다.
“실례해요. 같이 먹어도 되죠?”
“....”
나보다 3년. 아니, 4년은 더 경력 있는 기사들이 모인 자리였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 할 것 없이, 정신 나간 짓을 하는 신입인 나를 바라봤다.
그들은 뭔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나에게 무어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화에 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옆에 앉아 밥을 먹을 뿐이니까.
그리고 다음 날도, 또 다음날도 옆에 앉아 밥을 먹었다.
계속 무시하다 보면, 그들은 내가 알아서 떨어져 나갈 거라 생각했는지 며칠째 별다른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 달을 채우기 전까지는.
“이봐, 신입!”
그들 중 한 사람이, 처음으로 나를 불렀다.
“네, 선배님!”
“너, 무슨 속셈이냐…?”
“속셈이라뇨?”
“왜 자꾸 달라붙냐 이거야. 우리들한테!”
“친해지고 싶어서요!”
금발 소녀에게서 나온 천진난만한 대사에, 다들 서로를 번갈아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제일 선배님들이시니까, 가장 강하실 거 아니에요?”
“...뭐, 그건 그렇지.”
그는 헛기침하며 내 말에 공감했다.
“이 멍청아. 척 봐도 아부 떠는 건데 그걸 좋다고 실실거리냐?”
한 여기사가, 옆에서 동료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나를 노려봤다.
“신입. 우리한테 달라붙으면 뭐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나 본데, 여긴 철저히 성과제거든? 친목 같은걸 해봐야 아무짝에도..”
“그냥 둬. 세실.”
“이게 주제넘게 기어오르잖아, 율리우스!”
여자를 말린 것은, 율리우스라는 이름을 지닌 사내였다.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건, 본인의 실력에 꽤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신입?”
그는 자신의 한쪽 장갑을 벗어, 내 쪽으로 던졌다.
“..!”
양손으로 그것을 받아든 나는, 곧 상황을 이해했다.
이것은 그가 나에게 보낸 결투 신청.
장갑을 받아든 순간, 나는 그것을 받아들인 셈이다.
주변에서 나를 보고 수군거렸다.
“율리우스가 결투를?”
“단단히 열 받았나 본데.”
율리우스는, 나를 보며 자애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자, 어떻게 할 테냐. 지금이라면 결투를 무르는 것도 이해해주마. 선배로서 말이다.”
손에 든 장갑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그는 강할 테지.
나 같은 것보다 훨씬.
“좋아요. 한 수 배우겠습니다. 선배.”
“...”
주변이 아주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내 뒷사람은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렸고, 미소를 머금던 율리우스의 표정에서는 장난기가 사라졌다.
“..진심이냐, 신입.”
“네. 그리고, 제 이름은..”
“...내일 아침 7시. 대련장으로 늦지 않게 와라.”
그는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식당을 나가버렸다.
“너, 단단히 미쳤구나. 너 쟤가 누군지 알고 덤비는 거야?”
“..네?”
“그 율리우스라고. 황녀의 호위 기사. 황실기사단 내에서 율리우스보다 검을 잘 쓰는 사람은 없을걸.”
“..그 정도인가요?”
“그래. 네 목숨이나 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음 날 아침 7시, 나는 약속대로 대련장에 도착했다.
검을 들고, 그와 마주 보고 섰다.
“먼저 피를 보는 쪽이 패배다. 물론, 살지 죽을지는 다른 문제지만.”
“네!”
내가 선택한 무기는 양손으로 쥐는 롱소드.
그 역시, 나와 동일한 무기를 선택했다.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사이에서, 결투는 시작되었다.
시작됨과 동시에, 그는 쏜살같은 속도로 달려와 횡 베기를 내질렀다.
“...!”
결투라고 하기도 민망할 수준의, 그저 막기만을 반복할 뿐인 싸움이었다.
“어제의 자신감은 어디로 갔지, 신입?”
반복되는 공세 끝에, 결국 내 칼이 그의 일격에 맞고 저 멀리 날아가 꽂혔다.
“졌습니다!”
그의 칼날이 내 몸에 닿기 직전, 나는 패배를 선언했다.
“..쯧.”
율리우스는 나를 벌레 보듯 쳐다보며,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역시, 강하네요. 선배.”
“너, 왜 마법을 쓰지 않았지?”
마치 자신을 향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게 화가 난다는 듯이, 그가 나를 쏘아붙였다.
“문장이 없어서, 사용하지 못하는걸요.”
“뭐? 문장도 없이 황실기사단까지 들어왔다는 소리냐?”
율리우스는 나를 보며 경멸했다.
“마법도 못쓰는 애송이였다니. 상대할 가치가 없었구나.”
“...”
그가 대련장을 떠나고, 나를 향한 다른 기사들의 웃음 섞인 조롱만이 남았다.
다음 날의 식당, 손에 반창고를 잔뜩 붙인 나는 다시금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실례합니다, 같이 먹어도 되죠?"
"......"
모두 식사를 멈춘 채, 나를 바라봤다.
"오늘은 카레네요? 저 이거 좋아하는데."
"무슨 생각으로 여길 다시 왔지?"
"왜 그래요. 결투에서 졌다고 같이 밥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은 없었잖아요?"
"....이년이..."
결국, 그에게서 또 장갑이 날아들었다.
"내일 아침 7시. 대련장이다."
이번엔 거부 의사도 묻지 않고, 식당을 나가버린다.
"졌습니다!"
그의 칼이 닿기 직전, 내가 외쳤다.
이번에 들고 온 것은, 롱소드가 아닌 한손검이었다.
저번 결투에서 롱소드의 무게 때문에 수비만을 겨우 했던 것을 경험 삼아, 가벼운 무기로 바꿔왔다.
"칼을 다시 들어! 결착을 지으란 말이다…!"
"선배가 이겼네요."
"이게…!"
나를 죽일 듯 달려드는 그를, 다른 동기들이 막아 세웠다.
"참아. 율리우스. 쟤 미친년인거 알고 있었잖아."
"......후우."
율리우스는 동기들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치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공격은 되는데, 이젠 방어가 문제네..'
그 뒤로 몇 주 동안, 나는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율리우스와 그의 동기들은 이제 슬슬 나에 대한 분노를 지워가는 듯 보였다.
"요즘 안 오네, 그 미친년?"
"율리우스에게 두 번이나 당했으니, 쪽팔릴 만도 하겠지."
그들의 기대가 무안하게도, 나는 또다시 그들 앞에 나타났다.
"실례합니다, 같이 먹어도 되죠?"
"또 왔다!"
"..."
율리우스의 결투 신청을 기대했지만, 그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음…. 율리우스 선배님은 밥맛이 없으신가 봐요."
내가 태연히 식사를 이어가자, 이번에는 동기 중 세실이라 불리던 여기사가 내게 장갑을 내던졌다.
"아무래도 버릇을 단단히 고쳐놔야겠구나, 신입."
"루나예요!"
"뭐가 됐든. 따라 나와!"
율리우스를 상대한 두 차례의 경험은 다른 기사들과의 결투에서 놀라울 정도의 우위를 범하게 해주었고, 이어지는 결투 신청에서 가뿐히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레이스, 나랑 하자!”
“이봐, 이번 주는 나랑 하기로 되어있어!”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루나 그레이스와의 결투는 기사단 내의 이벤트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런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을 정도의 치명상이 아닌 이상 말끔히 치료해내는 황실 수도사대의 힐링마법의 덕을 많이 보았다.
시간이 지나, 1년이 흐른 시점에서는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하압!”
틈을 노린 내 일격에, 상대의 무기가 허무하게 날아갔다.
“대단한데, 그레이스 양..!”
“선배의 마법도 훌륭했어요.”
그와 악수를 하고, 결투를 마쳤다.
적당한 길이의 사브르와 한 손 방패.
수많은 모의 전투 경험을 쌓이면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장비를 찾은 결과물이었다.
“머리가 짧을 땐 몰랐는데, 꽤 미인이네. 그레이스 양.”
“그런가요? 칭찬 고마워요!”
168승 11무 17패.
그간 치른 200여 번의 결투 중, 내가 세운 기록이었다.
아르모니아의 현존하는 기사로써는 최다 승리를 기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의미에서의 결투의 패왕 또한 존재했다.
무패의 율리우스.
그의 전적은, 패배도 없고 무승부도 없는 깔끔한 27승이었다.
기사에 오른 지 5년간, 그는 단 한번도 결투에서 패배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율리우스는, 다시 나와 칼을 겨루러 들지 않았다.
내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면, 언제나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그렇게 그와의 결투는 다시 성사되지 않을 것 같았던 그해 가을, 놀랄만한 소식이 들려왔다.
“황제께서 기사단 내에 있는 인물 중에, 황녀의 호위 기사를 맡는 자격을 준대.”
식사를 하던 중, 동료 기사에게서 들려온 소식이었다.
“포기해. 어차피 올해도 율리우스의 차지일 게 뻔하잖아.”
“이제 율리우스도 지쳐서 안 나올 수 있는 거 아니냐?”
“꿈도 크다.”
황녀 이사벨.
황궁에 열리는 연례행사 때 몇 번이고 얼굴을 비춘 적이 있었다.
행사 때 잠깐 얼굴을 비출 뿐인데도, 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미모였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혹시 모르는 거잖아. 눈 꼭 감고 한번 나가 봐?”
"아서라. 결혼도 못 하고 죽기 싫으면."
많은 기사들이 소문을 듣고 설렘과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무려 4년간, 황녀의 호위 자리는 율리우스의 자리였다.
1년마다 기사들끼리의 경쟁으로 최고의 기사만을 등용하는 자리인데, 율리우스는 마치 그의 자리가 당연한 것 마냥 승리를 거머쥐며 4년째 이어오고 있었다.
"그레이스 양도 참가해 보는 게 어때?"
"..제가요?"
"그래. 여기서 율리우스 말고는 다 한 번씩 너한테 져봤을걸?"
"이봐! 난 무승부였거든!"
황녀의 호위직.
출세를 원하는 기사로써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자리지만, 아쉽게도 나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아쉽지만, 저는…"
"속보! 이번에도 율리우스가 나온단다!"
평소 기사단 내에서 정보통을 맡던 남자가, 식당에 뛰어 들어왔다.
"망했네. 올해도 그냥 맡겨놓은 자리잖아, 이거."
다들 망연자실한 분위기가 되어가는데, 나만은 달랐다.
"율리우스가, 경기에 나온단 말이죠…?"
"잠깐, 그레이스 양. 나갈 생각은 아니지?"
"안 나갈 이유가 없죠."
동료들의 만류에도, 나는 꿋꿋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
1년 만에 그와 다시 칼을 맞댈 수 있다니.
결승에서 맞붙는 것만 아니라면, 설령 이기더라도 다음 경기에서 깔끔하게 패배하면 될 일이다.
현실이 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늘 적중한다.
짜인 대진표는 율리우스와 나를 결승에서 만나도록 만들었다.
그의 참가 소식에 나름 강하다고 자부했던 기사들이 자진해서 기권했고, 부전승으로 인해 몇 경기 치르지 않고 결승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관중석에서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넌 누구한테 걸었냐?”
“당연히 율리우스지. 루나 그레이스도 강하긴 한데.. 마법을 못 쓰잖아.”
“에이. 너 율리우스가 결투 중에 마법 쓰는 거 본 적 있냐? 상대가 마법을 못 쓰는 걸 자기도 알 텐데, 자존심 때문이라도 안 쓸걸.”
황실과 관중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결투가 시작되었다.
시작은 역시, 그의 특기인 넓은 횡 베기였다.
그러나 저번과는 달리 방패로 그의 공격을 튕겨내고, 내 쪽에서 공세를 이어갔다.
그는 쉽게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넓은 롱소드를 이용해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해내면서, 서로 주도권을 쥐락펴락 하며 싸워나갔다.
지난 두 경기 동안은 시도 때도 없이 도발을 일삼던 그가, 한마디도 없이 싸움에만 집중했다.
그것만으로, 그와 겨룰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싸움의 종지부를 알린 것은, 내가 방패를 희생해 그의 롱소드를 부러뜨린 직후였다.
부서진 롱소드의 칼날이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가며 피가 흘렀고, 내 칼은 율리우스의 목을 향해 곧바로 나아가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그는, 다른 손으로 화염의 구체를 만들어 내 칼을 향해 발사해 밀어냈다.
화염에 의한 폭발이 칼날을 튕겨내며 서로의 거리를 떨어뜨렸고, 나팔이 울리며 경기의 종료를 알렸다.
“그만!”
무기가 부러진 쪽은 그였으나, 먼저 피를 흘린 쪽은 나였다.
사람들은 훗날 이 경기에 대해서, 검술 승부라면 루나 그레이스의 승리. 마법을 포함시킨 대결이라면 율리우스의 승리라고 말했다.
결과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먼저 피를 흘린 나의 패배였지만.
“...강하네요. 율리우스 선배.”
“오늘의 결과를 잘 기억해라. 루나 그레이스.”
내가 먼저 그에게 악수를 청했고, 그는 내 손을 쥐며 말했다..
“태생적으로 불량품인 너는, 결국 나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훈훈하게 보였을지도 모를 광경이지만, 명백하게 수준 낮은 도발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경기는 패배했지만 황제의 눈에 들었고, 가장 먼저 령사 아카데미의 기사 중 하나로 발탁될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지금, 그날의 경기로 부터 1년이 지났다.
그때와의 분위기는 둘 다 사뭇 달라졌지만,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자가 그 율리우스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설마, 네가 이 령사년의 기사였을 줄이야..! 게다가 함께 자살하러 오다니, 어마어마한 충성심이구나!”
쏟아지는 빗속에서, 검을 쥔 채 그를 노려보았다.
사야는 그에게 입을 잡힌 채로, 나에게 무어라 말하려는 눈치였다.
“상관을 바라보는 눈빛치고는, 상당히 공격적이구나. 루나 그레이스.”
“상관? 예전이라면 그랬겠지. 지금은 아니야.”
“..뭐, 이대로 개죽음을 당하게 두어도 좋지만 옛정을 생각해서 칼을 맞댈 기회를 줘보도록 할까. 모두 물러서라!”
그는 허리춤에 쥔 칼집에서 거대한 롱소드를 빼 들었다.
“예전처럼 생각하고 싸우다간 크게 다칠 거다. 그레이스.”
“그거야 해보면 알겠지.”
율리우스의 롱소드를 타고 흐르는 불꽃이, 결투에 들어설 두 사람을 비추었다.
내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예전의 자존심 넘치던 율리우스가 아닌, 싸움에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살인귀였다.
* 6월 27일 이후로 후원해주신따따랏쥐님, 가르미르님, 아헤가오님, 혀누님, 아기맘마급식소님, 꽁치참치님, 자택경비원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려용! 새로운 후원 감사표를 만들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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