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에 전생했다-35화 (35/102)

〈 35화 〉 현혹의 마수 (4)

* * *

“네가 죽은 것처럼 속이자고?”

“그래.”

유리가 대답했다.

“내가 눈앞에서 죽어버리면, 달성할 목적이 이뤄진 거니 세뇌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 싶어.”

“어떻게 속이려고? 카르네가 눈치가 좋다는 건 너도 알잖아.”

미묘한 표정이나, 움직임만으로 감정을 읽어내는 여자다.

섣불리 속이려 들었다간 되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당연히 우리들만으로는 안돼. 도와줄 사람들이 좀 필요하겠지.”

그녀는 자신의 품으로부터, 짤랑거리는 돈주머니를 꺼내어 탁자에 올려두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있어. 이걸로 사용인을 구해서 현실적인 상황을 만들어주면, 카르네라도 속아 넘어가지 않을까.”

과연. 외부인들까지 개입시키면 좀 더 설득력이 오를 거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만들게?”

“내가 인질로 잡혀있으려고.”

“...그건, 문제가 좀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유리가 인질로 잡혀있을 만한 상황이 떠오르질 않는다.

외부 자극에 둔감한 편이라고는 하나, 괜히 천재 빙령사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손만 까딱하면 주변을 전부 얼려버릴 수 있는 여자인지라 그런 유리가 잡혀있다는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정신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너에게 그런 짓 안 할걸.”

“..지금까지 난, 어떤 이미지로 보이고 있던 거지?”

“..어, 얼음 여왕?”

“생각보단 나쁘지 않네.”

사실 서리 괴물이라는 이미지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반대로, 내가 잡혀있는 상황을 연출하는 건 어때?.”

“괜찮겠어? 사실감을 위해서 좀 거칠게 다룰 텐데.”

“..어느정도로?”

“피는 좀 나겠지만, 몸에 영구적인 지장은 없고 죽지는 않을 정도?”

자세하게 풀어서 말하니까, 괜히 상상돼서 더 겁난다.

“상관없어. 처음부터 내가 부추긴 거니, 그 정도야 뭐.”

솔직히 아직 백묘 대장의 것보다 아픈 주먹은 겪어보지 못했기에, 어느 정도는 감수할 자신은 있었다.

“그럼, 준비는 전부 나한테 맡기고 연기에 전념해 줘. 자, 해산하자.”

“...다른 건 없어?”

“없는데?”

“아니, 그.. 대략적인 상황이라던가..”

“그런걸 말해줘 버리면, 연기인게 티 날 거 아니야? 당신은 모른 채로 있어 주는 게 좋아.”

“...알았어.”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뭐 유리가 계획하는 일이니 믿을 수밖에.

­

‘...아직인가?’

모두 잠든 새벽, 기숙사의 침대에서 조용히 빗소리를 들으며 누워있었다.

유리와 카르네는 밤중에 어디로 간 건지,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던 작전을 이미 준비하고 있는 걸까?

방 안에는, 루나와 나 둘뿐이다.

정확한 시간을 말해주질 않아서, 무작정 기다리다가 지금까지 깨어있었다.

적어도 시간이라도 고지해주면 좋으려만.

천둥소리와 함께, 방이 반짝 빛났다.

슬슬 더워지려는지, 그야말로 폭우 같은 비와 함께 번개까지 동반됐다.

설마, 기상 악화로 예정이 취소됐나?

유리가 말을 안 해주니 신경 쓰여 미칠 노릇이었다.

그때, 방문에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밑으로 무언가 밀려들어 왔다.

“...?”

재빨리 문을 열어보지만, 복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편지를 주워들고, 그 내용을 확인했다.

[사야님께.]

단순한 글귀가 봉투에 쓰여있었고, 편지는 철저하게 삼중 포장으로 쌓여있다.

봉투를 겨우 뜯고, 그 내용을 확인했다.

사야님께.

당신을 만나 뵙기 위해 학생들을 납치했습니다.

저희의 초대에 응하시지 않거나 다른 령사를 불러온다면, 두 학생들의 목숨은 없습니다.

부디 기재된 장소로 혼자 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장소: 아카데미 구 훈련장 뒤편

엄청나게 정중한 어투에, 그렇지 못한 내용이 인상적인 편지다.

유리답다면 유리다운데, 장소선정이 흥미롭다.

구 훈련장이라면 아카데미로부터 꽤 거리가 있다.

산 윗등에 위치에 있기에 이제는 누가 찾아가지 않는 장소기도 했다.

‘하필 골라도 이런 날씨를..’

유리와 계약한 인원들도 스케줄이 있을 테니, 이런 날씨에도 감행한 건가.

직업정신 정말 투철하시구먼.

밖은 바람이 엄청나게 불기에, 어차피 우산을 들고 간들 홀딱 젖을 게 뻔했다.

후드만을 뒤집어쓰고, 방문을 조용히 열었다.

“사야?”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몸이 굳었다.

“어디 가?”

목소리의 주인은, 머리가 부스스한 루나였다.

“...루나, 안 잤어?”

“응. 왠지 잠이 안 와서..”

루나가 깨어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밤새 쾅쾅 내리친 천둥 때문이겠지.

“손에 그건 뭐야?”

루나가 내 손에 들린 종이에 관심을 보이자, 황급히 손을 뒤로 뺐다.

“아무것도, 아니야!”

“뭔데? 왜 그렇게 숨겨?”

큰일이다.

나를 보며 반짝이는 저 눈동자.

루나의 전용 스킬, ‘궁금한건 무조건 확인한다’ 가 발동됐다.

보육원 때부터 지니고 있던 고유한 스킬로, 한번 궁금한 게 생기면 해소될 때까지 어떤 수를 써서라도 해결하는 무서운 능력이다.

이럴 때는, 방법은 딱 하나다.

“...에잇!”

편지를 구겨 손에 들고, 그대로 도주했다.

“기다려..!”

재빨리 방문을 닫고, 복도를 전력 질주로 달린다.

한번 집착이 시작된 루나는 막을 수 없다.

달리는 속도는 루나 쪽이 월등히 빠르지만, 저런 옷차림으로 섣불리 쫓아올 순 없겠지.

복도를 중간쯤 왔을 때,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려­!”

“...어떻게!?”

갑옷을 모두 갖춰 입고, 머리까지 묶는 것을 끝낸 채로 무섭게 쫓아오고 있었다.

내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준비 속도다.

이게…. 군인?

“기다리랬지, 사야!"

어느새 그녀는 바짝 따라붙어서, 양손을 뻗고 달려온다.

편지의 내용을 들키면, 작전이 완전 꼬여버릴 거다.

'어쩌지…?'

복도의 창문들 중에, 살짝 열린 창문이 하나 보였다.

'저거다..!'

손에 힘을 실어, 창문 틈으로 뭉친 종이를 힘껏 던졌다.

"하압!"

날아간 종이는, 창문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기다란 무언가에 꽂혀, 복도 바닥에 낙하했다.

"투(?)검..!?"

사람의 반응속도를 넘어섰다.

내가 그걸 던지는 짧은 순간에, 칼을 빼 종이 뭉치에 관통시켰다.

무지막지한 무력 앞에서, 더이상 도주하기를 멈추고 멈춰 섰다.

"미안. 다치지 않았지?"

그녀는 그대로 내 옆을 지나쳐, 칼에 꽂힌 종이를 빼내 읽었다.

"...이거, 협박장인데..!?"

"루나, 그거 협박장이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런 델 혼자 가려고 했어?"

"여기 봐. 다른 령사를 데려오면, 두 학생의 목숨은 없다고 쓰여있어."

"괜찮아. 난 령사아 아니라, 기사잖아?"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은…"

"자, 가자. 학생들을 구해야지.”

막무가내로 내 등을 떠미는 루나이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밖으로 끌려 나왔다.

“..비가 너무할 정도로 쏟아지는걸.”

올해 들어 가장 많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씩씩하게 나아가던 루나는, 내려치는 천둥에 순식간에 내 어깨에 달라붙었다.

“..역시 천둥이 무서운 거 아니야, 루나?”

저번엔 열심히 부정했지만,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다.

“아니야, 추워서 그런 거야..!”

“..너무 티 나는 걸.”

참 희한한 일이었다.

보육원에서 같이 지낼 때까지만 하더라도, 번개를 무서워하기는 커녕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마다 번쩍번쩍하다며 밖에 나가고 싶어 했었던 루나였다.

결국 내가 말려서 진짜로 나가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번개를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했다.

나와 떨어져 있었던 10년간, 그녀에게 무슨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루나와 열심히 비바람을 뚫고 걷다 보니, 어느덧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루나, 잠깐 여기서 기다려. 먼저 둘러보고 올게.”

“조심해, 사야.”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루나와는 달리, 실상을 아는 나는 좀처럼 긴장이 되질 않았다.

“...저기요?”

유리가 미리 섭외해둔다던 인원들이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어째선지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시간을 잘못 안 건가..?’

그렇다기에는, 편지에는 시간 같은 것은 적혀있지 않았었다.

정말로 기상 악화로 취소라도 된 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야 님. 정말로 와주실 줄이야. 어지간히도 친구들을 아끼시는 모양입니다.”

“...네?”

풀숲 사이로,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들이 밧줄로 묶은 두 사람을 끌고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곧 내 눈을 의심했다.

묶여있던 것은, 유리와 카르네.

숨만 겨우 쉴 수 있을 정도로, 입까지 단단하게 묶여있었다.

‘아니, 철저하게 한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간 거 아니야..?’

게다가, 유리에게는 내가 인질이 된다고 분명 말했었는데..

“....으읍!”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내 입을 강하게 잡아챘다.

얼굴에 닿는 칼날의 차가운 감각이, 쉽사리 그것을 뿌리칠 수 없게 했다.

“오랜만이지, 안 그래?”

“...너는..!”

율리우스.

황녀의 전 호위 기사로써, 그가 황녀를 제물로 바칠 계획을 내가 저지했었다.

분명 율리우스 일당을 잡으려고 황제가 군대를 푼 걸로 아는데, 벌써 세말까지 들어와 있었을 줄이야.

“너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말이 없어서 며칠을 걸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군.”

“..유리를 어떻게 잡아둔 거지?”

유리라면, 손만 남아있어도 저들을 얼음으로 만들어버리는 건 식은 죽 먹이일 것이다.

그런데, 유리마저 포박상태가 되다니.

“유리? 저 빙령사를 말하는 건가?”

그는 시험관에 든 검은 용액을 꺼내, 내 눈앞에 가져다 댔다.

“사르카의 체액이다. 네가 우리 신도들에게 꽤 재밌는 속임수를 보여준 모양이야. 덕분에, 속임수를 밝혀내다가 꽤 좋은걸 알아냈지. 얼리면 체액까지 그대로 보존되더군. 시험 삼아 체액을 뽑아 마셔봤더니, 흥미롭게도 마법이 나가지 않지 뭐야.”

“그걸 마셨다고..?”

“시간이 지나니 효과가 옅어졌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체내에 들어가 있기만 하면 마법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었지. 학생들을 추궁해 이름을 밝혀낸 네 일행들의 눈에 뿌렸다. 그 뒤로는 뭐.. 너무 쉬웠지.”

“미친 새끼…”

설마하니 사르카의 체액을 몸에 집어넣는 사람이 있었다니.

사르카에 대한 집착을 넘어, 하나의 광기였다.

“칭찬은 고맙다. 어쨌든, 신도들도 네 속임수에 화가 잔뜩 나서 말이야.”

주변을 보니, 배신감에 휩싸인 신도들의 원망 어린 눈이 나를 향해있었다.

“그럼, 먼저 작업을 좀 해둘까.”

그는 쥐고 있던 시험관을 깨뜨려, 내 눈앞에 용액을 잔뜩 튀겼다.

“윽…!”

“확실하게 해두는 게 좋겠지. 뭐, 네 마법 따위가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이 들진 않지만 말이다.”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제국에서 널 가만 둘 거라고 생각해?”

“상관없어. 목격자는 남겨두지 않을테니ㄲ…”

갑작스레 그를 향해 날아온 돌멩이가, 그의 이마를 강타했다.

“...어느 놈이냐.”

빗속에서, 칼을 뽑아 든 채 눈을 빛내는 루나가 걸어왔다.

“그녀를 내려놔. 율리우스.”

루나의 얼굴을 확인한 율리우스가, 눈이 휘둥그레져 웃는다.

“루나..? 루나 그레이스..? 너가 어째서 여기에.”

그는 나와 루나를 번갈아 보더니,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설마, 네가 이 령사년의 기사였을 줄이야..! 게다가 함께 자살하러 오다니, 어마어마한 충성심이구나!”

그를 바라보는 루나의 눈에는, 살기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나를 흥분하게 했으니 오랜만에 겨룰 기회를 줘 볼까, 불량품?”

반쪽짜리 기사, 루나 그레이스.

세간이 그녀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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