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시동
* * *
그날 이후, 내가 속한 팀은 정말로 황제의 요청에 따라 S급으로 조정되었다.
이래도 되나 싶은 특혜지만,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소설과 전개가 비슷하게 흘러가길 바랐던 내 입장에서는 반기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이교도들에게서 황녀를 구했다는 사실은, 팀원들과 클레드 교관에게만 알렸다.
“역시 휴일은 좋네. 하루종일 빈둥거릴 수도 있고.”
얼굴을 긁적이며, 얌전히 루나의 빗질을 받고 있었다.
평소와 같이 머릴 빗겨주던 루나가, 내 어깨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거, 그때 생긴 상처야?"
"..응. 설마 칼을 날릴 줄은 몰랐거든."
매일같이 소독하고 있지만, 꽤 깊게 패인 자국은 흉터로 남을 게 분명했다.
"투검술이야. 율리우스 그자는, 투검술에 능했어."
"루나, 그 자식을 알고 있었어..?"
"얘는. 내가 황실기사단 출신인 거 잊었어? 율리우스와는 지겹도록 봤지."
루나는, 내 상처를 더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뭐, 널 다치게 했으니 이제는 찢어 죽여도 싼놈이지만."
'...'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냉소적인 미소였다.
"사야. 공주님도 봤겠네?"
"황녀님? 예쁘셨지. 성격도 좋고!"
"..즐거웠나보네. 응."
내 머리에 가해지는 빗질에, 왠지 힘이 들어간다.
"루나, 좀 센 것 같.."
"응?"
"아니, 아무것도."
오늘의 루나는 여러 가지로 무서워서, 얌전히 있기로 했다.
기분이 좀 별로 같아 보이는데, 나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벌로 주어진 청소를 할 겸 빗자루를 들고 아카데미 부지를 돌아다니다가, 열심히 수련에 열중인 유리 프리지아를 마주쳤다.
물구나무자세로 계속 서 있는 것을 보아, 수인족 체술의 수련에 한참인 듯 보였다.
나에게 대충 자세를 배운 것 뿐인데, 벌써 한 손으로 버틸 수 있을 만큼 숙련됐다.
농땡이를 피우며 그녀를 지켜보는데, 한 손으로 버티던 그녀의 손목이 뿌득 소리를 내며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다.
“...!?”
놀라서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그녀의 반응은 놀라웠다.
무릎을 털고 일어나 꺾인 손목을 보더니, 힐링 포션을 두어 병 마시고 다른 손으로 어긋난 뼈를 맞춰냈다.
‘아니, 아픔을 못 느끼는 건데. 저 정도면..?’
더 가관인 건, 방금 뼈를 맞춘 손목으로 또다시 물구나무를 선다.
결국 보다 못한 내가, 유리에게 다가가 말했다.
“너 미쳤어? 훈련 한번 하는데 포션을 몇 병이나 마셔댄 거야..?”
힐링 마법, 포션 등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런 간단한 도구 따위가 아니다.
인간이 가진 몸의 치유력을 가속시켜 빠르게 상처를 치료하는 방식이기에, 그 횟수가 늘어날수록 장기적으로 몸에 영향을 끼친다.
“괜찮아. 어차피 령사의 수명은 짧아. 단기간에 강해질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네가 죽으면, 나랑 이 세계가 안 괜찮다고. 이 여자야.
그녀의 발목을 잡고,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나에 의해 바닥에 누운 자세가 돼버린 그녀는, 평소와 같은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게 무슨 짓이지?”
가뜩이나 자신이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것도 모르는 채로, 몸에 단련이란 이름의 고문을 가하고 있으니 미칠 지경이다.
“길 한복판에서 손목이 꺾인채로 그러고 있으면, 다른 학생들이 놀라서 도망갈 걸. 프리지아.”
“..확실히, 그것도 그렇군. 장소 선정에 실수가 있었어.”
사실 장소 같은 건 됐으니까, 그 미친 훈련량만 좀 조절하라고, 아가씨야..
“사야, 당신이 알려준 마법 출력방식에 대해 개인적으로 더 연구해봤어. 감정에 따라 마법의 위력이나 출력이 비약적으로 달라지는 건 사실이야. 다만, 문제가 좀 있어.”
“..문제?”
“감정은 너무 모호한 에너지야. 한시 빨리 고위력의 마법을 시전해야하는 전장에서, 재빠르게 감정을 조절할 방법을 찾고 있어. 그래서 한가지 생각해본 게 있는데..”
그녀는, 주머니에서 작고 투명한 병을 하나 꺼냈다.
투명한 걸 보아 촉매는 아닌 것 같고, 별달리 짐작가는게 없다.
“뭐야, 그건?”
“시모스 원액. 흥분 유발제야.”
“...와.”
유리, 네가 기어코 약물에까지 손을 댔구나.
진정 성분이 있는 이레미아와는 반대로, 시모스는 흥분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는 약초다.
“아직 시험해보진 않았지만, 이 정도 양이면 한시간 정도는 상시 흥분상태에 들어갈거야. 흥분상태에서는 쉽게 분노할테고.”
유리가 넘긴 용액을 받아든 나는, 근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체 그렇게까지 해서 강해지려는 이유가 뭐야?”
내 질문에 그녀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주변의 누군가가 죽어나가는게 싫어. 누가 됐든간에.”
“...”
“그럼, 단련장소를 좀 바꿔보도록 할까. 이번엔 실내가 좋겠어.”
유리는 짧은 대화를 마치고, 본관을 향해 걸어갔다.
열심히 하는건 좋지만, 조금만 적당히 해줬으면.
본격적으로 S등급을 부여받은 이상, 이제부터는 쉴새없이 바쁘다.
다가올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인, ‘인비디아’ 토벌 임무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질투의 인비디아.
과거 령사단장 비올레가 토벌에 성공했다는 ‘허기의 굴라’ 이후, 다음 순서로 깨어나게 되는 고대종 사르카다.
오랜만에, 다시 한번 메인퀘스트를 두 눈으로 확인했다.
[ 메인퀘스트 : 결말을 바꾸시오 ]
달성도: 0%
처음 봤을 때와 다를 것 없는 퀘스트 내용이지만, 달성도라는 항목이 추가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내 17년간의 노력은, 결말 따위에는 티끌만큼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세계의 파멸은 확정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예정된 운명이라면, 굳이 발버둥 치면서 결말을 바꾸려고 들 필요가 있을까?
그냥 남은 시간을 즐기면서, 살아가보는건..
역시 싫다.
생각해보면 이 세계는, 지난 17년간 지독하게도 나를 괴롭게 했다.
지랄맞기만 했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고 겪다 보니 어느새 애착이라도 생긴 걸까.
_띠링_
“....?”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난 퀘스트는, 내 동공을 크게 흔들리게 했다.
[ 서브퀘스트: 카르네 에커만을 죽여라.]보상: 아르모니아 전기 제 3장 종장제한시간: 29일 59분 52초실패 패널티: 유리 프리지아의 죽음
적나라한 내용의 퀘스트 앞에서, 사고가 정지하고 말았다.
제거하라고..? 카르네 에커만을..?
거부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간 내에 목표 달성에 실패 시, 실패 패널티가 주어진다고 쓰여있다.
카르네를 죽이지 않으면, 유리는 죽는다.
카르네의 입을 통해서도 들었던 사실이잖아.
왜 이제와서 새삼스래 놀라고 있는 걸까.
침대에 곤히 잠든채 누워있는 카르네를 보았다.
루나와 유리가 없는 지금, 방에는 카르네와 나, 둘 뿐이다.
“...”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악역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순수한 얼굴로 새근새근 잠들어있다.
지금이라면, 아무도 모르게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루나에게 들키더라도, 그녀라면 감싸줄 거다.
..꿀꺽.
허리춤의 칼집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늘 하던 거다.
날을 목에 찔러넣고 돌리면 끝이다.
그녀는 명실상부 악역이다.
언제나 유리의 앞에서는 의중을 철저히 감추지만, 인비디아 토벌이 다가오면 그녀는 전갈의 독침을 드러낼 거다.
토벌전 직전, 카르네는 유리에게 포션으로 위장한 마비독을 마시게 하고, 움직일 수 없게 된 몸을 수차례 칼로 찔러 그녀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죽음으로 인한 그녀의 토벌전 불참은, 결국 화력 부족으로 이어져 불완전 상태의 인비디아를 세상에 풀어주는 원인이 되어버린다.
자유를 되찾은 인비디아는 마을 단위로 인간들을 흡수하며 완전히 힘을 되찾고, 아르모니아 제국 이례 최악의 사상자를 내며 급속하게 세계는 붕괴해나간다.
과거 굴라를 토벌한 령사단장 비올레조차도, 인간에게서 수천 명분의 령을 흡수한 인비디아에게는 손을 쓸 수 없었다.
카르네 에커만을 살려둔다면, 또 같은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조심스레 그녀의 목폴라를 내리고, 흰 피부를 드러냈다.
“....!”
그녀의 목덜미에는, 붉게 새겨진 세 자리의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왜...’
목에 새겨진 세 자리의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딱 하나뿐이다.
노예의 인장.
백묘 대장에게도, 그리고 수인 노인에게도 새겨져 있던 증표다.
그게 왜, 카르네의 목에 있는 걸까.
‘...’
칼을 거두고, 맞은편 침대에 쓰러지듯 앉았다.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소설을 집필할 때 그녀의 역할은, 소설을 비극으로 만들기 위한 사이코패스 악녀 따위에 불과했다.
마땅한 살인의 목적 같은 것도 제대로 쥐여주지 않은 채, 그녀의 행위들만 글로 나열했을 뿐.
'카르네가, 노예...?'
소설이 현실이 되며 개연성을 끼워 맞춘 세계는, 끔찍한 변수를 창조해냈다.
“..하암...”
어느새 잠을 깬 카르네가, 기지개를 펴며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나와 눈이 마주쳐, 눈썹을 찌푸리며 물어온다.
“뭘 그렇게 봐?”
“....”
그녀는, 내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내려간 목폴라 아래 자신의 목에 새겨진 이질적인 숫자들을, 그녀 또한 지긋이 바라보았다.
“...봤구나. 사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