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청약
* * *
어느덧 마차가 덜컹거리며 멈추고, 마부가 령사들을 깨웠다.
"도착했습니다. 령사님들도 용무가 있으시면 하플에 들렀다가 오시지요."
평소 잠이 별로 없는 금발 머리의 소녀가, 가장 먼저 눈을 떴다.
"..깜빡 잠들었네. 별일 없었지, 사야?"
그녀의 손이 있을 만한 위치를 더듬었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의아함을 품은 소녀는, 옆을 돌아본다.
"...사야?”
잠이 들기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던 검은 머리의 소녀는, 어딘가로 사라져 있었다.
이사벨 황녀와 나를 태운 말이, 성문 앞으로 들어섰다.
창을 든 문지기들이, 성문 앞에서 우리를 멈춰 세웠다.
“멈춰라. 성에는 무슨 용무지?”
이사벨 황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사야. 잠깐 내려주겠어요?”
황녀의 허리를 잡고, 말에서 살포시 내려주었다.
그녀는 후드를 벗고, 병사에게 다가간다.
“성문을 좀 열어주시겠어요? 폐하께 제가 왔다고 좀 전해주시면 감사하겠네요.”
“황녀님..!?”
그녀의 얼굴을 보고 곧바로 고개를 숙인 병사는, 위에 있는 병사에게 지시해 성문을 열었다.
성문이 열리고, 그녀가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안 오시고 뭐 하세요. 령사님.”
“저도 폐하를 뵙는 거였어요…?”
당황한 내 기색을 보고,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요. 용사님이 빠지면 되겠어요?”
“..용사라, 하하..”
용사라기보단, 개인적으로 도적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멋쩍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병사에게 넘기고 그녀를 뒤따랐다.
흘끔. 신기한 듯 나를 보는 병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넓다..’
입구부터, 아카데미와는 비교가 안 되는 규모의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저 같은 평민이, 왕성 안에 들어와도 되는 거예요?.”
“그런 소리 마세요. 폐하께서는 누구보다도 신분 앞에 평등하신 분이랍니다.”
아르모니아 제국의 황제.
일찍이 임명식 날에 그와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40대 초반 정도의 외모를 가진 그는, 나를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고도 말했었다.
그와의 재회가 설마 이런 식으로 다시 이루어지게 될 줄이야.
부지가 어찌나 넓은지 성의 본관까지 도착하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황녀를 맞이한 시녀들이, 그녀의 상처를 보고 꽤 충격을 먹은듯 보였다.
“이 앞이 알현실이에요. 폐하께서 이미 대략적인 정황은 이미 알고 계실 테니, 저희는 폐하를 맞을 준비를 하죠.”
옷에 묻은 핏자국과 얼룩을 대충 닦아 없애고, 그녀의 뒤를 따라 알현실에 들어섰다.
“황녀 이사벨, 외출에서 일찍 돌아왔습니다.”
그녀가 황제에게 공손히 인사하기에, 옆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내렸다.
“됐다. 둘 다 일어나거라. 이사벨, 다친 데는 없었느냐?”
“..어깨를, 조금...”
황제가 일어나,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그는 황녀의 어깨에 있는 상처를 보더니, 무서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어느 놈이 이랬지?”
당장에 다치게 한 놈을 잡아다 사형이라도 시킬 것 같은 중압감이다.
그 놈이 바로 나였기에, 나는 하염없이 식은 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배반자 율리우스와 그의 신도들이 날린 화살에 생긴 상처입니다.”
‘감사합니다...’
다행히 그녀는 적당히 이유를 둘러대기로 한 모양이다.
이사벨이 사실대로 말했을 때의 상황은, 상상하기도 싫다.
“그 율리우스가, 배반을..?”
황녀의 말에, 황제도 꽤나 충격을 먹은 듯 보였다.
이사벨은, 나를 찔렀던 율리우스의 한 손 검을 황제에게 내밀었다.
“율리우스의 검과, 이 검에 당한 령사님의 상처가 그 증거입니다. 령사님, 상처를..”
“아…. 네!”
어깨 부분의 붕대를 풀어, 상처를 황제에게 보여 주었다.
칼의 직경과 크기가 상처와 딱 맞아떨어져, 누가 봐도 율리우스의 검에 의한 상처란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이로군. 맙소사..”
자그마치 5년이란 세월을 보좌하던 기사에게 느낀 배반감과 하마터면 딸을 잃을 뻔했다는 아찔한 감정이 황제의 얼굴에 교차했다.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뜬 황제는, 깊은 분노를 표출했다..
“병사들을 보내 하플까지 가는 길목을 샅샅이 뒤져라. 율리우스와 그 신도들을 발견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그 자리에서 즉시 사살하도록.”
“..알겠습니다.”
살벌한 명령을 내린 그는, 한결 진정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와는 또 보게 되는구나. 검은 머리의 령사. 자네 이름이 그러니까.. 사야였나?”
“..맞습니다.”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역시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연유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내 딸을 구해줘서 정말로 고맙네.”
그는 내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역시 자네가 마음에 들더라니, 생각도 못 한 은혜를 지는구만..”
“..영광입니다.”
황제는 내게서 한걸음 떨어져선, 술잔을 기울이는 제스처를 취했다..
“자네 같은 인재를 그냥 보내기는 섭하지. 어때, 같이 한잔 적시지 않겠나?”
“...예?”
그는 금세 밝아진 얼굴로, 내게 어깨동무를 해왔다.
“..아바마마, 령사님은 부상자입니다. 오늘만큼은 부디 자중하심이..”
옆에 있던 이사벨이, 차갑게 대꾸했다.
“너도 너무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같이 한잔 하자꾸나. 이런 때일수록, 마시고 잊어버려야지.”
..이건 무슨 상황이래.
방금까지도 눈을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위엄있어 보이던 황제가, 지금은 동네 아저씨처럼 달라붙는다.
“..하. 미안해요, 사야. 아바마마께서는 상당한 애주가랍니다.”
사회생활 경험이 전무한 나라도, 여기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실은 저도, 술은 꽤 좋아하는 편인지라..”
“오오..! 자네라면 그럴 줄 알았네!”
그것보다는, 거절하면 어떻게 될지 무섭다.
“이봐! 술상을 좀 내오거라!”
황제의 명령에, 금세 식당의 탁자가 음식들로 가득 들어찼다.
가운데 끝에 놓인 황제의 자리를 중심으로,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
“옆에 앉게나. 오늘의 주인공인데, 내 술 한잔 정도는 따라 드려야지.”
“..감사합니다!”
황제 바로 옆자리라니, 이래도 되는 건가.
“말씀드렸듯이, 그녀는 부상자시오니…. 하아.”
내 맞은편으로, 이사벨 황녀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내 어련히 조절할 것이니, 너도 마음 놓고 들 거라. 이사벨.”
황제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내 앞에 놓인 잔에 술을 기울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러고보니, 자네는 암흑계 령사라고 들었네.”
“예. 그렇습니다만..?”
“..이것 참 기연일세. 실은 자네만 한 나이 때 비슷한 일로 나와 술잔을 적셨던 암흑계 령사가 있었다네.”
‘다른 암흑계 령사라면..’
나는 그의 잔에 술병을 기울였다.
“현 제국 령사단장, 비올레 경에 관한 이야기일세.”
예상은 했지만, 역시 비올레 단장님이었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수 있는데,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순식간에 잔을 비운 그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만삭이었던 왕비와 함께 국경을 지나던 날이었다네. 그날은 무슨 일인지, 영역을 벗어난 사르카들이 우리가 탄 마차에 달려들더군.”
“사르카가 습격을..”
“그래. 괴물 놈들이 떼로 몰려오니, 고용했던 기사들도 힘을 못 쓰고 쓰러져나갔지. 다행스럽게도, 신참 기사 하나가 사르카들의 상대법을 알고 있었네.”
“그 기사가, 비올레 령사단장이었나요?”
“맞아. 아주 재능있는 사내였어. 귀족도 아니었고, 하물며 좋은 장비가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놀라운 솜씨를 보여줬네. ”
이사벨이 그의 말에 맞장구쳤다.
“이 이야기, 폐하께서 아주 입이 닳도록 해주셔요. 그날 비올레 경이 없었더라면, 저도 오늘 이 자리에 없었겠죠.”
‘신참 기사..’
그의 얘기에, 무언가 의아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 비올레 경은 령사가 아닌가요? 어째서 기사라고..”
황제가 내 질문에 대답했다.
“당시의 그는 기사였네. 령사와는 인연이 전혀 없었어. 루덴에서 태어나 발현식의 존재조차 몰랐다고 했지.”
“..전부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언제나 순백의 갑옷을 두르고, 귀족처럼 고귀한 백발을 흩날리던 그가 루덴 출신의 평민이었다니.
“성격도 싹싹해서, 나와 자주 술잔을 기울이곤 했는데. 식탐의 굴라를 토벌하고 난 뒤로는 좀…”
황제의 얼굴에, 약간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닐세. 그가 령사단장의 직위에 오르고 나서는 도무지 술 상대를 해주질 않아서. 뭐, 늙은이의 푸념일세.”
그가 굴라 토벌을 기점으로 무언가 달라지기라도 했다는 걸까?
비올레에게 직접 물어보기 전에는, 정확히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황제가 또 잔을 털어 넣었다.
“아으, 좋다.”
어느덧 술이 꽤 들어가 분위기도 무르익고, 불편하게만 느껴지던 황제에게도 서서히 친밀감이 형성되는 느낌이 들었다.
“안타까워, 참으로 안타깝구만.”
“..네?”
“자네가 사내였다면, 우리 이사벨과의 약혼이라도 권유해 볼 텐데.”
“아바마마!”
그의 농담에, 술기운에 얼굴이 벌게진 이사벨이 소리를 꽥 질렀다.
“허허! 거 농담이다. 농담. 너도 슬슬 혼기가 찬 것 같아서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장난이 과하셔요, 아바마마도 참..”
두 사람 가운데서, 나는 그저 뻘쭘하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역시 자네에게 보답은 해야겠네. 따로 원하는 게 있는가?”
“보답이요..?”
그런 걸 바라고 이사벨을 구한 건 아니었는데, 황제가 직설적으로 물어오니 생각이 막혔다.
실은 이런 술상을 대접받은 것만으로도, 평민 입장에서는 꿈도 못 꿀 호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부담스러워할 거 없네. 딸의 은인에게 뭐든 못 들어주겠나.”
“..그렇다면야..”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가, 한가지가 번뜩였다.
“폐하. 혹시, 이런 부탁도 가능할까요?”
“말해보게나.”
당돌하다고도 할 수 있을 만한 나의 요구를, 황제께서는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날 그와 어찌나 마셔댔던지, 한참 취한 후에는 어깨에 난 상처의 고통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였다.
결국 날이 새고 아침이 돼서야, 황녀님의 배웅을 받고 아카데미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령사님...아니, 사야.”
말에 오르고 출발 준비를 하려는데, 황녀가 나를 불러세웠다.
“또 뵐 수 있겠죠?.”
“..그럼요.”
이사벨과의 짧은 인사를 마치고, 말을 출발시켰다.
전날 과하게 마셨던 술때문인지, 아카데미로 가는 내내 속이 메슥거렸다.
그날 나는 임무 도중 이탈한 것에 대한 처벌로 일주일간 아카데미 내의 온갖 청소를 도맡게 되었고, 여담으로 루나한테도 엄청나게 깨졌다.
그 일이 생긴 날로부터 하루 뒤, 클레드가 우리 네명을 불러 모았다.
“아카데미 앞으로 온 편지다. 너희 팀과 관련된 전언인데, 황제께서 무슨 영문으로 이걸 보내신 건지 모르겠군.”
그는 편지를 뜯어, 우리 앞에서 낭독했다.
“황제로부터의 전언....령사 사야가 속한 팀의 전투등급을..최고 등급으로 특진한다.. 이상...?”
나를 제외한 전원이, 벙찐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아니, 이걸 진짜 해주네..?’
술자리에서 질러본 말을, 황제가 진짜로 들어줬다.
“사야. 밖에서 대체 뭘 하고 온 거냐..”
클레드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쩌겠어요, 그게 황제님의 뜻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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