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첫 임무 (1)
* * *
깊은 잠에서 깨어난 유리는,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물.”
“...뭐?”
“물 줘.”
깨자마자 하는 말이 물이라니, 귀족 집 아가씨들은 다 이런가.
옆에 있는 물병을 들고, 컵에 물을 따라 유리에게 건넸다.
컵을 쥐여주자마자, 그녀는 단숨에 목으로 넘긴다.
“..더 줘.”
한잔을 더 따라서 주려는데, 그녀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니, 그냥 물병째로 줘.”
그렇게 목이 말랐나?
유리는 물병을 다 원샷하고 나서야, 만족한 듯 보였다.
물을 급하게 마시느라 참은 숨을 고르고, 조금 진정되자 나에게 말한다.
“그때 못 들었던 설명, 지금 들어야겠어.”
“무슨 설명?”
“..중급 마법을 전개할 때, 네가 도발을 하니까 위력이 강해진 거. 그건 무슨 원리야?”
역시, 유리라면 궁금해 할 것 같았다.
"감정이야."
"감정?"
"..시전자의 감정이, 마법의 위력을 좌우하거든."
그녀는 무척 혼란스러운 눈치다.
그렇겠지, 몇백 년간 이 나라 사람들이 밝혀내려 노력했던 마법의 원리가 고작 감정이라니.
“..넌, 그런 걸 왜 알고 있는 거야?”
내가 만든 거니까?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직접 실험해봤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묻고 싶은게 많지만.. 어차피 사실대로 말해주진 않을거지?”
"..응, 그렇네."
의심하는 눈치이면서도, 그녀는 더 캐묻진 않았다.
유리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난다.
“어디 가게?”
“실험해봐야지. 다른 마법도.”
“아니, 너 환자야..!”
“그래서? 우리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그 괴물들은 계속 강해져 갈 거야.”
“...”
그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그런데, 유리는 알고 있으려나.
우리 팀, F등급인 거.
꾸준히 받은 힐링의 효과 덕인지, 팔은 생각보다 금방 나았다.
일주일쯤 지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해져서 놀랐다.
어느덧 첫 임무를 배정받을 날이 되어, 유리와 나, 그리고 루나와 카르네까지 한데 모여 F등급 임무표를 확인했다.
“...농삿일 돕기, 잃어버린 강아지 찾기, 식량창고 경비 서기… ”
헛웃음만 나오는 임무표를 보고, 옆에서 하품하는 클레드 교관에게 소리쳤다.
“우린 사르카잡으러 온 거지, 농사지으러 온 거 아니거든요..?”
“농사도 누군가에겐 큰 일이다. 밖에서 괴물만 때려잡는 것 만이 능사가 아니야.”
아무리 F등급이래도 그렇지,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평범한 임무들 뿐이다.
“히히…. 히히..”
카르네가 구석에서 조용히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뭔가 했더니, 암살계획을 읊는 중이다.
“농사지으면서…. 죽일 수 있을까…? 과로사시켜서..? 아니, 저번 기회에 죽였어야 했는데.. 저번 기회에..”
..아무리 조심성이 없는 유리라도, 농사일하다 죽을 것 같진 않은데.
“사야, 우리 말고도 F등급이 있나 봐.”
주위를 둘러보던 루나가 말했다.
그 말에, 나도 주변을 살폈다.
F 맞기가 쉬운 게 아닐 텐데. 대체 누구지?
덩치가 산만 한 기사가, 바닥에 엎드려 땅을 치고 있다.
"크흑…! 그때, 도적놈들만 아니었다면….!"
바로 옆에서는, 울고 있는 빨간 양 갈래머리 소녀를 남자가 달래고 있다.
"팬티도 벗겨지고.. 혈석 자루도…. 훌쩍.."
"안젤리카.. 네 잘못이 아니야.."
보자마자, 정체를 특정할 수 있었다.
요전 날 루나와 내가 도둑질을 시도했던, 기사 세드릭과 화령사 안젤리카 팀이다.
우리가 자루를 빼앗은 덕에, F등급이 돼버린 모양이다.
'..근데, 우리 얼굴은 못 봤었나 보네..?'
슬그머니 안젤리카에게 돌려주려던 팬티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악의는 없어, 안젤리카.
팬티를 돌려주면 범행을 자백하는 꼴이기에, 영원히 비밀로 묻기로 했다.
미안하다! 친구들아!
'그나저나, 하나같이 기운 빠지는 임무들뿐이네.'
이런 같잖은 임무들이라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원래 전개대로면 유리팀은 S급 임무부터 시작하기에, 빨리 임무를 달성해서 S급으로 치고 올라가야 했다.
이대로 F급에 오래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혼돈 수치가 가중될 거다.
"비켜주세요, 임무 갱신이 있습니다!"
멍하니 임무 게시판을 바라보고 있을 때, 임무를 새로 갱신하는 직원들이 무언가를 잔뜩 들고 왔다.
수십 장의 임무를 잔뜩 붙였지만, 대부분 상위 등급의 임무뿐이다.
"저기.. F등급은 새로 들어온 게 없나요?"
직원들이 떠나려고 하자, 내가 붙잡고 물었다.
"F등급? 잠시만요.."
종이 더미를 한참 헤집은 직원은, 재질이 다른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하나 있긴 한데.. 이 임무, 수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요. 이런 경우는 자체적으로 폐기한답니다."
"기간이 언제까진데요..!?"
"그게.. 오늘 오전까지니까, 수락하고 바로 뛰어가서 접견해야겠네요."
그녀가 보여준 임무는, 교역상 호위 임무였다.
다른 임무에 비해 위험부담이 크고, F등급 인원도 적다 보니 지원자가 없었던 모양이다.
"저희가 할게요!"
망설일 거 없이, 바로 집어 들었다.
최대한 어려운 임무 위주로 맡는 게, F급을 탈출하는 제일 나은 선택이니까.
접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출발을 서두르려고 했다.
"너네들. 잠깐 기다려라."
클레드가 떠나려는 우릴 불러세웠다.
그는 내 쪽으로, 액체가 채워진 작은 유리관을 던졌다.
"뭐에요, 이거?"
"중급 마법 촉매다. F급 임무라도 하나 정돈 지니고 있어라. 뭐, 쓸 일은 없을 거다만."
"네 명인데, 하나밖에 안 주는 거에요..?"
“싫으면 다시 주던가.”
그건 안 되지.
촉매를 안쪽 주머니에 넣고, 접견 지로 달렸다.
"...네? 그냥 호위하는 척만 하라고요?"
임무를 보낸 남자로부터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F급에 의뢰했길래 돈이 적었거니 했는데, 오히려 호위는 이쪽에 맡기고 이웃 마을에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는 설명이다.
"괜찮습니다. 저희 쪽에는 이미, 최고의 호위들이 대기 중이니까요. 여러분들은 그저 뒤 칸에 타계 시면 됩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럼, 즐거운 여행 되시길."
남자는 우리의 말을 무시하고, 곧바로 마차에 올랐다.
대체 뭐지, 이 교역상?
자세히 보니, 교역품이라 할만한 물건도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설마, 또 인신매매라도 휘말리는 거 아니야?
"이 마차, 좀 수상쩍어."
다른 세명에게 조용히 속닥거렸다.
"혹시, 노예상이라던가.."
"아니, 그런 의도를 가졌다기엔, 너무 비효율적이야."
내 의견은, 카르네에 의해 부정당했다.
"범죄가 목적이라면, 굳이 국가권력인 령사들을 끌어들여서 눈속임할 필요는 없지. 대놓고 나 잡아달라 광고하는 꼴이니까."
"..그러네?"
"뭐든 간에, 뒤가 퀴퀴한 일은 아니란 거지."
역시, 범죄자의 심리는 범죄자가 가장 잘 아는 법.
"..왜 그렇게 봐?"
"..그냥, 똑똑해 보여서."
그런 생각을 하며 카르네를 빤히 바라보다가, 지적당했다.
덜컹.
마차가 한번 크게 덜컹거렸다.
밖을 보니, 이제 세말의 반듯한 흙길을 지나 거친 비탈길에 들어선 모양이다.
얼굴을 내민 나에게, 마부가 말한다.
"여기서부터 반나절은 걸립니다. 일행분들과 한숨 주무시죠."
"..네."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여기는 아르모니아다.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도 언제든 뒤통수를 칠 수 있는 그런 세계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들더라도, 나만은 깨어있자고 다짐했다.
…
졸음이 몰려와서 미치겠다.
깨어 있자고 다짐한 지 벌써 7시간째다.
다른 팀원들은 진작에 곯아떨어졌고, 나만이 유일하게 허벅지를 꼬집으며 버티고 있다.
그냥 자버릴까 생각하면서도, 마차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묵묵히 버텼다.
적어도 호위 임무면, 마차를 터는 도적이라던가, 굶주린 몬스터가 튀어나오고 그럴 줄 알았는데.
평화로운 걸 넘어서, 이젠 지루할 지경이다.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가도록 하죠. 말들도 지친 모양인지라."
마부가 말했다. 그러자 잠시 후, 가려진 마차 속에서 갑옷을 두른 남자 하나가 나왔다.
은빛의 고급스러운 견갑을 찬, 장발의 남성.
그 복장으로 보아, 평범한 신분은 아닌 듯 보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덕분에 편안한 여행길이었습니다."
남자는 그리 말하면서, 마부에게 돈을 건넸다.
"제가 더 감사하죠, 일개 마부 따위에게 이런 돈을 다.."
'수고비인가?'
중간에 수고비를 주는 것이 관례인가 싶어 넘어가려던 그때, 남자가 말한다.
"약속했던 500골드에, 감사의 의미로 30골드를 더 담았습니다."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요.."
'500골드…?'
500골드면, 아르모니아 령사 아카데미의 입학금과 맞먹는 금액이다.
겨우 사람을 실어 나르는 값으로, 500골드나 받는 마차는 이 세상에 없다.
긴장을 곤두세우고, 대화에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알폰소, 령사들이 잠들었는지 확인해라."
"예, 율리우스 님."
'이쪽으로 온다..!'
남자가 누군가에게 이쪽을 둘러볼 것을 명했고, 그는 우리가 타고 있는 칸의 천막을 들춰 상태를 확인했다.
"..."
모두 잠든 것을 확인한 그는, 다시 율리우스라고 불린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모두 자고 있습니다.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해도 될 듯싶습니다."
"좋군. 나머지는 내게 맡겨라."
그의 행동을, 숨죽인 채 지켜봤다.
그는 마차를 열더니, 안에 타고 있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이사벨 님. 이제 내리셔도 됩니다."
그 말에, 다리까지 내려오는 긴 후드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마차에서 내렸다.
"으음… 율리우스. 벌써 도착인가요?"
그녀는 하품을 하고, 주변을 살폈다.
"음..? 여긴, 하플이 아닌 것 같은데요.."
"... 예. 하플이 아닙니다."
휙.
율리우스라는 남성이 손짓하자, 호위라고 했던 남성 두 명이 여자의 입을 가리고 속박했다.
"으…. 읍…!"
"신속하게 움직여라. 제물에 상처입히지 말도록."
그녀는 남자들에게 잡혀 숲속으로 멀어져갔고, 율리우스 또한 천천히 그것을 뒤따라 사라지며 마부에게 말한다.
"이제 출발하셔도 됩니다. 오늘 본 것은, 부디 비밀로 지켜주시길."
"그, 그렇고 말고요."
혼란스럽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저 남자는 우리를 해코지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여자의 동의를 받고 끌고 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무시하기에는, 내 양심이 허락하질 않는다.
'..미치겠네, 이놈의 오지랖.'
결국, 마차가 더 멀어지기 전에 뛰어내렸다.
팀원들을 태운 마차는 점점 작아지며,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가보자.'
오랜 도적 경험을 살려, 발소리를 죽이고 미행을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