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루나 그레이스
* * *
“아르모니아 제국 황궁 기사단 소속, 루나 그레이스입니다.”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키는 훨씬 컸지만, 풍성한 백금발에, 발그스름한 뺨. 그리고 특유의 반짝거리는 에메랄드 눈은 아직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틀림없는, 루나였다.
“오랜만이네. 사야.”
꿈인가 싶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껴안았다.
고아원에서 방출되던 날부터, 그녀를 남겨두고 온 걸 두고두고 후회했었다. 편지라도 한 통 쓸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건만,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니.
내 머리 위로, 루나의 손길이 느껴졌다.
갑작스런 포옹 때문인지, 카르네와 유리가 적잖이 당황한듯했다.
“미안한데, 두 사람 아는 사이야..?”
아는 사이고 말고.
부녀지간 같은 사이랄까. 아니, 신체적으로는 모녀 지간인가..
기사 영입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4인이 쓸 방을 배정받았다. 기숙사 용도로 쓰이지만, 머무는 것은 자유였다. 가운데 놓인 칸막이 양쪽으로 2층 침대 두 개가 들어 있는 방이었다.
먼저 침대에 뛰어든 것은, 피곤한 얼굴의 카르네였다.
“자리는 나중에 정하고, 오늘은 일단 자자. 종일 행사만 참여했더니 피곤해..”
그런데, 같이 온 줄 알았던 유리는 보이지 않았다.
“유리는?”
“우리 프리지아 아가씨께서는 수련하신다는데. 사야한테 진 게 적잖이 마음에 남은 모양이야.”
주인공스럽다면 주인공스럽지만, 승부욕에 불을 붙인 당사자 입장에서는 이게 꽤 공포다. 유리가 수인족의 체술에 관심을 보이기에, 내가 동작을 알려준 뒤로 잠도 줄이고 수련하고 있다.
“다들 꽤 친해졌나 보네, 사야?”
루나가 말했다.
“으, 응..”
한 명은 나를 이기려고 미쳐있는 전투광에, 또 한 명은 살인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친구…. 인가?’
“앉아봐. 해줄 게 있어.”
루나가 의자를 끌어다 가져오기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거기에 앉았다. 뭔가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곧 내 머리에 무언가 까슬까슬한 것이 닿는다.
“빗질해줄게. 예전부터 꼭 해주고 싶었거든.”
“나, 짧은 머리라 안 해도 될 텐데.”
“안돼. 여자애잖아?”
그 말을 들으니, 빗질이 아프고 싫다며 보육 선생들에게서 도망 다니던 루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어르고 달래서 겨우 빗질을 시키곤 했는데, 이래선 마치 반대로 된 것 같다.
제대로 빗질하지 않고 멋대로 잘라냈던 머리는, 처음 받는 빗질에 툭툭 끊기며 따끔했다.
“아파.”
“처음엔 아플 거야. 나도 그랬거든.”
“아야야..”
꽉 막혀 있던 머리카락도, 점점 풀려갔다. 머리를 한올 한올 풀어가며, 루나가 말했다.
“어렸을 적에, 사야가 령사가 되겠다고 했지? 그때부터, 한 길만 보고 달렸어.”
“내가 했던 그 말 때문에..?”
“응. 그러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고.”
그런데, 그녀는 령사가 아닌 기사의 신분으로 나와 재회했다. 왜 확실한 방법을 두고, 어려운 방법을 선택한 걸까?
“처음엔 령사가 되려고 했어. 그런데, 11살이 지나도, 12살이 지나도, 문장이 나타나질 않더라.”
“...설마, 미발현?”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아무리 기사라고 할지라도, 마법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닐 텐데 그녀는 순수하게 검술만으로 여기까지 올랐다는 이야기다.
“알아보니까, 기사 중에서도 노력하면 령사 아카데미에 파견 갈 기회가 주어진다더라고. 그날부터 칼을 잡고 매일 연습했어. 그러다보니 황궁 기사단까지 올라있더라. 공주님 얼굴도 가까이서 봤다?”
말은 싹싹하게 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순탄한 길이 아니었을 거라는건 확실했다.
“그러고 보니, 그레이스라는 성은 입양된 가문의 성씨지?”
"응."
"입양된 곳은 어땠어, 괜찮았어?"
".....괜찮았어. 그냥.”
“다행이네.”
잘 지냈다니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슬슬 빗질이 마무리됐는지, 그녀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자, 끝났습니다. 이제 잘 시간이에요.”
“그거, 내가 하던 말 아니야?”
“히히. 비슷했어?”
침대에 누워, 밤새 그간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눴다. 길리언과 노예로 팔려 갈뻔한 이야기부터, 수인족과 지냈었다는 이야기까지.
아, 물론 거대 토끼 이야기도 빼먹지 않았다. 평소부터 토끼를 좋아하던 루나였기에, 귀여울 것 같다고 해서 당혹스럽다.
루나와 다시 재회해서 나누는 모든 이야기들이, 현실성 없게 느껴질 정도로 좋았다.
다음날 아침, 루나에 의해 잠에서 깨워졌다.
“일어나자, 사야. 준비해야지.”
“..음.”
그녀는 이미 준비를 마쳤는지, 갑옷까지 갖춰 입은 채로 침대에서 나를 마주했다.
“간단하게 네 명 분 아침 만들어 뒀어. 다 먹으면 옷 갈아입자. 밤에 전부 빨아뒀어.”
“아니, 밤사이에 그걸 다..?”
“응. 늘 하던 거야!”
중세라도 군인은 군인이구나. 이제 보니, 이불 각부터 청소상태까지 아주 철두철미하다. 먼저 일어나 차려진 아침을 먹고 있는 카르네가 숟가락을 굴리며 말했다.
“고마워서 어떡해, 그레이스 양.”
“루나라고 불러. 격식은 괜찮아!”
“어쩜 성격도 이리 싹싹하실까.”
얼떨떨한 얼굴로, 카르네와 마주 앉았다. 방금 따온 것처럼 싱긋한 샐러드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계란프라이가 차려져 있다.
“좋은 친구를 뒀네, 사야?”
“..밥이나 먹지?”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데, 루나가 욕실에서 외쳤다.
“사야, 목욕물 떠놨어!”
“목욕물..?”
그렇게까지 챙겨줄 필요는 없는데..
“전문가로서 말하는데 저 애, 집착증 초기일 수 있다?”
“시끄러. 전문가는 무슨..”
“흐응 못 믿겠어? 어디 지켜봐.”
카르네의 말 절반은 흘려들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아주 가능성이 없는 소리는 아닐지도..모른다는 생각은 버리자. 그럴리가 있나.
“사야! 씻는 거 도와줄까?”
“혼자 할게! 괜찮아! 진짜로!”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웃는 카르네와 달리, 나는 마냥 유쾌할 수가 없다.
준비를 마치고, 전투 실습실로 이동했다. 오늘 나의 최대의 관심사는, 전투 교관이 과연 누구냐는 것이다.
본래 전투 교관이어야 했을 령사 윈드가르트 루아레스는, 내 손에 죽었다.
그렇기에 오늘 마주할 인물은, 전개를 미리 알고 있는 나로써도 미지의 인물이었다.
'이상하네. 올 때가 한참 넘었는데.'
예정된 시간이 30분은 넘었는데, 교관이란 자는 도통 올 생각을 안 했다. 댕댕이도 지루해 졌는지, 옆에서 크게 하품했다.
학생들의 불만도 하나씩 튀어나오기 시작할 때쯤,
끼익
커다란 문이 열리며, 그가 등장했다.
"미안. 똥싸느라 좀 늦었다."
그가 등장하자마자 풍겨오는 술 냄새에, 앞줄 학생들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클레드라고 한다. 여러분의 그 뭐냐.. 전투 교관이지."
마구 산발된 회색 머리칼, 후줄근한 복장과 대충 정리한 수염에서 그의 성격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등에는 칼집 없이 붕대로 칭칭 감싼 대검 한 자루를 메고 있다.
'저 자가, 그 윈드가르트를 대신할 전투 교관….?'
"첫 시간에는 원래 팀별 등급평가를 해야 한다만, 솔직히 난 마법도 못 쓰고, 오스테온도 없어서 평가 기준을 모른다."
그가 손등을 이쪽으로 비추자, 정말로 문장 같은 것은 새겨져 있지 않았다.
마법도 못 쓰고, 오스테온도 없는 자가 전투 교관을 맡다니. 그 이전에, 저 자는 령사라고 할 수 있는건가..?
"그렇게 됐으니, 오늘은 평가와 야외 실습을 병행하도록 하마."
클레드는 주머니에서 푸른빛의 결정을 꺼내 들었다.
"아카데미 측에서 교육비를 줬는데, 쓸데가 딱히 없어서 술 몇 병이랑 이걸 사 왔다. 대규모 전이석이라더군."
'횡령한 걸 자연스럽게..'
"여기 다 모인 걸로 알고, 사용하마. 멀미에는 알아서 대비하도록."
"교관님, 잠ㄲ…!"
수많은 학생들의 의견이, 일제히 묵살됐다.
그가 전이석을 손으로 부수자, 밝은 빛에 학생들 모두가 잠식됐다. 눈앞에 푸른 빛만이 일렁이더니, 몰려오는 급격한 구토감과 함께 시야가 돌아왔다.
"우욱...우웨엑…!"
생전 처음 경험하는 극한의 어지러움에, 전이 당한 수많은 학생들이 헛구역질을 해댔다.
"이해가 안되는군. 취한 것 처럼 기분 좋을 텐데."
단체 구토를 일으킨 원인 제공자가 하는 말이었다.
겨우 구역질이 진정되고 주변을 보니, 학생들이 서 있던 배치 그대로 풀이 무성한 평원 한복판에 서 있다.
학생들 앞에 선 클레드가말했다.
"여러분은 현재 세말 외곽에 위치한 비보호지역으로 전이했다. 령사들이 지키는 세말 안쪽과 달리, 온갖 사르카나 야생동물들이 튀어나오지."
"키이익!"
마침 지나가는 토끼형 사르카를, 클레드가 대검 손잡이로 강하게 내려찍었다. 분해된 잔해 속의 새빨간 혈석을 그가 집어 들었다.
"이 혈석을 최대한 모아오는 순으로 등급평가를 매기겠다. 크기 따윈 어찌 됐든 좋으니, 나눠주는 자루에 최대한 무겁게 담아오는 쪽을 높게 쳐주마."
언제 준비한 것인지, 전이된 곳에 심어진 거대한 나무 밑동에 수십 개분의 자루가 놓여있었다.
"시간제한은 해가 저물 때까지다. 그럼, 수고들 하도록."
그가 손짓하자, 눈치 보던 학생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자루를 향해 달렸다. 덩달아 달리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딴 게.. 교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