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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에 전생했다-21화 (21/102)

〈 21화 〉 기사 영입

* * *

카르네 에커만의 낯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그런데, 알고 있으면 어떡할 거야. 사야?”

이제까지의 순수한 미소는, 이제 씁쓸함을 머금은 미소가 되어있다.

“아카데미측에 보고라도 하려고? ”

“신고할 생각은 없어. 네가 유리를 죽일 동기를 가졌다는 증거가 없거든.”

나는 전개를 알았지만, 실질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던 지금은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제재를 가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경고를 보낼 뿐.

"그러니까, 일단은 널 건드리진 않을 거야. 아직까지는."

"...너도 참 희한하네. 그게 끝이야?"

"다만, 조건이 하나 있어."

그녀를 굳이 협박한 진짜 이유는, 이것이었다.

"이따가 진행될 팀 배정식에서, 유리와 너, 그리고 나를 같은 팀에 묶어줘. 이게 내 조건이야."

"..흐응, 그렇구나. 같은 팀에 있으면, 나를 쭉 감시할 수도 있을거고. 뭐, 좋아."

유리와 팀을 맺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경쟁자를 뚫어야 했을 거다. 그러나 카르네라면,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태워줄 능력이 있다.

"맞다. 우린 이 뒤로도 친구인 거지?"

방금 살인 의도를 들켰으면서, 친구냐고 물어보다니.

"..뭐, 표면적으로는."

"다행이다..!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너랑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야 했거든."

결국, 하나부터 열까지 다 계산된 행동이었다. 대화를 마치고 내게서 돌아서던 카르네는, 한마디를 덧붙인다.

"아, 오늘 고마웠다는 건 진짜야. 네가 믿든 말든."

"...개소리."

"너무하네."

칼날 위를 걷는 것 같던 분위기의 거래는, 거기서 끝났다.

­

"팀 배정을 하겠다. 세 명이 짝을 지어 앞으로 나오도록."

학생들이 급격하게 부산해졌다. 서로 원래부터 팀을 짜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많았다. 당연하게도, 올해의 신예였던 유리 프리지아는 수많은 구애를 받고 있었다.

"유리, 우리랑 같은 팀이 되어줘. 남자뿐이지만, 최강이라고 자부할게!"

"프리지아. 저런 땀 냄새나는 팀 말고, 우리 팀에 오면 네 역량을 제대로 펼칠 수 있을걸."

"뭐? 땀 냄새?"

정작 유리는 묵묵부답인데, 팀을 맺고 싶은 자들이 더 난리다.

유리는 기록상으로 올해 최고 기록의 신입생인 만큼, 그녀를 데려간다는 건 평판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기에 많은 학생들이 그녀를 데려가려 안달이었다.

나 역시, 댕댕이를 끌고 유리 앞의 수많은 학생들과 마주했다.

'미친, 저걸 어떻게 뚫냐.'

멍하니 인파를 보고 있는데, 내 옆으로 카르네가 지나간다. 그녀는, 인파 속으로 들어갈 생각이다.

"어쩔 셈이야, 카르네?"

"구경이나 해."

카르네는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유리의 앞에 도달했다.

"유리, 우리 팀 할까?"

"잠깐, 권유는 우리가 먼저 했다고."

카르네의 앞을, 남성 팀이 막아섰다. 얼굴들을 자세히 보니, 나에게 천민 할당제 어쩌고 했던 그놈들이다.

"꺄악! 어딜 만지는 거야!?"

그에게 어깨를 밀쳐진 카르네가, 크게 소리쳤다.

"뭐, 어..? 갑자기 무슨 소리아..!?"

"아무리 인파 속이라도 그렇지, 가슴을..!"

시선이 점점 남학생에게 꽂히기 시작했다.

"가슴을 만졌다고..?"

"그러고 보니 저 남자, 수업 중에 자꾸 저를 힐끔힐끔 봤었어요..!"

"아니, 나 완전 억울하다니까?"

그가 억울함을 호소해보지만, 이미 민심은 카르네쪽으로 향해있다.

"쓰레기구만, 이 자식..!"

멱살을 쥐고 주먹질이 오가는 사이, 어느새 카르네가 유리를 데리고 빠져나왔다.

"자, 신청하러 가볼까?"

"...와. 어쩜 그리 뻔뻔할 수 있어..?"

악역이긴 하지만, 다른 의미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그녀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종이에 간단한 서명을 하고, 곧바로 절차를 완료했다.

"세 명 다 동의한 거지? 이제 기사만 구하면 되겠네."

기사를 영입하고 나서가, 진짜 한 팀이 된다.

과거에는 3인 1조로 세 명의 령사가 한 팀을 이뤘지만, 정신력을 쓰는 마법에 의존하는 싸움이 주된 령사의 특성상 소모전에는 약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렇기에, 사르카를 상대할 수 있는 특수 무기를 기사들에게도 보급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령사 3명과 기사 1명으로 이루어진 팀을 만드는 것으로 관습이 굳어졌다.

당연하지만 령사 아카데미에 협력하는 기사들은 그중에서도 소수의 인원으로, 교환학생 같은 느낌이다.

"기사 영입은 오늘 밤이야. 연회장에서 열리니까, 다들 드레스라도 한 벌 맞춰오렴?"

'드, 드레스..?'

경직된 나와 달리, 카르네는 조금 들떠 보였다.

"얼마 만에 입어보는 걸려나. 드레스라니..!'

평생 나와는 연관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인데. 유리의 표정도 그렇게 좋진 않았다.

"..싸울때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의복 따위가, 어째서 인기가 많은 거지?"

유리 프리지아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에, 카르네가 귓속말로 속삭인다.

"사야, 드레스 때문에 곤란해하고 있지?"

눈치는 진짜 짜증 나게 빠르다니까. 흑견씨에 버금가는 눈치다.

아르모니아의 의복 점은 기본적으로 귀족들의 점유물이었기에, 내가 들어가는 것을 꺼릴 게 분명했다.

검은 머리를 비교적 자주 접하는 평민들과는 달리, 의복점에 검은 머리가 다녀갔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매출에 큰 타격이 올 게 뻔했으니까.

"이를 어쩌나, 사야가 지금 맞는 드레스가 없다네?"

카르네가 말했다. 다 들리도록. 맥이는 걸까 생각했는데, 유리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나온다.

"그런 거라면, 집에 차고 넘치도록 있어. 가져가."

"정말? 그럼 사야 드레스도 맞추는 김에, 유리 저택에 들러봐도 될까? 궁금했거든, 대저택이란거!"

"잠깐, 유리 의견도.."

"난 상관없어."

카르네 덕에 일이 속속 풀려가서, 오히려 불안할 정도다. 속셈을 들켰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거지?

"이건 마법 수업 때의 감사 표시야. 사야."

"...."

썩 내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

유리의 저택은 내가 상상한 그대로였다. 분수대가 달린 골프장만 한 정원에, 가로로 어마어마하게 넓은 대저택이 펼쳐져 있었다.

"뭐해, 들어가자."

크기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더니, 유리가 나무랐다. 댕댕이는 정원에 둔 채로, 저택의 복도를 따라 한참을 걷다 보니 액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프리지아 가문의 역대 조상들의 그림인듯싶었다.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은발에 푸른 눈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복도를 따라 쭉 걷는데, 백발의 노신사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셨군요, 아가씨. 친구분들이신가요? 차라도 내오겠습니다."

"드레스룸을 좀 쓰려고요. 오래 있지는 않을 거라 차는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노인은 인사를 하고, 조용히 물러갔다. 저자는 아마, 어릴 적부터 유리의 시중을 들었던 집사로 생각된다.

수많은 문 중, 유독 문이 다른 방이 하나 눈이 띄었다. 다른 방들은 전부 모양이 같은 고급스러운 문인데, 이 방만큼은 먼지가 잔뜩 낀 오래된 나무 문이다. 카르네도 똑같은 의문을 품은 것인지, 유리에게 물었다.

"유리, 이 방은 뭐야?"

"거긴 건드리지 마."

항상 한결같던 유리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진다. 그러나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지, 이내 다시 온화해졌다.

"..거긴, 이제 안 쓰는 곳이야."

"으, 응…"

소설에 이런 방이 있었다는 서술이 있었나. 궁금했지만 유리가 별로 반기지 않는 눈치기에, 말없이 드레스룸에 뒤따랐다.

"크다. 이게 전부 유리 거야?"

"전부는 아니야. 멀리 사는 친척들이나 이젠 없는 사람들의 옷도 있으니까. 어차피 전부 안 입는 옷들이야."

크기부터 종류까지 각양각색의 옷들이 있었다. 솔직한 감상으로, 여기 있는 것들만 팔아도 평생 먹고사는데 문제 없을 것 같다.

열심히 구경하는 동안 카르네가 몇 벌을 가지고 다가왔다. 어째 입는 건 난데 그녀가 더 신나 보인다.

“이거랑 이거 걸쳐보자!”

“..너, 너무 열심히 연기하는 거 아니야?”

“어머, 얘가 무슨 소리람..! 빨리 입어 봐!”

카르네에게 밀쳐지듯 드레스룸에 갇혀서, 섣불리 입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드레스들은 지나치게 여성스럽다.

17년간 가슴 같은 부위는 그렇게 자라지 않았지만, 눈에 띄게 부풀어 오른 엉덩이라던지 골반을 보고 있으면, 역시 여자가 돼버린 게 실감 난다. 처음 입고 나온 옷은 당차게 패스 당했고, 결국 어울리는 옷을 찾기까지 몇십 벌은 입은 것 같다.

결국 카르네가 골라온 마지막 드레스만이 남았다. 이것도 별로라면, 그냥 평상복으로 가버릴 거다. 몸에 드레스를 맞춰 입고, 커튼을 젖혔다.

"이,이상해..?"

나를 마주한 두사람이, 이상하게 말이 없었다.

“...괜찮아.”

“다른 사람이 됐네..!”

두 사람 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여, 역시 안 되겠어. 그냥 평상복으로..”

“자, 시간 없으니까 우리도 갈아입을게?”

의견을 낼 틈도 없이, 양팔을 잡혀 끌려 나왔다. 두 사람도 드레스로 갈아입고, 결국 내 의견은 묵살당한 채 순순히 아카데미까지 가게 되었다.

­

이미 한번 와봤던 연회장이건만, 발현식 직후 왔던 풍경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학생들은 저마다 한껏 치장하고 와서, 정말로 귀족들의 연회에 왔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참고로 댕댕이는, 유리네 정원을 너무 좋아해서 결국 거기 풀어두고 왔다.

그런데 치마라는 건, 이렇게 아래가 허전한 거였나..? 바지랑 다르게 가랑이 사이로 공기가 적나라하게 드나드는 느낌이 적응이 되질 않는다.

“사야, 남자들이 널 힐끔힐끔 보는데?”

카르네가 놀려먹으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이쪽을 힐끔힐끔 보고 있다.

‘그렇게 이상한가? 이래서 그냥 평상복으로 온다고 했던 건데..’

긴장 때문에 음료만 억지로 마시고 있는 중에, 기사들이 연회장에 입장했다.

아카데미에서 초청해온 인물들인 만큼, 각지에서 날고 기는 우수한 인재들이다. 연회 같은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속하고 싶은 팀을 고르는 건 기사의 몫이었다.

그들이 자신이 들어갈 팀을 고르는 기준은 다양했다. 강해 보이는 팀에 들어가는 걸 선호할 수도 있고, 그저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인 경우도 있다.

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우리 팀에는 소식이 없자, 카르네가 말했다.

“다들 이쪽에 관심이 있긴 한데, 어째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네. 유리 같은 천재 빙령사도 있는데 말이야.”

그래서 더 부담스러워하는 거 아닐까.

“겨뤄볼 만한 기사면 좋겠는데.”

한결같이, 유리의 취향은 확고했다. 기사들이 들어온 덕분에 나를 힐끔 보던 시선들이 줄어 한편 마음이 편하긴 했다.

“저기, 실례합니다.”

누군가 말을 걸기에 고개를 드니, 어깨가 떡 벌어진 기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쪽에 너무나 아름다운 령사분이 계시기에, 차마 권유를 안 드릴 수가 없네요.”

듣자 하니, 그는 우리 팀에 소속되기를 원하는 모양이었다. 카르네는 그가 무슨 의도인지 눈치를 챈 모양인지, 그에게 말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희 유리 프리지아양은 연애 같은데 관심이 없으실 거랍니다.”

“..아뇨, 빙령사 분이 아니라.. 이쪽에 앉으신 분께 말했습니다.”

그의 손짓이 향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도, 내 뒤쪽에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는 건..

“엣..? 저, 저요…!?”

“그렇습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부디 저를, 소속 시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지..?

생판 모르는 기사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받아버렸다.

“대박이네..! 사야, 어떡할래?”

카르네는 재밌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본다.

“저기, 나는…. 그러니까..”

“실례합니다만, 저에게도 기회가 있을까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얘졌을 때, 투구를 눌러쓴 누군가가 이쪽에 말을 걸어왔다. 투구 때문에, 얼굴은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이렇게 복수의 기사가 같은 팀을 원했을 때는, 두 가지 해결책이 있었다. 소속권을 걸고 결투하거나, 한쪽이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먼저 온 쪽이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다.

투구를 쓴 기사가, 먼저 결투를 제안했다.

“..아무래도, 결투를 피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저 또한, 동의하는 바입니다.”

두 기사는 가운데로 향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만들어냈다. 아니, 기사들이 지금 나를 두고 싸우고 있다고? 정신이 아득해지려고 한다.

내게 먼저 말을 걸었던 기사가 묵직한 클레이모어를 꺼내 들었다.

“죄송합니다만, 제 마음은 진심입니다. 지금이라도 물러나는 걸 추천해드리죠.”

내 전생과 인생 통틀어 첫 번째로 받은 고백이 장신의 근육 남이라니. 맙소사..

“그런가요? 기대해볼게요.”

투구 기사는, 적당한 길이의 사브르를 꺼내 들었다.

얼핏 봐도 둘의 체격 차이가 너무 심해서, 한쪽이 불리한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정, 후회할 겁니다..!”

클레이모어 쪽이 먼저 달려들었고, 결투가 시작되었다.

….

털썩.

그리고, 먼저 쓰러진 쪽 또한 그였다.

“크흑, 젠장..!”

분해 보이는 얼굴을 하면서도, 상대와의 악수를 잊지 않는다. 기사도 정신인가.

“힘은 당신이 압도적이었어요. 다만, 클레이모어는 결투에 쓰기는 너무 느린 칼이랍니다.”

체격 차를 누르고 유유히 승리를 거머쥔 투구 기사는,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이쪽으로 걸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생각보다 더 왜소했다. 키가 커봤자, 나보다 아주 약간 큰 정도로.

“령사분들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투구를 벗고, 이렇게 말했다.

“아르모니아 제국 황궁 기사단 소속, 루나 그레이스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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