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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에 전생했다-16화 (16/102)

〈 16화 〉 임명식

* * *

세말 식당가에서 식사를 마치고 숙소를 잡았다.

그동안 도적단에서 나오던 고기반찬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풀이 가득한 이곳 음식에는 다시 적응이 필요할 것 같다.

허름한 침대에 누워 공책을 펼쳤다.

소설 1장을 보면, 황제에게 직접 령사직을 하사받는 것은 유리 프리지아로 서술되어있다.

그러나 내 기록이 예상보다 좋아 버린 탓에 내가 황제 앞에 서게 생겼다.

그렇게 되면 또 내용이 바뀌고, 혼돈 수치가 오르겠지.

방법은 하나다.

아카데미측에 내가 황제 앞에 서는 자격을 양도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유리에게로 자격이 넘어갈 테니.

­

다음날, 나를 포함한 학생들은 전부 임명식에 모였다.

령사가 되었음을 정식으로 임명하는 자리로써, 어찌 보면 입학식과도 같은 개념이다.

혹시 나와 같은 루덴 출신도 있을까 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나를 바라보는 경비들의 눈초리들이 심상치 않아서 곧 그만뒀다.

괜한 오해를 사서 좋을 건 없지.

곧 임명식이 시작되고, 기사들과 함께 황제가 들어섰다.

"오늘 이 자리를 빌려, 아르모니아 제국의 안녕을 위해 기꺼이 령사가 되기를 택한 자들 모두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생각보다 젊어 보인다.

외견으로만 봤을 때는 많아 봐야 40대 초반 정도의 외모로 보였다.

황제의 옆에 있던 기사가, 종이 하나를 받아들고 우리를 보며 말했다.

"이름이 불린 자는, 앞으로 나와 황제 폐하께 예의를 갖추어 주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임명식의 하이라이트가 왔다.

그 해, 가장 우수한 기록으로 발현식을 마친 령사에게 황제가 축복을 내리는 자리.

그러나, 그 자리는 이제 내 것이 아니다.

"유리 프리지아."

이름이 불리기가 무섭게, 모두가 일제히 박수를 치며 그녀를 환호했다.

그녀는 이름이 불리자 잠깐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차분해진 모습으로 황제의 앞에 나가 무릎을 꿇는다.

의외로 자격을 포기하는 건 쉽게 진행됐다.

마침 수도원 측에서도 귀족층이 아닌 내가 단상에 서는 걸 못 마땅해 하던 눈치였고, 서로 이해관계가 맞물려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 결과, 자격은 유리에게 넘어갔고 내 기록은 없던 걸로 돼버렸지만.

당시 내 기록을 목격했던 학생들에겐 모래시계의 오작동으로 인한 해프닝정도로 설명하고 넘긴 듯 했다.

"그대의 앞길에 오스테온의 불빛이 비추길."

"..."

황제가 그녀를 축복하면서 임명식은 끝이 났고, 학생들은 수습이긴 해도 정식 령사로서 임명받았다.

좋아. 이걸로 더 이상의 혼돈이 늘어나는 것은 막았다.

문제는, 살벌한 눈빛으로 나에게 곧장 걸어오고 있는 유리 프리지아였다.

당장이라도 살인 당할 것 같은,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무슨 이유로 그런 거죠?"

"네? 무슨 말이신지.."

"일부러 황제 앞에 서는 걸 포기했잖아요. 발뺌할 생각 마요."

어물쩡 말을 돌려보려 했지만, 금세 차단당했다.

"그 자리는 당신 자리였어요. 왜 본인의 기록을 말소시키면서까지, 그런 짓을 한 거죠?"

혼돈을 늘리고 싶지 않아서…. 라고 말할 수가 없잖아.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덕분에 가짜 명예를 안게 돼서, 미치도록 고맙네요. 당신한테."

그녀의 자존심이 무척 강한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내가 짠 캐릭터니까.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신을 욕보이려는 건 아니었어요. 프리지아."

"..."

화가 난 건지, 울고 싶은 건지 모를 표정을 지은 그녀는, 또 나를 피해 어딘가로 가버리고 말았다.

이걸로 두 번이나 미움을 사게 돼버렸다.

마음속 깊이,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소설의 내용대로, 그녀는 학생 전부가 알아보는 유명인이 될 거다.

나는, 엑스트라 정도로 있는 게 오히려 편하다.

"령사 여러분, 축하의 의미로 식사를 준비해 두었으니 바쁘시지 않다면 연회장에 들러두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려 황제가 직접 여는 연회다.

게다가 공짜 밥이라고? 못 참지.

학생들을 따라 아카데미 안에 위치한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넓다..!'

몇백 명이 앉아도 남을듯한 식탁 개수에, 천장에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무수히 빛나고 있었다.

내 옆을 지나던 남학생들의 소리가 들렸다.

"나쁘지 않은 연회장이네."

뭐? 나쁘지 않다고?

귀족 놈들은 지금껏 어떤 호사를 누리며 살아온 거냐.

황제의 국악대가 연주를 시작했고, 학생들은 저마다 그룹을 지어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인싸들이 잔뜩…'

왠지 어두컴컴했던 학창 시절이 떠오르는데.

밥이라도 많이 먹어둘 성싶어서, 음식을 있는 대로 잔뜩 떠서 혼자 자리에 앉았다.

크게 한술 떠서 먹으려는 참에 뒷좌석이 왠지 시끌벅적했다.

"프리지아님! 같이 식사해도 될까요?"

"4분대 기록을 낸 게 진짜야? 어떻게 한 거야?"

유리 프리지아가 앉은 자리였다.

남학생이고 여학생이고 할 거 없이 그녀의 관심에 들어보려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여학생에 의해 중재 당한다.

"다들 너무 그러지 마. 유리 님이 부담스러워하셔."

약간 웨이브가 서린 갈색 단발머리.

단정한 옷차림의 그녀는 사람 좋은 미소를 하며 학생들을 돌려보냈다.

그녀의 이름은 카르네 에커만.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다고 해서, 가까이해선 안 된다.

카르네는 유리에게 달라붙어 관심을 독차지하기 위해 온갖 주변 인물들을 배제하는 무서운 집착녀다.

후반부에 가서는 신분 차별을 서슴치 않으며, 결과적으로 유리에게 안 좋은 결말을 끼치는 데 동조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걸 알 리 없는 유리 프리지아는, 카르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성함이?"

"딱딱하게 굴 필요 없어. 나는 카르네. 편하게 불러줘."

과연 카르네답게, 친해지는 데는 선수다.

그녀들의 대화를 엿듣던 중,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자네는 왜 혼자 앉아있는가?"

"그야 친구가 없…. 켁…!"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사레가 들려서 연신 기침을 했다.

눈앞의 남자는 무려, 아르모니아 제국의 황제다.

"폐하…!?"

"실례가 안된다면, 같이 합석해도 될까?"

거절하고 말 것도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빼며 그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신경 쓰였는지,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며 멀리 떨어지라 명했다.

"격식은 됐네. 자네한테 좀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저한테요..?"

"오늘의 주인공 자리를 마다했더군.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

망했다.

감히 내 호의를 거절해? 같은 의미인가.

그러나, 그의 다음 대사는 뜻밖이었다.

"나는 자네가 개인적으로 맘에 드네."

"...?"

"자네는 필시, 머리 색깔이나 신분 등을 고려해 자신이 단상에 서는 것은 아카데미의 인식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게 판단했지?"

그런 거 아닌데요.

다행히, 그는 좋은 쪽으로 오해해 준 것 같다.

"대의를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자기 자신도 챙겨주게나. 자네 같은 자가 단상에 서주었다면, 사회적 인식 변화에도 좋은 영향을 줄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기회가 된다면 또 보도록 하지. 사야."

관계자로부터 전해 들은 모양인지, 그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황제가 먼저 자리를 떴고, 당연히 주변 학생들이 이 광경을 못 봤을 리 없었다.

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속닥거렸다.

"쟤 뭐야, 폐하와 무슨 얘길 한 거래..?"

"저거 천민 할당제로 뽑힌 거 아니냐?"

천민 할당제 누구냐.

이런 놈들이랑 친해질 생각은 그다지 없었다.

나를 반기는 녀석들도 없을 테고.

대충 먹고 나갈까, 했지만..

'맛있어서 일어날 수가 없다….'

어제 먹은 것들과는 품질이 달랐다.

스테이크, 푸딩, 닭고기.

현실에서도 비싼 돈 주고 먹어야 했던 것들이 푸짐하게 쌓여있으니 쉽사리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접시에 머리를 박고 한참을 먹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어, 발현식에서 3분 만에 깨어난 참가자 맞죠? 그렇죠?"

목격한 학생이 있었나?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저는 카르네 에커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어..?

"..사야. 성은 없어요."

얼떨결에 대답해버렸다.

카르네 에커만.

이 여자와 엮여선 곤란하다. 빨리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그러지 말고, 저희랑 같이 먹는 건 어때요?"

"예?"

카르네는 유리가 앉아있는 식탁을 가리켰다.

무슨 속셈이지?

"유리, 괜찮지?"

"....."

프리지아는 말이 없다.

"괜찮은 걸로 알게. 그리고.. 사야라고했나? 편하게 카르네라 불러줘. 나도 그렇게 할 테니."

만난 지 1분여 만에 말 놓기.

무서운 친화력이다.

카르네에게 떠밀리듯 자리에 앉혀졌다.

카르네를 필두로 열린 유리와의 삼자대면은, 공기가 얼어버리는 건 아닌지 착각할 정도로 싸늘하다.

"유리, 여긴 사야…"

"알고 있어. 이름은 처음 듣지만."

"..그래? 둘은 벌써 친했었구나."

혹시 친하다는 의미가, 눈빛만 봐도 나를 싫어함을 알 수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변했나..?

"...."

"...."

둘 다 말이 없었다.

분위기를 참지 못한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저 때문에 화났다면.."

"화난 적 없어요."

"..."

카르네는 이런 분위기가 될 거라고 예상했을까?

아닌 것 같다.

처세술에 달인인 카르네조차도, 미소만 짓고 있을 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래도 분위기를 어떻게든 풀어 보려는지, 입을 뗐다.

"있지, 두 사람도 편하게 말 놓는 게 어때? 셋이 모였는데 둘만 서로 경어를 쓰는 건 딱딱하잖아."

"좋아."

유리는 의외로 쿨하게 승낙했다.

"당신이 사과할 필요는 없어. 내 능력 부족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그녀는 성취욕이 남들보다 강할 뿐, 속 좁은 사람은 아니다.

임명식 때도 내가 자리를 양보한 것에 대한 불만을 표했을 뿐,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애써 웃음을 지으며 화답해보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런데, 당신과 가까워지는 의미로써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들어주겠어?"

부탁?

나에게 부탁할 게 뭐가 있을까.

"부탁이 뭔데?"

"실은, 오스테온과의 싸움을 3분 만에 결착 지었다는 당신의 실력에 궁금함이 생겼거든."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나와 대련해줘. 사야."

"...어?"

_띠링_유리 프리지아와의 대련에서 승리하라.보상 : 「아르모니아 전기」 제2장

눈앞에 보이는 퀘스트와 함께 그녀가 요청한 것은, 나에게 거는 결투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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