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발현식
* * *
10여 년 만에 나온 세상에 대한 감평.
바뀐 게 없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조그만 거 하나까지 등쳐먹으려는 녀석들 투성이에다, 검은 머리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전부 변하질 않았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허리춤에 찬 단검을 들이밀면 다들 착해졌다는 거다.
날씨도 혐오스럽기 그지 없어서, 10일 정도 예상했던 게 수도까지 12일 정도 걸려서 도착했다.
도중에 마차를 습격한 도적들이 있었는데, 암흑 탄 몇 발에 도게자를 시전했다.
덕분에 자금을 좀 얻어내서, 좀 더 여유로운 여행이 됐었지. 누가 누굴 털려고.
지긋지긋한 말발굽 소리가 그쳤다.
“다 왔습니다. 아르모니아 제국의 수도, 세말입니다."
마차에서 내려,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엄청 크다, 사람도 많아..!’
루덴에 비하면, 이곳은 사람이 못해도 10배, 아니 100배는 많은 느낌이다.
내리자마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가방 속 무게를 무지하게 차지하는 혈석들을 처분하는 일.
세말이 아니고는 혈석을 매입해주는 곳이 없어서, 여기까지 들고 다니느라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다.
매입 상을 찾아 가는데 자꾸 사람들이 힐끔힐끔 보는 것이 느껴졌다.
내 머리 색깔이 신경 쓰이는 거겠지.
시선을 피하고자,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매입 상에 도착해서 혈석이 담긴 배낭을 내려놓았다.
깐깐하게 생긴 남성이 안경을 닦으며 물었다.
“혈석을 팔러 오신 거라면 잘 오셨습니다. 얼마까지…. 에엑!?”
내가 꺼내 든 것은 주인 사르카를 죽이고 나온 짱돌만 한 혈석.
거만한 태도를 유지하던 남자가 돋보기를 꺼내 들고 묻는다.
“이, 이런걸…. 어디서 구하신 거니까?”
“토끼가 주더라구요.”
“토끼형 사르카에게서 이걸..?”
초거대 왕토끼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어붙인 흔적도 없고, 적당하게 투명한 게 가짜가 아니네요. 이 일을 한 지 17년은 됐는데 이런 건 처음입니다..”
“아, 그리고 이것도 부탁해요.”
나는 뒤에 있던 쌀 포대만 한 보따리도 하나 올렸다.
“이게 뭡니까?”
“혈석 조각이요.”
그가 무게를 달고는, 혈색이 하얗게 돼서 되묻는다.
“아니, 이만한 양을 도대체 어디서 구하신 거니까..!?”
5년간 작은 사르카들을 잡으며 모아온 혈석이다.
개중에는 늑대형 사르카같은 중형급의 혈석도 섞여 있었다.
주판을 두드리는 그의 손이 분주해졌다.
아마도 개인 손님이 이 정도의 양을 가져온 것은 처음이리라.
“큰 혈석이 250골드, 자잘한 것들이 300골드 되겠습니다. 정직하게 메긴 가격이오니, 안심하시고 판매하셔도 됩니다.”
‘전부 해서 550골드..?!’
1200골드면 루덴에선 작은 집도 구하니까, 절대 적은 금액은 아니다.
기분 좋게 판매하고 나오려 했으나, 주머니 속의 구슬 하나가 계속 신경 쓰였다.
5년 전 도적단을 습격했던 령사 윈드가르트의 소환령이 죽고 남긴 물건으로, 령사들이 사용하는 특수무기에 사용되는 소재였다.
이걸 판다면 그 가치가 어마어마하겠지만, 소환령을 죽여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니만큼 출처를 추궁당할 수도 있었다.
아쉽지만, 거래는 혈석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손님. 앞으로도 혈석을 수급하시면 이곳으로 와주시길.”
이 남자를 믿고 거래한 이유가 있었다.
이곳이 세말에서 가장 큰 거래소였던 만큼, 신뢰 관계가 생명이었다.
만약 그가 손님을 상대로 부당한 이득을 취했던 사내라면, 자연스레 발걸음도 끊겼을 거다.
그런데 저번에도 어떤 할망구 믿었다가 배신당했었지?
괜찮다. 이번에는 그랬다면 칼 들고 다시 가지러 가면 되거든.
얻은 돈으로는 먼저 아카데미 입학의 준비물을 구매하는 데 사용했다.
준비물이 우리 초등학생 때처럼 고무찰흙 이런 건 당연히 아니고, 의식에 필요한 준비물들이다.
혈석 조각, 말린 이프노스 가루, 약간의 피를 담을 작은 유리병들이 그것이었다.
혈석조각은 미리 챙겨두었으니 말린 이포느스 가루와 유리병만을 구매해 아카데미로 향했다.
'크다…!'
아르모니아 령사 아카데미.
제국의 유일한 령사 배출소인 만큼, 그 크기나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학생들이 입은 복장도 하나같이 고급스러워서, 평민이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인상을 팍팍 준다.
느껴지는 시선들을 애써 무시한 채, 접수처로 갔다.
"어서 오세요. 접수는 이곳에서.."
여자의 시선이 내 복장에 박혔다.
머리색과 후줄근한 후드를 눌러쓴 외견이 어지간히도 수상쩍나 보다.
"접수.. 하시러 온 거죠?'
"네."
".. 입학 비용은 충분히 있으실까요?"
방금 혈석을 팔고 벌었던 돈주머니를 탁자에 올렸다.
"이 정도면 될까요?"
"400골드만 맡겨놓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도로 가져가세요."
돈을 받아들자마자 눈빛이 바뀌며 친절해졌다.
참 솔직한 사람일세.
그나저나 400골드라니, 충분히 벌어놔서 망정이지 돈 때문에 입학을 가로막힐 뻔했다.
"혹시 발현에 실패해서 입학이 불가능하게 되면, 전액을 다시 돌려드리니 접수처로 돌아와 주세요!"
돈을 낸다고 무작정 입학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발현식이라는 의식을 통해 령을 몸 밖으로 꺼내는 데 성공한 자들만이 령사가 될 수 있었다.
아카데미 부지 내에 있는 커다란 성당에 들어섰다.
"비켜주세요! 의식불명 시험자입니다!"
장정 두 명이 입에 거품을 문 남학생 하나를 붙들고 옮기고 있었다.
'실패하면, 그걸로 끝이야.'
방금 실려 나간 사람처럼, 령을 꺼내는 데 실패하면 의식을 잃는 것부터 해서 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다행히 몸에 이상이 없었다 하더라도, 한번 실패한 이상 문장을 잃어버리게 된다.
즉, 실패하면 마법을 잃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귀족 자녀들이 도전하는 것은, 령사라는 지위에 국빈급의 대접과 어마어마한 명예가 안겨지기 때문이리라.
"시험자님,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수녀를 따라 성당 안쪽으로 들어갔다.
성당 안에는 이미 많은 참가자들이 그려진 마법진에 누워 한참 의식을 치르는 중이었다.
무의식 상태일 텐데도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대는 자가 있는가 하면, 비명을 지르는 자들도 있었다.
"올해는 기록이 다들 저조해요. 빠른 기록을 기대해보겠습니다. 시험자님."
"기록이 좋으면 뭐가 좋나요?"
"빠른 순서대로 10명 안에 들면, 아카데미 측에서 교육에 필요한 자금을 전부 지원해드린답니다."
"전부요…!?"
"네. 그리고, 올해 최고의 기록을 내신다면, 황제 폐하가 직접 령사직을 하사하실 거에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말로는 기대한다고 했으면서, 그녀의 표정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발현에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계시겠죠. 그리고, 성공하더라도.."
"수명의 절반을, 잃게 된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몸속의 령을 강제로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수명이라는 대가가 지불된다.
수명의 절반. 아마 40년쯤 될까?
아깝고 말고도 없다.
어차피 령사가 되지 못하면, 주인공을 구해내지 못할 것이고 세계는 1년 안에 멸망할 테니.
"각오가 되셨다면, 누워주시기 바랍니다."
준비해온 물건들을 각각의 자리에 놓고 누웠다.
수녀는 촛불에 준비해 둔 혈석 가루를 뿌렸고, 내 손바닥을 긋고 피를 모아 마법진에 뿌렸다.
시야가 어둠에 완전히 잠식되면, 의식이 시작된다.
'10명 안에만 들자.. 10명 안에만..'
의식이 사라지기 전, 수녀의 말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령에게 마음을 지배당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눈앞이 완전히 캄캄해지고, 주변이 무섭도록 조용해졌다.
무의식 속으로 들어온 건가?
조용히 눈을 뜨니, 캄캄한 공간 속에 들어와 있다.
잠들기 전 지니고 있던 소지품들은 모두 그대로인 채로, 두 자루의 단검과 석궁은 무사했다.
어둠 속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르르르…'
'저게 내 령인가..?'
통칭 갑주령.
오스테온이라고도 부르는 이것은, 수 세기 전부터 인간의 몸에 깃들어 공생해왔다.
투명한 영혼을 전신 갑주가 뒤덮고 있는, 생명체라 부르기에는 다소 이질적인 형태.
11살 때 윈드가르트의 갑주령을 본 후로는, 다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르르르…!"
어두워서 형태가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거인의 형태인가? 아니면 짐승의 형태인가?
온통 주변이 새까만 탓에, 알 방법이 없다.
울음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눈앞에 시퍼런 두 개의 안광이 보였다.
'저놈이다.'
그것은 무자비하게 달려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달라붙기에 몸을 굴러 피했지만, 옆구리에 깊은 발톱 자국이 새겨졌다.
'더럽게 아프네..!'
발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거인형은 아닌 것 같다.
암흑탄으로 놈을 맞춰볼까 했지만, 시전시간도 기다려주지 않을뿐더러 표적이 어디로 향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결국 신중하게 교전을 하는 것은, 저렇게 재빠른 상대로는 이쪽은 그저 귀찮은 먹잇감이 되어줄 뿐이다.
'여기는 무의식 공간일 뿐이야, 그렇지?'
그렇다면, 팔 하나, 다리 하나 부러진들 뭐가 어떠랴.
달려드는 녀석의 입에, 왼쪽 팔 전체를 목 깊숙이 박아넣었다.
"크르르르르르!"
"아아악….!"
비명이 튀어나올 정도로 아프다.
보통 사람이라면 의식이 날아갈 정도겠지만, 10년간의 도적 생활을 해왔던 나다.
고통에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상태였다.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누르고, 멀쩡한 다른 손으로 단검을 고쳐잡고 녀석의 심장부를 집요하게 찔렀다.
심장부가 푸르게 빛나고 있지만, 꽤 단단한 갑옷 때문에 쉽사리 단검이 박히지 않는다.
"크르르르르!"
심장부에 가해지는 고통에 녀석이 저항하며 나를 떼려 들지만, 그걸 알기에 녀석의 입속에 있는 팔을 더더욱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너보다,, 더한 놈도… 만나봤거든….!"
녀석의 몸에 잔뜩 튄 내 피 덕분에 대강의 형태를 알 수 있었다.
전신이 칠흑 갑주로 뒤덮인 늑대의 형태.
아니, 개인가?
령의 형태는 사람의 무의식이 투영된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았다.
"크릉!'
녀석이 반항하며 발톱으로 내 등줄기를 긁을 때마다, 살가죽이 통째로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동반됐다.
단단한 갑주가 붙은 몇십 킬로 무게의 발톱에 당하는 건, 고통에 익숙한 나라지만 비명을 안지르고는 못 배길 정도다.
"아악….!"
직접 겪어보니, 발현 성공률이 왜 20%에 수령하는지 알 것 같다.
통각도, 감정도 없는 상대와 싸우는 것은 웬만한 각오가 아니고서야 도중에 포기해 버릴 게 뻔하다.
매달린 채로 어찌나 찔러댔는지 단검의 날이 전부 나가서 뭉툭해질 지경이었다.
현실이었다면, 숨이 붙어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몸이 걸레짝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멀어져가는 의식을, 단검을 찔러넣겠다는 집념 하나로 심장부를 두들긴 끝에, 찌그러진 갑주 사이로 새파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승리를 확신하고, 단검을 강하게 내리찍을 때였다.
"크르르르르…..!"
'...어?'
녀석의 시퍼런 눈이 한순간 빛을 발하더니, 시야가 온통 어둠으로 뒤덮였다.
그것은, 마법시전이었다.
암흑계 초급 마법 나이트메어.
상대에게 악몽을 보여 주는 환각계 마법이지만, 보통은 잠들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었다.
'설마, 내가 무의식 상태인 걸 알고..?'
마법을 펼치는 것도 놀라운데, 내 몸이 잠든 상태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나이트메어 주문을 사용한 것이다.
쏟아지는 잡념들에 저항해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
눈을 뜬 곳은, 어느 마차 안이었다.
손발은 모두 쇠고랑으로 제압되어있고, 옆에는 어린 길리언이 보였다.
"사야, 일어났어?"
"길리언? 네가 왜 여기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리, 노예로 팔려 가는 중이었잖아. 하하.."
주변을 둘러보니, 같이 잡힌 수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건 진짜가 아니야, 이건….'
맞은편에서도, 익숙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오. 깨어났구먼. 아직 어린 소녀일 텐데 참 딱하기도 하지.."
이건 현실이 아니다.
"전부 가짜에요! 여긴 악몽 속이라구요!"
"공포에 눈이 멀어 현실감각을 잃은겐가..? 이게 현실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소름 끼칠 정도로 현실 같다.
말발굽 소리, 달랑거리는 쇠고랑 소리, 마차 특유의 눅눅한 짚단냄새까지 전부 진짜 같다.
"전부, 가짜…"
떨고 있는 내 어깨에, 길리언이 붙어온다.
"사야, 괜찮을 거야. 지금까지 어떻게든 해왔잖아?"
"...응."
어라?
그러고 보니, 난 뭘 하다가 잡혀 왔었지?
그래. 그 미친 할망구.
방심하다가 재워지는 바람에, 여기까지 와버렸다.
노인은, 슬픈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헛된 희망은 버리게. 자네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야."
"당신은..?"
노인은 자신이 몇십 년간 노예였던 사실부터, 노예로 잡히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이제 벗어날 수 없다는 암울함에, 작은 희망마저 사라져버린다.
"이제… 평생을 노예로..?"
길리언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처음부터 너 같은 걸 달고 다니지 않았다면.
"너랑 다니지만 않았었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어…"
"사, 사야..?"
그리고 다음 분노는, 자신에게로 향한다.
"주제넘게 방출당하겠거니 해서.. 이런 꼴이나 당하고.."
루나. 너만 아니었다면.
"젊은이."
나를 지켜보던 노인이 말했다.
"공포에 몸을 맡기게. 공포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야. 남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만큼 편한 건 없지."
"…"
현실에서, 도망치라고..?
나는 노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 진짜가 아니지. 그렇지?"
"무슨 소리인가..?"
"당신이 그렇게 말 할 리가 없잖아."
적어도 내가 아는 노인은, 노예로 잡힌 40년의 생활 동안 한 번도 인간성을 버린 적 없는 자였다.
그런 사람이, 현실에서 도망치라고?
그럴 리가 없잖아.
노예에서 해방된 후에도 빼앗긴 40년을 원망하긴커녕, 되찾은 삶에 감사했던 사람이다.
당신은 가짜야.
빠르게 현실감각을 되찾자, 언제 새겨져 있었는지 모를 손등의 문장이 빛나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체형이던 신체도, 어느새 17살에 나이에 맞게 성장해있다.
"두 번이나 신세를 지네요. 당신에게는."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 만난 마차 안에서도, 그리고 이 꿈속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그는 나를 현실로 깨워주었다.
노인은, 말을 멈추고 미소만을 지었다.
‘암흑탄!’
이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문을 시전했다.
작가의 말
암흑탄(물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