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이변 (1)
* * *
따스한 아르모니아의 햇살이 대저택의 창을 통해 흘러들어왔다. 햇살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음에, 은발의 소녀는 기분좋은 잠에서 깨어났다."일어나셨습니까, 아가씨."백발의 잘 차려입은 노신사가 식사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어제는 좋은 꿈을 꿨어요. 프레드.""그런가요. 다행입니다."유리 프리지아. 올해로 11살이 된 그녀는, 끼니도 걸러가며 마법을 공부할만큼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였다.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을 정리하며, 옷 매무새를 다듬는다."그러고보니, 윈드가르트 경의 소식을 가져왔습니다.""윈드가르트 경.. 어떻게 되었나요?""파견지에서 루덴의 범죄 무리를 소탕한 전적을 인정받아, 표창을 받게 되었다는군요."윈드가르트 루아레스.현재 활동하는 령사중에서도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는 사내였다.'언젠가, 겨뤄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훗날 령사로써 그와 겨뤄볼 날을 그리며, 유리 프리지아는 창밖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르모니아 전기] 제 1장 中
루덴숲 옆으로 난 좁은 비탈길.
노예를 잔뜩 실은 마차가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놀란 말들이 히힝 거리며 발굽을 가만 두질 못했다.
“왜 갑자기 멈추고 지랄이야!?”
“앞에 누가 있습니다..!”
“뭐?”
흰 머리색과 대비되는 구릿빛 피부의 근육질 수인 여성이, 귀를 쫑긋거리며 마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신호를 주자, 숨어있던 검은 옷의 수인들이 마차에 달라붙었다.
당황한 노예상이 호위를 내보냈지만, 잘 훈련된 수인들 앞에서 마법 없는 인간들이란 좋은 사냥감일 뿐이었다.
약 5분여 만에, 상황은 종료되고 노예상은 제 발로 나와 바짝 엎드린다.
“사, 살려주십쇼...!”
“살려주라고? 하하하, 웃기는 분일세.”
차가운 눈으로, 쓰레기를 보듯 그를 내려본다.
“너는 네게 살려달라 구걸하는 수인들을, 한 명이라도 살려두었나?”
“.....그, 그건..”
“손을 더럽히기도 싫다. 숲에다 버려.”
질렸다는 듯이, 그녀는 단검에 묻은 피를 털며 돌아섰다.
그때, 엎드린 남자의 소매 밑으로 무언가 빛난다.
“수인 따위가.. 뭐라도 되는 줄 알지!”
남자의 손에 그려진 문양이 빛나려는 순간, 단검 하나가 손목에 박힌다.
“으아아악!”
“허튼 수작 부리니까 그런 거잖아요. 아저씨.”
단검을 꽂은 소녀는, 무심하게 다시 단검을 뽑아내며 말했다.
상황을 파악한 백묘는,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잘했다, 사야.”
기지로 돌아가면서, 귀걸이를 자꾸 만지작거렸다.
얼마 전에 목걸이를 떼서 귀걸이로 달아보았는데, 영 적응이 안된단 말이지.
그때, 백묘 대장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사야, 올해로 몇 살이었지?”
“음.. 11살이네요.”
한 번씩 떠올리지 않으면 몇 살이었는지 가물가물 하다니까.
“그러냐.”
대장이 왜 저러지?
평소답지 않게 무언가 안절부절못한 모습이다.
“그.. 인간이랑 수인은 좀 다르겠지만 말이다. 음..”
네?
“무언가 몸에 변화가 생긴다거나 해서, 고민스러우면 언제든 상담하도록.”
“뭘 말씀하시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거 있잖냐. 네 나이 때쯤, 다들 생기는..”
“...!”
대장, 진심..?
“그런 건, 아직이에요!”
“그러냐? 네 나이쯤 인간들은 다들 손에 문장이 생겨나던데. 좀 늦는 건가.”
“...엥?”
문장?
참, 그랬었지. 문장.
아르모니아의 인간들은 10살 전후로 손에 문장이 생겨난다.
보통 빠르면 9세, 늦으면 11살까지 생기는 게 보통이지만 11살이 됐는데도 도통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간혹, 특이체질 중에는 문장이 발현되지 않는 사례가 있긴 하지만..
'설마.'
쓸데없는 생각은 접어두고, 기지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가방 속을 확인해, 퀘스트 보상으로 받았던 [아르모니아 제국 연혁표]를 펼친다.
182년 2월 17일 화합회 개막
그 부분에 밑줄을 친 뒤, 책을 덮었다.
요즘 들어 부쩍 노예상을 검거하는 횟수가 늘었는데, 그건 내가 연혁표를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라에 축제나 큰 행사가 열리는 것이 예정되어있으면, 자연스레 암시장이 활성화되기 때문에 그 시기를 노리면 노예상들을 잡아낼 수 있다.
물론, 대장은 어떻게 알아내는 거냐고 항상 추궁하지만 감이라며 얼렁뚱땅 넘겨왔다.
"사야, 오늘 좀 늦었네?"
길리언이다.
10세가 된 길리언은, 꽁지머리를 묶고 한 손엔 목발을 들고 다니게 되었다.
"오늘은 저항이 좀 심하더라고. 어차피 잡힐 거면서 왜 그렇게 버둥대나 몰라.."
"최근 사야는 분위기가 좀 바뀌었네. 뭐랄까, 독기가 서려 있달까."
그런가?
눈매가 더럽다는 소릴 자주 들어오긴 했지만.
'음?'
머리를 긁적이는 길리언의 손등에서, 무엇인가가 반짝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길리언이 황급히 손을 뒤로 숨긴다.
"야. 손 이리 가져와 봐."
"왜, 왜 그러는데..!?"
"잔말 말고 빨리!"
그는 도망치려 했지만, 속도 차이 때문에 금방 따라잡혀 제압당했다.
길리언을 바닥 쪽을 보게 눕힌 채로, 그의 손등을 확인했다.
'문장..!'
초록빛으로 빛나는 그것은, 어딜 봐도 문장이었다.
"언제부터 생겼어?"
"..그게, 올해 생일쯤부터.."
"..."
괜히 심술이 나서, 길리언을 밖으로 내보낸다.
"나가. 앞으론 방도 따로 쓰고."
"엑!? 이렇게 갑자기..!?"
문을 닫고, 책을 다시 펼쳤다.
나, 요즘 왜 이러는 거지?
괜한 일에도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거나 한다.
피곤해서 예민해진 걸까.
"...어?"
연혁표를 살피던 중, 심상치 않은 대목을 발견한다.
182년 2월 29일 루덴지역범죄 단속목적 령사 파견
'령사 파견..?'
2주 뒤잖아.
펜으로 표시를 해 두고, 대장에게 보고하기로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앞으로 2주간은 상시 전투태세로 전환해야 할 거다."
아이들과 노인은 굴 깊숙한 곳에 대피시키고, 싸울 수 있는 인원은 상시 무장상태로 대기한다.
순찰조도 두 배로 늘리고.
"그동안은 생산활동은 일체 불가다. 단지 소문만으로 무장태세로 돌리는 건 부담이 너무 커."
"..그렇겠죠."
"그래도, 대비하도록 하지. 네가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대장.."
내가 귀띔을 줬을 때마다 귀신같이 노예상을 검거했던 터라, 대장은 다행히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고 있었다.
"보통 령사를 파견하는 건, 아주 단단히 숙청하겠다는 의미일 텐데."
수인족 입장에서 검은개 도적단은, 노예거래를 근절시키는 고마운 단체일지 몰라도 인간에게는 달랐다.
매년 인간을 습격해 수십 명씩 사상자를 내는 도적 집단일 뿐이다.
"몇 명이나 올까요?"
"한 명."
"...네?"
아무리 그래도, 령사정도되는 자가 혼자서 온다고?
"1대 대장 때도 그랬다. 홀로 찾아와선, 조직 절반을 괴멸시켰지.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치가 떨려."
'그 정도인가..'
령사란, 마법을 사용하는 인간중에서도 최고의 강함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보통 몸속에 잠들어있는 령을, 어떠한 방법으로 강제로 끄집어내 실체화 시켜 싸우게 한다.
강한 만큼 대가는 무시무시했다.
수명의 절반을 령과 나누는 방식이니까.
"그들이 원래는 사르카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업인 건 알고 있겠지."
"네."
"그런 인재를 범죄 단속에 보낸 거니, 가볍게 끝나지는 않을 거다. 그건 그렇고.."
백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최근 너, 좀 예민해지지 않았냐? 그, 사춘기라던가..?"
"아니거든요!?'
"거 봐. 예민하잖아. 푸하하!"
요즘 다들, 왜 이리 나를 못 놀려먹어서 안달이래?
어쨌든, 령사가 오는 건 반쯤 기정사실이었으니 도적단에서는 그에 따른 준비를 시작하기로 했다.
식량은 최대한 아끼고, 전투에 필요한 물자는 아낌없이 쏟아부어 경비를 강화했다.
물자를 나르던 중, 단원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대장 말이야, 그 검은 머리 꼬마한테 너무 관대한 거 아니야?"
"그러게.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령사 하나때문에 이 고생을 시키다니. 참나."
"..."
나를 좋아하지 않는 단원들도 분명히 있다.
모두를 포용하고 갈 수는 없으니까.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고, 또 일수가 흘러서 오늘로 딱 2주째가 되었다.
'어째 불안한데, 너무 평화롭잖아.."
첫날은 긴장을 바짝 세우던 단원들도, 슬슬 지루한지 하품을 연달아 해댄다.
내가 걱정하는걸 대장도 아는 눈치인지, 내 옆에 걸터앉았다.
"불안한가? 아무 일도 없을까 봐?"
"..아무래도, 그렇죠."
"괜찮다. 아무 일도 없는 게 가장 좋은 거니까."
대장도, 항상 자기중심적이던 처음에 비하면 많이 바뀌었다.
"뭐 잘못된 정보였으면, 네 혀를 자르면 되는 게 아니겠어? 하하하."
그러니까 불안하다고.
그때, 순찰조 하나가 밖에서 돌아왔다.
"대장, 밖에서 이런걸 주웠습니다."
"가져와 봐."
단원이 내민 것은, 빨갛고 불투명히 빛나는 돌조각.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혈석…!'
사르카를 죽이면 남겨지는 검붉은 물질이었다.
"이걸 어디서 주웠지?"
"루덴 숲 입구 부근에서 주웠습니다. 하나도 아니고, 바닥에 수십 개는 널려있습니다만.."
"...왔군."
사르카는, 특수한 소재로 제작된 무기로만 퇴치할 수 있다.
한 마리쯤이야 운 좋게 잡아낼 수 있을지 몰라도, 수십 마리를 처치한 흔적이 남았다면 확실했다.
"령사다."
그녀의 명령에 따라 단원들은 일사분란히 움직였다. 설치해놓은 함정을 점검하고, 무기의 날을 교체한다.
"놈은 마법을 사용한다. 놈이 만들어낸 소환수에는 특히 주의하도록. 그 소환수에는 우리 무기가 통하지 않는다."
령사가 불러낸 령, 즉 소환수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사르카의 공격뿐이다. 혹은, 령사가 사용하는 특수 소재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뿐.
우리 수중에 그런 무기가 있을 리는 없으니, 놈이 령을 꺼내기 전에 발을 묶어 순식간에 처리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대장, 누가 이쪽으로 옵니다!"
"전원, 모습을 숨겨라!"
올 것이 왔다.
멀리서부터, 하얀 갑주로 전신을 무장한 누군가가 롱소드를 들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얼핏 보아 30대 정도로 보이는 금발의 남성이었다.
그는 우리가 설치해 둔 함정 쪽으로 곧장 걸어온다.
'밟는 건가..?'
그가 함정을 향해 첫 발을 내디뎌, 그것을 밟는다.
"지금이다, 발사!"
그가 밟은 지면이 무너짐과 동시에, 무수한 화살이 동시에 그에게 날아든다.
그물이며, 통나무며 사람을 죽이기 위한 모든 함정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빗발쳤다.
"환영이 격렬하군."
그의 손짓에, 몸 주변에서 한차례 강풍이 뻗어 나갔다.
순간적이지만 압도적인 압력에, 날아온 화살과 발동된 함정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버린다.
바람의 여파는, 단원들에게까지 뻗어 나간다.
"으악..!?"
'몸이 날아갈 뻔 했어…!'
바람 마법 한 번에, 종일 준비했던 기습작전이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비겁하구나. 여럿이서 하나를 노리다니!"
정확히 나눈 가르마.
정의감에 활활 타는 초록빛 눈.
그는 숨어있는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놈이 령을 꺼내기 전에 쳐라!"
백묘가 먼저 칼을 빼고 달려들었고, 사방에서 단원들 또한 그에게 향했다.
"최근 숲 부근에서 마차를 습격하는 도적놈들이 있었다는데, 네 녀석들인가!"
그의 힘은 가히 압도적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가벼운 휘두름 한 번에, 마치 검기라도 나간 듯 단원들이 튕겨져 나갔고, 그나마 버텨낸 수인들에겐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라붙어 검을 휘둘렀다.
횡 베기 두어 번에, 수인들이 무자비하게 썰려 나간다.
'이게, 령사..?'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이, 이런 무시무시한 괴물이라니.
단검을 지면에 꽂아 날아가지 않도록 버티고 있을 때, 인기척이 내 뒤로 느껴졌다.
"너는.. 인간이냐?"
"…!?"
그에게 후드의 끝자락을 잡힌 채, 들어 올려 진다.
끝났다.
나, 이렇게 죽는 건가…?
"노예로 잡힌 모양이군. 딱하게도.."
노예..?
그는 나를 적으로 보고 있지 않다.
나는 최대한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붙잡혀 있었어요…. 구해주세요..!"
그는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들킨 건가..?
"....아아."
그는, 갑자기 눈물을 훔쳤다.
"아아.. 이 어찌나 가녀린 소녀란 말인가. 필시 이 짐승 놈들에게 잡혀 강제로 칼을 들게 되었겠지. 잔악무도한 놈들…!"
어린 여자애 모습이, 이럴 땐 참 도움이 된단 말이지.
그의 문장이 강하게 빛나며, 바람이 한층 거세진다.
"모두 남김없이 썰어주마."
...어라?
거짓말이 먹혀든 걸 넘어서, 무언가를 각성시켜버렸다.
"한시 빨리 이 지옥에서 구해주겠다. 조금만 버티도록!"
정말로 단단히 오해한 모양인지, 그는 나를 어깨에 들쳐메곤 한 손으로 싸움에 임했다.
'무슨 힘이 이렇게 세…!?'
대장만큼은 아니지만, 대단한 힘이다.
내가 그에게 꽉 잡힌 팔을 빼보려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꿈쩍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기껏 기회가 생겼는데.
손에 단검이 들려있건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는 한 손임에도 밀리기는 커녕, 오히려 정의감에 불타는 게 전투력을 올렸는지 우리 쪽 단원들의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소환에 임해라, 클라니아!"
그가 외치자, 한순간 몸이 빛나면서 무언가 발현됐다.
투명한 전신을 갑주로 뒤덮은, 마치 유령에 갑옷을 덧댄 모양새의 소환수가 무지막지한 바람을 뿜으며 울부짖었다.
하나도 상대하기 힘들었던 상대가 둘이 되니, 우리 쪽이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한다.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와중에도, 바람을 버텨낸 사람이 있었다.
백묘는,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을 노려 뛰어들었다.
솔직한 감상으로, 이 자의 반사신경은 대장과 동일하거나 그와 웃도는 정도다.
만약 대장의 공격이 먹혀든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급소를 피해낼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한방을 노리자.
‘미안, 대장..!’
나는 그에게 들쳐메진 상태로, 크게 외쳤다.
"령사님, 뒤에요!"
"…!"
황급히 뒤를 돌아본 령사가, 칼을 휘둘러 그녀를 튕겨냈다.
"클라니아, 저 자를 붙잡아라!'
남자의 명에 소환수가 점멸하듯 백묘의 뒤에서 나타나 그녀의 몸을 제압했다.
의문과 분노에 가득 찬 그녀의 눈빛이, 나를 노려본다.
"사야, 이게 무슨 짓이냐..!"
나는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령사에게 말했다.
"...령사님. 저를 잠시 내려주시겠어요?"
잠시 그녀와 나를 번갈아 본 령사는, 나를 어깨에서 내려주었다.
"저자는, 령사가 되고 싶다던 저를 꼬드겨 5년 동안이나 노예 생활을 시켜왔어요.."
"뭐…?"
한차례 정적.
다른 단원들은 이미 전투불능이거나, 싸울 의지를 잃은 상태였다.
토막난 시체들만이, 시야에서 굴러다닌다.
"듣자 하니 소녀여, 령사가 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그가 내게 물어왔다.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령사가 되기를 꿈꿔왔어요. 저 같은 미천한 신분도, 당신 같은 령사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정의의 길을 추구하는데 신분의 높고 낮음따위는 없다. 나를 따라 수도로 향한다면, 자네의 입학을 보장하지."
...잠깐.
입학을, 보장한다고?
"..정말인가요?"
"물론. 난 한번 뱉은 말은 번복하지 않는다."
이 자를 따라가면, 령사 아카데미의 입학이 보장된다.
전생한 지 11년.
그곳만 바라보고 삶을 버텨온 내게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제안이다.
"자네가 지금껏 어떤 길을 걸어왔던 간에, 바뀌고자 하는 뜻만 있다면 그것에 대해 묻지 않겠네. 자네에겐 재능이 있어 보여."
나에게서, 재능이..
"그럼, 우선 이 악의 무리들부터 제거하도록 할까."
남자는, 제압당한 백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는, 롱소드를 쥐어 준비 자세를 취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수인?"
그녀를 향해, 남자의 칼날이 들어 올려 졌다.
"..."
백묘는 말없이,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인간을 죽이는 것도 모자라, 어린것들을 납치해 노예로 부리기까지 하다니.
령사, 윈드가르트의 이름으로 널 심판해주마!"
한차례, 바람 소리만이 들렸다.
령사도, 백묘도 모두 숨을 멈췄다.
목을 타고 흐르는 시뻘건 선혈이, 칼날을 타고 뚝뚝 흘렀다.
"...어, 째서…?"
칼날을 박힌 쪽은, 백묘가 아닌 령사였다.
령사의 목 부근으로, 단검이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미안해요."
"..어째서.. 수인 따위의 편을…?"
단검을 쥔 내 손목을 타고, 뜨거운 피가 흘러내린다.
몇 년간의 암살 경험으로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이 부분을 노려진다면, 사람은 죽는다.
입에서 선혈을 잔뜩 흘리는 채로, 그가 떨어가며 말했다.
"..너는…. 그들에게…. 잡혀있던게…. 아닌가..?"
"..."
아무 말 없이, 박힌 단검에 힘을 주어 목을 그어냈다.
그는 목을 잡고 무릎을 꿇었고, 백묘를 잡고 있던 소환수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아니었..나..보군..”
그는 쓰러지기 전, 마지막 말을 쥐어 짜낸다.
"그러..나...령사가.. 되고 싶단..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그렇지 않는..가?..."
“...”
눈을 뜬 채로, 그의 호흡이 정지했다.
소환수가 사라진 자리에는 새하얀 구슬 하나가 떨어졌다.
그를 죽인 건 쓸데없이 강한 정의감.
인간이, 결코 수인 편에 들 리 없다는 편협한 사고는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
그가 죽고 나서도,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그는…. 악인이었나?'
도적단에 들어오고 나서, 수없이 많은 자들의 목숨을 거뒀다.
그때마다 들어오는 죄악감을 억누르기 위해, 악인을 죽인 것이라 굳게 믿으며 버텨왔다.
그런데 이자는,
악인인가?
비록 나의 거짓말이긴 했으나, 그걸 전적으로 믿고 1대 다수의 전투 속에서도 나라는 소녀를 구해내려 했던 자였다.
"시체는 우리가 수습하마. 충분히 쉬어둬라, 사야."
"...."
그의 피가 묻은 단검을, 손에서 떨궈냈다.
"..고민했어요."
단검은 바닥의 흥건한 피 웅덩이 속에서, 점차 피에 잠식되어간다.
"..이 자가 저한테 제안했을 때, 고민했어요...'
대장의 목숨이 달려있었건만, 그가 롱소드를 들기 직전까지 망설이지 않았다고는 못한다.
나는, 결국 그런 인간이었다.
"그러냐."
무릎 꿇은 내 어깨 위로, 대장의 손이 올려졌다.
"..다시한번, 우릴 선택해줘서 고맙다."
차라리, 원망해주었으면 했건만.
어째서인지 대장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자비로웠다.
전투가 끝나고, 피해를 확인했다.
전투원 37명 중, 12명이 사망, 나머지 전원이 부상으로, 그가 내 손에 죽지 않았다면 전멸까지도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원 한 명이, 그의 시체에서 무언가를 수습했다.
"인식표 같습니다. 대장."
"그래? 뭐라고 쓰여있지?"
"령사, 윈드가르트 루아레스."
윈드가르트.. 루아레스?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왜 그러지, 사야?"
"....."
나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는
6년 뒤 아카데미에서 많은 이의 존경을 받으며 령사를 양성하게 되는,
령사 아카데미 수석 전투 교관.
윈드가르트 루아레스였다.
따스한 아르모니아의 햇살이 대저택의 창을 통해 흘러들어왔다. 햇살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음에, 은발의 소녀는 기분좋은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셨습니까, 아가씨."
백발의 잘 차려입은 노신사가 식사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제는 좋은 꿈을 꿨어요. 프레드."
"그런가요. 다행입니다."
유리 프리지아. 올해로 11살이 된 그녀는, 끼니도 걸러가며 마법을 공부할만큼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을 정리하며, 옷 매무새를 다듬는다.
"그러고보니, 윈드가르트 경의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윈드가르트 경.. 어떻게 되었나요?"
그의 온화하던 표정이, 한 차례 구겨졌다.
"그것이, 파견지에서 실종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처럼 강인한 자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은..”
윈드가르트 루아레스.
현재 활동하는 령사중에서도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는 사내였다.
그런 그가, 설마 루덴 근방에서..
“어찌 된 일인지, 더 자세히 알아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훗날 령사로써 그와 겨뤄볼 날을 그렸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그가 그저 살아있기라도 바래야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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