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눈밭에서
* * *
백묘를 따라 눈밭에 찍힌 발자국을 보며 달렸다.
만약 인간이 들어온 거라면, 어떻게 한 거지?
“이 숲은 사르카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할 텐데, 어떻게 들어왔을까요?”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은 냄새가 흩어져. 그런 날에 수인을 노리고 들어오는 인간들이 몇 있다.”
지독한 놈들일세.
만약 예전에 노예로 잡혀가고 있을 때, 비라도 왔다면 진짜로 개죽음 당했을 거다.
“순찰조가 보인다! 따라붙어!”
그녀를 따라 도착하니, 순찰조 여럿이 남자 둘을 둘러싸고 있는 게 보였다.
묘아를 한 손에 잡은 채로, 이쪽을 향해서 단검을 휘둘러댄다.
“오기만 해봐, 이 계집은 죽는다!”
“읍, 으읍…!”
묘아가 나를 보더니, 무언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입이 막혀있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다.
"아이를 놔주면 그냥 보내주마, 이리 보내!”
“그걸 믿겠냐? 그리고 빈손으로 돌아가서 개죽음당하라고? 그럴 바엔 여기서 죽지!”
그는 묘아의 목 부근에 단검의 끝을 약간 찔러넣어, 피를 조금 흘리게 했다.
“으읍….!!”
“안비키면 깊이 찔러넣을 거다. 빨리 비켜!”
백묘도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쪽에서 함부로 접근했다간, 묘아의 목숨이 위험하다.
“네 녀석들은 긍지도 없는 거냐, 더러운 새끼들..!”
“긍지고 뭐고, 우린 이런 게 아니면 먹고 살 방법이 없다고!”
한 걸음씩, 괴한들이 멀어지기 시작한다.
“거기서 한걸음이라도 움직였단 봐, 이 아이 목에 칼들어갈테니까.”
“이런, 시발..”
백묘도, 부하들도 욕을 하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정적 속에서, 묘아가 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결국,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할까요.”
“엉?”
“노예 하나로는 둘이서 나누기엔 보수가 너무 짜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옆에 있던 백묘가 나를 본다.
“지금 뭐 하는 거냐, 인간.”
“저랑 결투하죠. 만약 제가 지면, 저까지 노예로 데려가세요. 대신 제가 이긴다면 그 아일 풀어주고요.”
“....”
괴한들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고민하고 있는건가?
그렇다면..
“설마, 저같은 어린 여자애한테 싸움을 질 것 같다든지 그런 건 아니겠죠?”
일단 질렀다.
딱 봐도 승리가 확실한 승부를 거절하진 않겠지.
“..뭐, 좋아. 대신 수인 놈들 동의도 확실하게 받아내야겠다.”
“받아들일 거죠, 대장?”
“이 자식이 멋대로..”
백묘는 한숨을 쉬더니, 내 등을 밀었다.
“가르쳐준 걸 잘 활용해라. 넌 내 공격도 피한 녀석이니까, 잡히지만 않으면 가능성이 있어.”
백묘가 괴한들에게 선언했다.
“좋다. 네놈들이 이기면 이 꼬마까지 데려가. 우린 일절 관여하지 않으마. 물론, 진다면야 얘기가 다르지만.”
싸움 중에 묘아를 구출할 기회가 있다면 좋겠지만, 여전히 묘아는 다른 한 명의 괴한이 붙들고 있다.
“맨손 싸움이 규칙이다. 칼은 금지야.”
“크하핫! 멍청한 꼬맹이 때문에 돈 좀 만지겠구나!”
나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괴한과 마주 섰다.
'대장 말대로, 잡히면 그걸로 끝이다.'
상대는 건장한 성인 남성. 대장보다 훨씬 약하다고는 해도, 체격 차이에서 오는 힘과 압력은 무시할 수가 없다.
내가 먼저 그에게 달려들었고, 그는 여전히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가까워지자 그는 양팔로 나를 잡아채려 시도한다.
내가 몇번이고 가볍게 피해내자, 열이 받은 듯 마구 공격을 날리기 시작했다.
"망할 꼬맹이, 뭐가 이리 잽싸!?"
"..."
강한 주먹이긴 하지만, 백묘의 것에 비하면 몇대정도는 맞아도 어찌 버틸만한 수준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 공격이 먹히지 않으면 결착이 나지 않는다는 건데..
큰맘 먹고, 주먹을 날리느라 몸을 숙인 괴한의 안면에 니킥을 꽂아 넣었다.
"큭…!"
무게감은 부족했지만, 코에 명중했는지, 그가 피가 줄줄 새는 코를 부여잡았다.
"장단 좀 맞춰주니까, 썩을 계집이…!"
열이 뻗칠 대로 뻗친 그가, 약속을 어기고 단검을 꺼내 들었다.
주변에서 말릴 틈도 없이 그대로 나에게 돌진해온다.
'그 방법밖에 없네.'
진짜 최후의, 최후의 수단으로 쓰려고 했던 기술을 사용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분노에 가득 차 다가오는 괴한의 얼굴을 향해, 눈더미를 한가득 흩뿌렸다.
그가 욕을 뱉으며 얼굴을 닦는다.
지금이 기회다.
'비기, 쌍환분쇄권!(?????)'
그의 바지 앞섬을 향해서, 정직한 정권을 질렀다.
물컹하고 묵직한 감각이 느껴지며, 왜인지 나 또한 아픔이 느껴진다.
"커…. 커헉…. 끄읍…."
그가 무릎을 꿇음으로써, 결투는 결착 났다.
미안합니다.
그쪽이 먼저 반칙했잖아요..?
내 머리 위로, 백묘의 손이 턱 하고 올라왔다.
"..잘했다."
대장, 칭찬할 줄도 아시는구나. 처음이다.
괴한들은 약속대로 묘아를 놓아주었고, 다행히 묘아는 큰 상처 없이 내 품에 돌아왔다.
백묘 대장이 다른 괴한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누가 고용했지? 바른대로 말하면 보내주겠다."
"툴리우스 남작입니다! 그가 어린 수인족 여자아이를 원했기에.."
"노예를 원하면 노예상에 가면 되잖느냐!"
"그, 그가 깨끗한 물건이 좋다고 하여.."
백묘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최고로 무서운 표정이었다.
"저택이 있는 곳을 말해라."
잠자는 짐승을 건드린 대가는 컸다.
그날 밤, 백묘는 부하들을 풀어 저택에 잠입했다.
호위들은 살가죽조차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였고, 남작은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붓기 때문에 얼굴이 거의 다른 사람이 되어 도적단에 실려 왔다.
"흑견, 모두가 먹을 양의 술과 고기를 준비해다오."
백묘가 피를 닦으며 말했다.
"백묘님. 잔치는 경사 때만 하는 거 아니에요?"
"전부 무사했으니 경사다. 그게 가장 중요해."
걸레짝이 된 남작을 기둥에 묶어둔 채, 모두 웃고 떠들며 즐겼다. 나도 길리언과 아이들이랑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백묘가 내 옆에 걸터앉았다.
"한잔 할 테냐?"
"아뇨, 전 아직 꼬맹이라.."
전생에서는 아주 간이 달아져라 퍼마셨지만.
"사양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 같은 날은 한잔 정도는 괜찮아."
"..그럼, 한잔 정도만 마실게요."
그릇에 담긴 술을, 조심스레 입에 가져다 댔다.
'맛있어..!'
생각해보니, 술을 마신 게 대체 몇 년 만이지?
전생 이후로는 술맛을 아주 까맣게 잊고지냈다.
"괜찮으냐? 한잔 더 들래?"
"그럼, 한 잔만 더.."
물론,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거란 걸 내심 알 것 같았다.
대장과 둘이서 거의 세 병째를 비웠던가, 혀가 잔뜩 꼬인 그녀가 내게 푸념하기 시작한다.
"사야, 너는 신이 있다고 믿느냐?'
"신이요?"
"그래. 나는 없다고 본다. 신이 있다면, 수인에게만 이렇게 박한 세상으로 만들지 않았을 꺼 아니야!"
백묘가 탁자를 쾅, 내려치자 올려져 있던 접시가 전부 뒤집어진다.
"세상을 만든 놈이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나랑 마주치기만 해봐. 아주 내장이 튀어나오도록 두들겨 패줄라니까…"
"하하."
죄송합니다. 저에요.
"그나저나, 오늘은 용케도 그 상황에 결투를 걸 생각을 했더구나."
"묘아를 구하고 싶어서 그만.."
그건 확실히 도박이었다.
"어쨌거나, 넌 동료를 위해 위험을 감수했다. 고맙군."
술에 취해 계속 헤실거리던 그녀의 얼굴이, 이번엔 사뭇 진지했다.
"사야. 도적단에 들어오고 싶다고 했나?"
"..네!"
"...좋다.'
그렇게 완고했던 사람이, 무슨 일이지?
"다만, 각오를 보여야 한다."
'각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작이 묶여있던 기둥으로 향했다.
"모두 주목! 여길 봐주면 고맙겠다."
백묘의 말에, 모두 술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집중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이 귀족 자식은 명백한 악인이다. 귀족의 신분을 내세워 수인 여자아이를 수없이 겁탈했고, 부모는 짐승 먹이로 내던져 구경하는 쓰레기 중에 쓰레기지.
주변의 야유가 시작됐다. 몇몇 거친 부하들은 술에 취한채 분노에 가득 차 서로 그를 죽이겠다며 난리였다.
"네 녀석, 그딴 짓거리를 하고서도 떳떳이 살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그녀의 단검이 슥 남자의 목덜미를 스친다.
"히…. 히익..! 히끅…! 사, 살려만 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야, 전 재산은 물론이고.."
"그깟 재산, 전부 갖고 지옥에나 떨어지시지."
대장의 눈빛은 진짜였다.
이자는 죽는다.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살기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오늘 넌 내 손에 죽는 게 아니다."
그녀는 칼을 거두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내 앞으로.
"...?"
그녀는 내 손을 확 끌어당겨 칼을 쥐여준다.
"네 각오를 보여주어라. 사야."
그녀는 이 칼로, 내게 사람을 죽일 것을 명하고 있었다.
‘내가, 사람을..?’
칼을 들고, 남작의 앞에 섰다.
칼을 한번 보고, 남자를 한번 보았다.
그는 명백한 쓰레기다.
여기서 내가 목숨을 끊어놓으면, 오히려 세상이 깨끗해지는 데 도움이 될 거다.
수많은 수인, 그리고 노예들이 이 자의 쾌락만을 위해 희생되고 고통받았다.
만약 묘아를 구하지 못했다면, 그녀 또한 이자에게 무슨 짓을 당했을지 모른다.
어차피 악인이었다.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쉽게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칼날을 그의 목에 가져다 댔다.
“허억, 허억….”
남자의 숨소리가, 유독 크게 머릿속을 맴돌며 괴롭힌다.
“살려…. 주세..”
도적단 가입까지, 이제 마지막 관문만이 남은 상태였다.
이를 꽉 물고, 칼을 고쳐잡았다.
남자의 목에 칼날을 쑤셔 넣으려던 그때,
서걱.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단검이 남자의 목을 무자비하게 갈랐다.
백묘였다.
“....실전에서는 망설이지 마라. 사야.”
“....”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망했다.
그 일이 있은 뒤, 벌써 일주일째 대장이 말이 없다.
나는 왜 바보같이 그때 망설인 거지?
겉으로는 험한 꼴 못 당할 꼴 다 겪어본 척해도, 막상 사람의 목숨이 손에 쥐어지니 무서웠다.
이걸로, 퀘스트 완료는 물 건너 간 걸까.
“사야님. 잠깐 이리로 와보시겠어요?”
흑견씨였다.
“무슨 일 있나요?”
그녀를 따라가는 중, 갑작스레 작은 방으로 밀쳐진다.
“우왓, 왜 그래요?!”
“갈아입고 나오세요, 꼭이요!”
갈아입어? 뭘?
방을 둘러보니, 처음 보는 옷 한 벌이 걸려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더듬어가며 열심히 입어본다.
…
흑견씨의 말씀대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흑견씨, 이게 다 뭐..”
“검은개 도적단원이 되신 걸 환영해요, 사야 님!”
도적단원부터, 어린아이들까지.
모두가 모여 있었다.
나, 단원으로 인정받은 건가..?
“저, 진짜로 도적단원이 되는거에요, 인간인데?”
“대장이 허락했으니까, 문제없어요.”
단원복을 입고 있음에도, 쉽사리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진짜로 단원이 되다니.
“맞는 사이즈가 없어서 새로 재단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다구요.”
“흑견씨가 만드신 거에요?”
“아뇨, 길리언님이 옆에서 도와주셨어요. 사야님의 체형을 거의 외우고 계시던데요?”
“앗, 흑견씨, 그건 말씀하지 마세요…!”
길리언이 내 체형을 외우고 있었다고..?
..아니, 그건 크게 신경 쓰지 말자.
“다들 고마워요. 그런데, 대장님은 안보이네요?”
어딜 가셨지. 제일 있어야 할 사람이?
“백묘님은 낯간지럽다고 안 오신다네요. 별나죠?”
“대장답네요.”
나를 피하려던 백묘의 노력이 무색하게, 식당에서 잔치가 열리자마자 그녀는 술 마시러 등장했다.
퀘스트니, 아카데미니, 전부 신경끄고 오늘은 만큼은 좀 놀아둬도 좋지 않을까.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가족이란 게 생긴 기분이다.
[ 서브 퀘스트 : 검은개 도적단에 가입하기 ]
달성도 : 100%
보상 : [아르모니아 연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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