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51화 (완결) (151/151)

151화

-긴긴 투쟁 끝에 저 극악무도하며 잔악한 마드무트를 해치우시니, 비로소 아스빌람과 저 먼 이계(異界)에 진정한 평화가 드리워졌다. (중략) …신 아스빌람의 1대 로드이시자 가장 찬란한 별, 제왕 고병갑께서는 범접할 수 없는 기적을 부려 역전의 용사들을 부활시키셨다. 그리고 그들을 앞에 두고 다음과 같이 아뢰셨다. 이젠 피 흘릴 일도, 피 흘리게 할 일도 없을지어다. 만백성을 자신의 품에 품을지니,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웃으며 살아가자.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프지 않고 미워하지 않는 세상이 아니겠느냐. 짐은 너희와 함께 그런 세상을 이룩하고 싶다. (중략) …신 아스빌람은 먼 옛날의 위상을 되찾았다. 모두가 성실히 일하고, 배불리 밥 먹고, 등 따습게 잠을 잔다. 훗날 선왕께서 자리에서 물러나시며 물으셨다. 내 삶이, 노고가 헛되지 않았느냐? 그러자 지상을 딛고 사는 모든 이가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로드께서는 가장 밝게 빛나셨습니다. 다시 선왕께서 아뢰셨다. 내가 죽거든 작은 비석과 짤막한 글귀 하나만 남겨다오. 고블린이 아니면서 고블린 로드인 어느 남자가 이곳 땅을 일구고 이곳 물을 마시며 살아갔노라고. (중략) …많은 시간이 흐르고 그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뀌었다. 다만 하나, 영원토록 변치 않는 사실이 있노니, 그것은 바로 그분이 우리 모두의 왕이셨다는 것이다. 나와 동족들. 덧붙여 이 땅을 딛고 사는 수많은 아인. 그분은 그들 모두의 왕이셨고 가장 위대한 왕이셨다. 미숙한 필자가 그분의 광명을 기록함에 영광을 느낀다.

대현자 도르마의 저서 “가장 위대한 왕” 중 일부 발췌.

* * *

전쟁이 끝났다.

전투는 언제나 흔적을 남긴다. 그것들은 크고 작은 상처가 되어 많은 사람의 가슴을 후볐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기보단 조금씩이나마 전진하기를 택했다.

대한민국 서울.

한때 한반도에서 가장 번영했던 도시는 빛을 잃은 지 꽤 됐다. 하나 그것이 영원한 암전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가지 곳곳을 밝히는 불빛은 언젠가 이곳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리란 걸 암시하는 듯했다.

무너진 건물 잔해, 길가에 자욱한 시체. 이제 그런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살아남은 이들이 피땀 흘려 가며 수고한 덕분이다.

“아! 선경 씨, 오셨어예? 먼 길 갔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심더.”

“에이, 뭘 또 고생이에요. 여긴 별일 없었죠?”

“별일이 어디 있겠심꺼? 다 평소랑 같지예. 그나저나 일은 어떻게 됐심니꺼? 연락을 듣긴 했는데 잘 해결된 겁니꺼?”

“잘되긴 했는데요. 시발 코쟁이 새끼들, 여간 깐깐―”

“잘 합의됐습니다.”

뒤이어 들어온 심승섭이 외투를 벗으며 말했다. 한창훈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승섭 씨도 어서 오이소. 고생하셨심더.”

“향후 13년간 원조를 약속받았습니다. 이르면 다음 주부터 인력이 투입될 거예요. 앞으로 몇 년 후면 서울과 부산, 그 일대를 제외한 도시들도 예년 모습을 회복하겠죠.”

“이야! 잘됐네예!”

“으아…….”

정선경이 소파에 늘어지듯 앉아 기지개를 켰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다.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커다란 유리창. 고층 빌딩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모습은 여전히 큰 상처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4년 전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한창훈과 심승섭도 착석했다.

“많이 좋아졌지예? 4년 전만 해도 폐허나 다름없었는데 말입니더.”

“그럼 나아져야죠. 밤낮없이 뺑이를 쳐 대는데 그대로이면 졸라게 비합리적인 거지.”

“하하…….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심꺼.”

심승섭도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이는 서울 야경을 눈에 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 그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전부 그 사람 덕분이죠.”

“누구 말입니까? …아, 병갑 씨예?”

“네. 그 사람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겁니다.”

“하기야. 병갑 씨가 마지막까지 큰일을 해 주셨지예.”

한창훈은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4년 전의 그날이었다.

한창훈은 죽었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죽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떠한 전조도 없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죽음에서 돌아온 한창훈이 처음 본 장면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빛 덩어리였다. 그 광경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아직도 뇌리 한편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빛 덩어리는 죽은 이들의 육신에 스며들었고, 그들은 예외 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사람들을 되살린 이는 고병갑이었다. 덧붙여 그가 최후의 적인 고건룡을 무찌르고 전쟁을 종결시켰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것만 해도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이다. 하나 고병갑은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어 갔다.

전쟁이 종결되고 1년. 고병갑은 서시희와 함께 전 세계를 쏘다녔다. 그들은 각국 정상을 만나 모종의 거래를 하였는데, 훗날 서시희에게 전해 듣기로 고병갑이 전 세계에 포진한 몬스터를 전부 처리해 주었다고 한다. 그 대가로 한국은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고병갑이 세계 각국에서 얻어 온 물자와 인력은 재기의 발판이 되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여러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까닭도 고병갑의 공이 컸다.

그가 무슨 요술을 부려 몬스터들을 거두어들였는지는 미지수다. 어쨌든 그 덕분에 적어도 몬스터 때문에 죽을 일은 없어졌다.

그 이후 고병갑은 제 과업을 모두 마쳤다는 양 유유히 떠나 버렸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말만 남기고 말이다.

서시희는 여전히 세계를 돌아다니며 한국의 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에 얻어 낸 EU의 협약 역시 그녀가 따낸 것이었다.

“아, 거참. 그 자식 얘기는 또 뭣 하러 해요? 이미 가 버린 사람 얘기를.”

다시 현재.

고병갑이 거론되자 정선경은 심기가 불편한지 미간을 찌푸렸다. 심승섭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한창훈은 멋쩍은 듯 웃었다.

한창훈이 심승섭 쪽을 보며 작게 소곤거렸다.

“보고 싶어서 저카는 겁니더. 신경 쓰지 마이소.”

“뭐요? 보고 싶긴 누가 보고 싶다 그래요!”

“앗! 드, 들렸십니꺼?”

“당연히 들리죠! 내가 무슨 귀머거린 줄 알아요?”

정선경은 담배를 꼬나문 채 한참이나 한창훈을 째려보았다. 한창훈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허허실실 웃기만 할 뿐이었다.

정선경이 획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서울 야경을 눈에 담았다. 그녀의 입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쁜 놈…….”

한창훈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서운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애틋한 그리움 역시 느낄 수 있었다.

고병갑이 훌쩍 떠나 버린 지 어느덧 3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리고 야속함을 느끼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한창훈은 시선을 조금 내리깔고 꼼지락대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

“보고 싶네예, 병갑 씨. 잘 지내고 있겠지예? 어디 아픈 데는 없을라나 걱정되네예.”

“하이고. 누가 누굴 걱정해요? 걔는 말만 하면 떠받들어 주는 수발이 수천 개인데. …얼마나 좋으면 코빼기 한 번 안 비치겠냐 이 말이에요.”

“에이, 바빠서 그러겠지예.”

“흥! 누군 안 바빠요?”

정선경은 한껏 뾰로통해진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사무실을 나서는 그녀를 보며 한창훈이 물었다.

“어어? 선경 씨, 고마 들어가실라고요?”

“가긴 어딜 가요. 할 일이 산더미인데.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아, 예. 갔다 오이소.”

정선경이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한 계단 올라 옥상에 당도한 그녀는 품에서 담뱃갑 하나를 꺼냈다.

무척이나 낡고 해진 것이었다. 안에는 한껏 짓이겨진 담배 3개비가 간신히 형태를 유지한 채 담겨 있었다.

그녀가 컴컴한 하늘에 헌 담뱃갑을 비추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담뱃갑을 응시했다. 눈빛에 어린 감정은 때때로 변했다. 그리움, 원망, 애틋함, 분노.

이윽고 처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초겨울 공기를 적셨다.

“망할 자식, 그렇게 바쁘냐? 얼굴 한 번 보러 올 시간도 없는 게 말이 돼? 너는 진짜… 못됐어. 못됐다고…….”

슬슬 차가워지는 바람이 그녀의 콧잔등을 훑었다. 고병갑. 그도 자신과 같은 바람을 맞고 있을까? 모를 일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많이 보고 싶은가 보죠?”

“우왁 깜짝이야! …시, 시희 언니?”

음영이 진 곳에서 걸어 나온 사람은 서시희였다. 정선경은 기겁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 언제 왔어요? 연락도 없이.”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요. 뭐, 이런 식으로 놀래킬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이죠.”

“귀신이라도 튀어나온 줄 알았다고요.”

정선경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서시희는 그 모습을 보며 쿡쿡 웃었다.

“병갑 씨를 생각하고 있었나 봐요?”

“무, 무슨 소리예요! 그 자식, 이제 생각도 안 나거든요?”

“흐음. 그래요? 병갑 씨는 여러분을 많이 그리워하던데.”

“정말요? 벼, 병갑이가 언니를 찾아왔어요?”

“아뇨. 내가 만나러 갔죠. 한 석 달 전쯤인가.”

정선경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이윽고 깨닫게 되었다. 아스빌람에 갈 수 있는 사람이 고병갑 외에 한 명 더 있음을.

“…병갑이, 그 망할 놈은 잘 지내고 있대요?”

“정신없어 보이더라고요. 여기만큼 그쪽도 바쁜 모양이니까요.”

“아… 네. 바쁘…겠죠. 응…….”

정선경이 꽉 쥔 담뱃갑을 품에 집어넣었다. 작게 미소 띤 서시희가 저쪽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보러 갈래요?”

“네?”

서시희가 손을 까닥였다. 그러자 허공이 갈라지며 포탈이 만들어졌다. 그 안쪽이 비추는 것은 지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의 세계였다.

“병갑 씨 말이에요. 보러 가지 않겠… 음?”

말릴 틈도 없이 정선경은 포탈에 몸을 던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본 서시희는 아련히 웃었다.

* * *

해가 슬슬 저물어 가는 느지막한 오후. 고병갑은 팔짱을 낀 채 넓은 들판을 눈에 담았다.

마냥 평평하기만 한 들판이 아니었다. 둥글게 쌓아 올린 무덤이 족히 2,000개는 되었다. 가장 앞에는 여느 무덤보다 10배는 커다란 릉(陵)이 있었다. 릉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제왕 랜드리올, 이곳에 잠들다.

그 옆으로 작은 묘가 하나 더 있다. 사라온의 여기사, 메리린의 것이었다.

「로드시여! 마지막 한 구까지 모두 매장했습니다!」

「어, 고붕아. 그래, 고생 많았다.」

「하핫! 아닙니다!」

고붕이는 밝게 웃으며 코를 쓱쓱 문질렀다. 고병갑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다가 담뱃갑이 허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중에 서시희가 찾아오거든 담배 좀 구해 달라고 해야 할 성싶었다.

「애들 집합시키고 돌아갈 준비 해.」

「옙! 모두 모여라!」

고붕이가 힘차게 소리치자 일꾼으로 따라온 이들이 모여들었다. 개중에는 고블린도 있었고, 인간도 있었으며, 요정이나 수인 같은 아인 역시 있었다.

고병갑은 인원들을 집결시킨 뒤 잠시 묘지 앞으로 갔다.

이곳은 베르보니아. 옛 아스빌람의 수도이다. 불룩하게 솟아오른 묘지는 모두 옛 사라온들의 것이었다.

고병갑은 과거 다짐했던 대로 다시 베르보니아를 찾았다. 그리고 죽은 사라온들을 땅에 묻어 주었다. 그 수가 워낙 많아 보름을 꼬박 작업해야 했다.

이게 뭔 고생인가 싶기도 했지만, 일을 끝마치니 지난날의 노고는 눈 녹듯 사라지고 뿌듯함만 남았다.

고병갑이 랜드리올의 묘 앞에 섰다. 입에 문 담배를 묘비 앞에 살포시 얹어 둔다.

「편히 잠드쇼. 자주는 못 와도 생각나면 종종 찾아오리다.」

짧게 묵념한 그가 몸을 돌렸다.

「도르마, 길을 열어라! 발타드렌으로 돌아가자!」

「예! 길을 열겠소! 다들 물러나시오!」

도르마가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이윽고 공간이 갈라지며 널찍한 포탈이 생겨났다. 포탈 너머에는 발타드렌이 있었다.

「자, 차례차례 넘어가라. 얼른 돌아가서 밥 먹자.」

「옙!」

고병갑과 그의 부하들은 발타드렌으로 돌아갔다.

발타드렌의 거리는 번화하고 복잡했다. 느지막한 오후임에도 생기가 넘쳤다.

도시를 채운 종족은 고블린뿐만이 아니었다. 과거 이 땅을 딛고 살았던 아인들이 뒤섞여 있었다. 3년쯤 전에는 이 모습이 몹시도 어색했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자연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들은 서로 농담을 나누고, 웃고, 다독이며 일과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앗! 로드시여, 일 마치고 오시는 길입니까?」

「로드다! 로드가 돌아오셨어!」

「저녁은 드셨습니까? 여차하면 저희 집에서 함께 드시지요?」

길에서 마주치는 모두가 고병갑에게 인사를 건넸다. 또한 그를 로드라 부름에 있어 종족의 구분이 없었다.

「고붕씨~!」

그때였다. 골목에서 아리따운 여인이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뛰어왔다. 제 로드와 담소를 나누던 고붕이가 번뜩 고개를 돌렸다.

「쟈밀란!」

「이제 돌아오셨어요? 피곤하시죠? 얼른 집으로 가요!」

「이… 이 사람아! 로드를 뵀으면 먼저 인사부터 드려야지!」

「히히. 안녕하세요, 로드! 제 남편 좀 데리고 가도 되죠?」

고병갑의 한쪽 입꼬리가 비약적으로 솟더니 덜덜 떨렸다. 그가 옆의 도르마를 보며 말했다.

「도르마, 이거 하극상으로 간주해도 되는 거 아니냐?」

「허허. 로드께서 너그러이 봐주시지요. 아직 신혼이지 않습니까.」

「에휴, 좋겠다. 누군 거미줄 치게 생겼는데.」

「저, 저기 로드시여. 그게 아니라…….」

고붕이가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굴렀다. 고병갑은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난이야, 인마. 일 끝났으니 퇴근해도 좋아.」

「정말…입니까?」

「그래. 네 와이프 데리고 얼른 가 버려.」

「예, 옙!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오냐. 쉬어라.」

「로드. 다음에 봐요~!」

쟈밀란이 새침하게 윙크했다. 고병갑은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고붕이, 참 재주도 좋아. 언제 저런 예쁜 와이프를 꼬신 거야?」

「그는 친절하니까요. 여인들은 친절한 사내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친절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그나저나 도르마, 너는 소식 없냐?」

「로드께서도 아직 비를 맞이하지 않으셨는데 소인이 어찌 처를 두겠습니까.」

「…너, 그 말 꼭 지켜라.」

「허허허. 농이 지나치십니다.」

두 사람은 궁으로 돌아갔다. 말이 궁이지 발타드렌의 옛 사원을 개조해서 만든 건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몇몇 고블린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고병갑이 궁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안쪽에서 누군가 부리나케 뛰어왔다.

「로드! 오셨네요!」

도란이었다.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고병갑은 새삼 그녀가 꽤 컸음을 자각했다. 처음 봤을 때는 영락없는 소녀였는데, 어느덧 어엿한 숙녀가 되었다. 그래서 도란이 대뜸 안겼을 때는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너, 왜 여기 있어? 오늘 당직 아니야?」

「에이. 오늘 비번이에요. 그리고 너무 평화로워서 할 일도 없는데요, 뭘. 그것보다 로드, 식사 안 하셨죠? 얼른 가요! 다들 로드가 오시길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 그러자.」

고병갑은 끌려가다시피 식당으로 향했다. 아치형 문을 활짝 열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로드시여, 오셨습니까?」

「로드께서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에이, 먼저 먹지. 뭘 또 기다리고 있냐.」

「어찌 로드를 두고 저희끼리 식사를 하겠습니까? 허허.」

고병갑은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길쭉한 테이블에는 키리얀과 바몬드, 투르카와 태식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앗뜨뜨! 뜨겁답니다! 모두 비키세요!」

에아가 커다란 냄비를 들고 껑충껑충 뛰어왔다. 곧이어 쿵! 하고 테이블에 냄비가 안착했다. 언제 봐도 그녀의 촐싹거림은 대단하다.

「모두 이 안에 든 걸 보면 깜짝 놀랄걸요? 에아는 장담한답니다. 여태껏 여러분께 많은 놀라운 요리를 선보였지만, 오늘이 그중 최고라고 자신할 수 있어요. 모두 알고 있죠? 나는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는 정령이에요.」

「오우. 냄새는 끝내주네.」

「후훗! 그렇죠?」

「뜸 들이지 말고 얼른 열어 봐.」

「네!」

그녀가 온갖 오두방정을 떨며 냄비 뚜껑을 들췄다. 안에 담긴 것은 돼지의 머리통이었다. 두 눈이 파여 시커먼 암흑을 담은 돼지머리 말이다.

「…….」

「어때요? 군침이 싹 돌지 않나요?」

「에휴. 에아는 점점 더 바보가 되는 걸까.」

「네? 도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너나 많이 먹으란 소리야!」

왁자지껄한 식사 자리. 고병갑은 그게 나쁘지 않았다. 그와 고블린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맛있게 돼지머리를 나누어 먹었다.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사소한 잡담을 나눈다. 고병갑은 문득 평화로움을 느꼈다.

‘이제 좀 평화로워진 걸까.’

마드무트와 싸움이 끝나고 많은 일이 있었다. 전쟁 직후 일이 년간은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매일 이런저런 업무에 치여 몸을 혹사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많은 것을 이루었다.

악마의 도움으로 몬스터들을 옛 모습으로 돌려놓기도 했고, 그들을 통합해 다종족이 섞인 대제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고대의 상점에 박제돼 있던 여성 고블린들을 모두 현세로 불러들였으며, 그에 따라 자연히 가정을 이루는 고블린들이 생겨났다.

고병갑은 급격히 불어난 백성을 모두 포용하기 위해 밤낮없이 뛰고 또 뛰었다.

시간은 덧없이 흘렀고 모르는 사이 4년이 지났다. 고병갑은 왁자지껄한 식탁을 보며 감상에 빠져들었다. 적어도 그가 느끼기에 이곳은 평화로웠다.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얘들아.」

「예, 로드시여.」

「한 200년쯤 뒤에 말이야. 그때 이 땅을 밟고 살 이들이 내 이름을 기억해 줄까?」

「…예?」

「아니, 별건 아니고.」

고병갑은 쑥스러운 듯 뺨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내 나름엔 열심히 한다고 했거든. 작은 바람이 있다면 먼 훗날, 이 땅을 밟고 살아갈 이들이 나라는 인간이 아웅다웅 일해 줬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럴 수 있을까?」

고블린들도, 에아도 고병갑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애틋한 웃음이 만연했다.

그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당신께서는 천 년이고 만 년이고 만민의 가슴에 남아 영원토록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런 염려도 하지 마십시오.」

「하하……. 그러려나. 그랬으면 좋겠네.」

「로드시여!」

그때였다. 식당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궁의 보초를 서던 고블린이었다.

「무슨 일이야?」

「그, 그게… 어떤 인간이 로드를 만나 뵙겠다고 찾아왔는데 막무가내로… 어, 어억!」

“아, 좀 비켜 봐! 여기 있는 거야? 그런 거지?”

고블린을 밀치며 한 여인이 들어섰다.

짧은 단발에 인상이 날카로운 여인. 그녀의 시선이 고병갑에게 꽂혔다.

곧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선경이 누나? 누나가 어떻게?”

“야, 이 나쁜 새끼야!”

정선경이 대뜸 달려오더니 고병갑에게 와락 안겼다. 고병갑은 어안이 벙벙해서 어떻게 반응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는 사이에도 고병갑의 가슴은 정선경의 눈물, 콧물로 젖어 가고 있었다.

“너, 어떻게 한 번을… 한 번을 보러 안 오냐, 이 나쁜 놈아!”

“아… 그게… 바빠서…….”

“입 다물어, 인마! 너만 바빠? 너만 바쁘냐고! 흐아앙!”

한 번 터진 울음보는 쉽게 그칠 줄 몰랐다. 고병갑은 그저 아련히 웃으며 정선경의 등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미안해. 앞으로는 종종 보러 갈게.”

“진짜지? 약속해! 약속하라고!”

“응. 약속할게.”

제국 아스빌람은 재건됐다.

먼 옛날, 어느 제왕이 바랐던 대로 모든 종족이 하늘 아래 평화로이 살아갔다.

고병갑 혼자서 이룩한 것은 아니었다. 그를 보좌하는 수많은, 사랑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훗날 그가 자연의 한 조각으로 돌아갈 때, 그는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만족스럽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돌아본 자신의 일생은 한 점 후회 없이 타오른 불꽃이었다. 열정적으로 자신을 태운 불꽃. 그것이면 충분했다.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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