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결전
-푸른 기둥을 파괴하라.
세계 각국은 한날한시 같은 메시지를 전송받았다. 발송지가 한국이라는 것 외에 수신자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앞뒤 잘라 먹은 단편적인 글귀는 이목을 끌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무시하거나 금세 잊었다.
그리고 얼마 뒤 아리에나 바바디가 죽었다. 그에 따라 그녀가 전 세계에 걸쳐 걸어 놓았던 세뇌가 차츰 해지됐다.
육망교에 호의적인 자세를 취하던 각국 수뇌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에 동참했던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육망교의 계획에 가담했던 이들의 폭로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 무렵 ‘푸른 기둥을 파괴하라’는 내용의 메시지 역시 재조명받았다.
하지만 푸른 기둥을 파괴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기둥 앞을 지키고 선 신성군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성 전사가 방출하는 정체불명의 역장이 폭격을 방해했다. 그렇다고 직접 인력을 투입하자니 썰려 죽을 게 자명했고.
그러던 어느 날, 푸른 기둥을 수호하는 신성군이 느닷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각국 정상들은 골머리를 싸매며 고민했다.
고뇌 끝에 나온 결론은 의외로 명료했다. 놈들이 사라진 이유는 모르겠다만 물이 들어온 김에 노라도 저어 보자는 것이었다.
러시아 모스크바.
아르헨티나 바릴레체.
시에라리온 프리타운.
캐나다 토론토.
오스트레일리아 콜드코스트.
프랑스 파리.
지금껏 파악된 여섯 개의 기둥을 향해 인류의 가장 뜨거운 흉기가 무더기로 쏘아졌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장대한 발버둥이었다.
* * *
고건룡과 수진을 에워싼 기둥에 쩍쩍 금이 갔다. 고건룡은 무슨 수라도 써 보려 아등바등했지만 크게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하늘 높이 솟아올랐던 기둥이 끝에서부터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고건룡의 표정은 잿빛으로 물들어 갔다.
“마,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마침내… 마침내 완성됐단 말이야!”
「이날을 위해 그 오랜 시간을 기대하고 고대했는데, 어찌 이리 허망하게!」
안쪽에서부터 포효가 들려왔다. 한국어와 아스빌람의 언어가 뒤섞인 아우성은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고병갑 역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완벽히 파악할 수 없었다. 단지 저쪽 일이 틀어졌다는 것 정도만 가늠됐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고병갑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건룡이 푸른 기둥에 휩싸여 보호받을 때는 심장이 철렁였다. 치기 어린 복수심에 일을 그르쳤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하늘이 도와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이번에는 절대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않으리라.
“후우…….”
길게 호흡을 뱉은 그가 땅에 박아 두었던 검을 다잡았다. 손아귀가 아릴 만큼 강하게 움켜쥐고 자세를 잡는다. 안에서부터 거대한 힘이 꿈틀거리며 터져 나왔다.
새카만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검을 감쌌다. 흑색 검신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태동하며 들썩거렸다.
검신에 쏠린 어둠의 힘은 이내 폭풍을 만들어 냈다. 그 회오리가 너무 거세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움츠러들지 않는다. 눈앞의 적을 단 한 톨도 남겨 놓지 않고 싶었다.
「이런 빌어 처먹을! 그래, 네놈 때문이다. 이 모든 재앙이 네놈으로부터 비롯됐어. 도대체 나 마드무트가 무슨 까닭으로 이런 모멸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감히 일개 피조물 주제에 창조주인 나를 두 번씩이나 물 먹이다니! 가만두지 않겠다!」
무너지는 기둥 안에서 고건룡이 이쪽을 노려보았다. 눈빛이 가히 살벌하다.
그는 마드무트에게 완전히 잠식당한 듯했다. 안고 있던 수진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더니 스스로 기둥을 뚫으며 돌진해 왔다.
「놈! 본좌가 이렇게 당할 성싶으냐? 이렇게 된 이상 영멸시켜 주마! 물질계뿐만이 아니라 전 우주 어디에서도 네놈의 존재를 찾을 수 없도록 갈기갈기 찢어 버리겠다!」
고건룡의 몸 곳곳이 종기처럼 불룩해졌다. 곧이어 피부가 갈라지더니 벌레가 탈피하듯 거대한 무언가 튀어나왔다.
그건 마드무트의 본모습이었다. 푸른색 피부에 아흔아홉 개의 눈을 달고 있는 거인. 놈은 두 손을 앞으로 뻗으며 고병갑을 덮쳤다. 흡사 운석이 떨어지는 듯한 위압감이었다.
고병갑은 담담히 위를 올려 보았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분쇄.」
검이 쏘아졌다. 새카만 회오리가 덤벼 오는 마드무트를 마주 덮쳤다.
마드무트는 격렬히 저항했다. 몰아치는 회오리를 손으로 잡아 찢고, 이로 물어뜯으며 필사적으로 항거했다.
하지만 악마의 힘이 서린 회오리는 마드무트의 살점을 탐할수록 점점 더 몸집을 불렸다. 얼마 뒤엔 거구의 마드무트보다 갑절은 더 커져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무너진 건물, 콘크리트 바닥, 길가에 무성한 잡초. 모든 것이 회오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중에는 고건룡의 애인, 수진도 있었다. 의식을 잃은 수진이 맥없이 회오리 안으로 곤두박질쳤다. 고병갑은 그저 감정이 죽은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였다.
“아… 안 돼!”
옆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고건룡이었다. 이제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시체나 다름없는 몰골의 고건룡이 회오리 쪽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안 돼, 수진! 안 돼! 가지 마!”
이미 넋을 잃은 듯한 모습. 고건룡은 기어코 회오리 안으로 몸을 던져 넣었다.
그가 저 안에서 제 애인을 만났을까? 모를 일이다. 다만 세계 최강의 사나이라 칭송받던 남자의 최후치고는 비루한 죽음이었다.
한편에선 마드무트가 여전히 발악하고 있었다. 놈의 버둥거림은 눈에 띄게 약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약해지더니 마지막에 이르러선 허망한 음색으로 세상을 부정하기만 했다.
「이럴… 수는……. 영겁의 시간을 살아온 내가……. 이렇게… 이리 허망하게…….」
고병갑은 멍한 눈으로 회오리를 응시했다.
모든 것을 갉아먹으며 영영 불어날 것 같던 회오리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멎었다.
고병갑은 저절로 알 수 있었다.
마드무트가 죽었다. 구경꾼이라곤 원수 하나뿐인 죽음. 놈에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 * *
“썅…….”
저녁이 슬그머니 내려앉은 곳. 이곳은 폐허가 된 도시다.
바람이 매섭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코끝을 스쳐 지나간다. 그럴 때면 자욱한 피 내음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고병갑은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 한참이나 앞의 광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곳에 살아 숨 쉬는 건 본인뿐이다.
새삼 그러한 사실이 아련하게 다가왔다. 가슴이 쿡쿡거리는 것이 여차하면 울음이 쏟아질 것 같았다.
싸움은 끝났다. 고건룡도, 마드무트도, 최후의 18인도 이젠 없다. 그들은 모두 한 줌의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갔다.
기나긴 악몽에서 드디어 깨어난 것이다.
하지만 악몽의 후유증은 짙게 남아 눈가에 눈물 자국을 만들었다.
“…쯧.”
습관적으로 안주머니를 뒤적이던 그가 짧게 혀를 찼다. 담배가 없다. 마지막 남은 담배는 정선경의 시신에 남겨 두고 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럴 때는 정말이지 담배 한 모금이 간절하다. 그렇다고 그녀가 누워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 담배를 가져올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는 지금 지독한 무기력증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고 싶지 않았다.
큰 과업은 완수했으나 그 뒤에 남은 건 비참한 현실이었다. 그런 현실로 발을 들이기가 망설여졌다. 그래서 망부석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둑하던 하늘이 완전히 캄캄해지고.
피 내음을 하도 맡아 후각이 무뎌졌을 무렵이었다.
고병갑의 귀와 손은 찬바람을 하도 맞아 감각이 없었다. 눈동자엔 슬픔의 감정조차 메말라 탁한 빛깔만을 띄었다.
새카만 회오리가 몰아친 탓에 움푹 파인 바닥을 응시하던 그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무릎을 달래며 일어났다.
“그래… 엿 같아도 살아가야지. 산 놈은 살아야지.”
고블린 로드가 된 이후 매일같이 붙어살던 부하들도.
이북 원정을 계기로 안면이 트여 연정을 싹틔우던 여인네도.
그 밖에 크고 작은 인연들도 다 죽었다.
고병갑도 어쩌면 그들을 따라가는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자신이 누군가의 왕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누군가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아스빌람엔 여전히 자신이 돌아오길 오매불망 기다리는 부하들이 있다. 그리고 하나뿐인 어머니도 눈가를 훔치고 계시다. 어찌 그들을 놔두고 훌쩍 떠나 버린단 말인가.
책임이란 그토록 무거운 것이다. 이런 말도 있잖은가?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버티라고.
“왕관은 무슨. 왕팬티 한 장도 없는데.”
고병갑은 터벅터벅 걸어 마드무트의 시신 앞으로 다가갔다. 몸뚱이는 다 날아가 없고 가슴팍 위쪽만 남아 있었다. 면상을 수놓은 99개의 눈알이 아니꼽다.
남은 부분이라 봤자 거적때기만 못한 상태이지만 이거라도 들고 가야 한다. 악마들과 한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그는 마드무트의 시신을 수습해 아스빌람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놈이 남긴 고깃덩이를 집어 드려 허리를 숙인 순간, 그의 시선에 무언가 들어왔다.
“…뭐지?”
저 건너편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꾸물거리며 허공을 배회하는 모습은 흡사 물고기 같기도 했다.
고병갑은 할 일도 잠시 잊고 그리로 다가갔다. 잠시 후 그가 의문에 차서 말했다.
“이게 뭐야?”
주먹 크기만 한 발광체. 어딘가 낯이 익었다. 고병갑은 곧 그것이 고대의 상점에서 산 영혼들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발광체를 쥐었다. 직후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도란?”
얼어붙은 손을 감싸는 따스한 기운. 고병갑은 거기서 도란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분명 도란의 영혼이었다.
고병갑의 고개가 번뜩이며 돌아갔다. 그는 무언가 잃어버린 사람처럼 두리번거렸다.
“아.”
이윽고 적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수많은 영혼이 하늘을 헤엄치고 있었다.
도르마, 키리얀, 투르카, 창식이, 바몬드……. 고병갑은 하늘을 수놓은 불빛에서 부하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금방이라도 떠나갈 듯했다.
울음이 차 목이 막혔다. 그래도 꾸역꾸역 외친다.
“안 돼, 못 보내! 너희 왕을 내버려 두고 어딜 가려는 거야! 모두 돌아와!”
그가 도란의 영혼을 품에 안았다. 하지만 영혼은 그의 몸을 벗어나며 서서히 떠올랐다. 고병갑은 더욱 강하게 영혼을 끌어안았다.
보낼 수 없다. 이대로 이들을 보내 버린다면 죽을 때까지 두 발 뻗고 잘 수 없을 듯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모두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젠장, 고대의 상점에는 있었을까? 모두 제자리로 돌려놓는 그런 기물이……. 제기랄, 그럼 뭐해? 나는 이제 고대의 상점도 뭣도 없는 몸인데.’
고병갑은 고대의 상점의 공백을 느끼며 한탄했다.
‘랜드리올, 당신이었으면 어떻게 했겠어? 응? 당신이라면…….’
“아!”
흐느끼던 그가 감전된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눈에선 여전히 눈물이 흘렀다.
랜드리올은 악마의 힘으로 고대의 상점을 만들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신묘한 상점을 만들어 낸 것이다.
고병갑에겐 그런 창의력이 없었다. 랜드리올도 그 점을 지적했고.
그러나 창의력은 없을지언정 절박함은 넘칠 만큼 있었다. 또 그걸 감당할 힘 역시 있었다.
‘이 힘이라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악마의 힘. 그 힘의 본질은 혼돈이다. 혼돈은 형태도 없고 규칙도 없다. 그래서 뭐든 가능하다.
고대의 상점 같은 신묘한 물건을 만들어 내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에게 필요한 건 투박한 기적이었다.
하나 문제라면 악마의 힘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한 번 써 버리면 보충되지 않는다.
고병갑은 1초 정도 고민하다가 제 뺨을 후려쳤다. 망설일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야? 이딴 힘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래, 이딴 힘 없더라도 좋아. 나한테 필요한 건 따로 있다고. 그러니까 제발!!”
그가 두 팔을 쳐들었다. 그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혼돈의 힘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새카만 얼룩으로 뒤덮인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더 멀리, 더 빨리! 고병갑은 소리 없는 기합을 마구 질러 댔다.
질서에 혼돈을 뿌리면 혼란이 찾아온다.
하지만 혼란에 혼돈을 더하면 도리어 평화가 찾아올지니.
고병갑은 이 순간, 기적을 행사했다.
제왕 고병갑이 부린, 찬란한 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