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악마의 조각을 먹어 치운 직후, 고병갑은 내면에서 요동치는 강대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내력이나 카르마처럼 직관적인 게 아니었다.
끊임없는 변화. 방향성이 존재하지 않는 무한의 굴레. 정의할 수 없는 형태. 그랬다. 그 힘은 혼돈이었다.
떠나는 그를 보며 많은 고블린이 만류했다. 가시지 말라고, 정 가려거든 자신도 데리고 가라고…….
거기서 고병갑이 해 줄 것은 단 하나의 약속이었다.
너희 왕은 반드시 돌아올 테니 믿고 기다려라.
고병갑은 문을 넘어 지구로 향했다. 천만다행으로 고건룡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뭐해? 자세 잡아, 씹새야. 딱 죽은 사람 숫자만큼 죽여 주마.”
그가 빈손을 앞으로 뻗었다. 새카만 기운이 그리로 모여들더니 순식간에 검 한 자루를 만들어 냈다.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을 모두 뗀, 오로지 상대를 도살하기 위한 실용적인 형태의 흑검이었다.
호오, 악마의 힘이란 건 편리하구먼.
고건룡은 부동의 자세로 눈동자만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기절한 수진에게 머물렀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자신은 천상계를 구성해야 하고, 수진도 지켜야 했으며 설상가상 앞선 전투의 후유증이 아직도 만연히 남아 있었다.
‘이제 완성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시간을 끌면 돼.’
그가 신성 전사 에락센에게 개념을 보냈다.
저 사내를 멀리 떨어뜨리고, 가능하다면 죽여라.
명령을 하달받은 에락센이 반쯤 망가진 몸을 일으켰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깨진 터라 에락센의 몰골은 처참했다. 그래도 70미터나 되는 거구가 뿜어내는 기개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둑한데 선 자리에 음영이 진다. 고병갑은 못마땅한 눈길로 에락센을 째려보며 말했다.
“쫄따구 보내지 말고 직접 와, 망할 자식아.”
“…….”
우워어어어―!
에락센이 대뜸 검을 내리찍었다. 육중하지만 날쌔고,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위력적인 찌르기였다. 카르마가 응집된 칼끝은 철판 수백 겹이라도 끊어 버릴 듯했다.
고병갑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는 왼발을 앞으로 내디디고, 허리는 반대되게 돌리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의 몸에서 거뭇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다음 순간, 고병갑이 힘차게 흑검을 찔렀다.
에락센의 대검과 고병갑의 흑검. 그 두 검의 끝과 끝이 정확히 일치하는 기예가 펼쳐졌다.
카장창!
“허.”
점과 점이 맞닿는 것을 바라본 고건룡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에락센의 대검에 균열이 생겼다. 끝에서부터 점차 위로 퍼진 균열은 이윽고 손가락, 팔, 어깨, 심장… 등을 통과하며 몸 전체로 퍼졌다. 에락센은 순식간에 금 간 조각상 같은 꼴이 되었다.
“처음부터 이럴 걸 그랬어.”
고병갑이 칼날을 살짝 튕겼다. 후두둑! 신성 전사 에락센은 조각 단위로 분해되며 쏟아져 내렸다.
무너진 몸뚱이가 고병갑을 뒤덮었다. 하나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는 거슬릴 것도 없이 잔해를 헤치며 걸어 나왔다.
“내가 갈까, 네가 올래.”
“왜…….”
고건룡의 목소리가 잔뜩 쉬었다.
고병갑은 비딱한 자세로 저쪽을 노려보았다. 언뜻 빈틈투성이 같지만 언제든 상대의 목을 취할 준비가 돼 있었다.
고건룡의 머릿속은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가 말했다.
“왜 우리가 싸워야 하지?”
“뭐?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넌 나를 아는가? 나는 너를 모른다.”
고건룡은 반쯤 몸을 돌려 비스듬히 섰다. 그 자세는 무방비했고, 전투 의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 처음 봤다. 네가 내게 증오를 느낄 까닭이 어디 있고, 내가 네 증오를 감당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냐.”
“이 구렁이 같은 놈이 어디서 궤변을 늘어놓고 있어? 네놈이 마드무트―!”
“그래, 마드무트. 넌 아마 랜드리올이라는 이름이었지? 들어 봐라. 그것들이 정녕 우리냐? 그것들은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일 뿐이다. 지금 네 앞에 서 있는 나는 인간 고건룡이야. 무력한 애인을 앞에 둔 한 명의 인간일 뿐이라고.”
고건룡이 눈으로 수진을 가리켰다. 고병갑도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벌거벗은 모습이 껄끄러워 이내 시선을 거두긴 했으나, 특별한 위험은 감지되지 않았다.
“애인이 잠들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지. 그녀도 나를 사랑한다. 수진 앞에서 나를 죽일 거냐? 그녀를 미망인으로 만들 셈이야?”
“…….”
“마드무트와 랜드리올. 그 둘 사이에 어떤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옆에서 계속 지켜봤으니까. 그런데 그 둘의 원한 때문에 우리까지 치고받고 싸워야 한다니. 그건 뭐랄까… 어, 그래. 비합리적이지 않나?”
“비합리라.”
고병갑의 칼날이 스르륵 내려갔다. 고건룡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물었다.
“너, 이름이 뭐지?”
“고병갑이다.”
“고병갑, 고병갑……. 역시 내가 아는 이름 중엔 없어. 아는 얼굴도 아니고 말이야. 어… 음.”
고건룡의 입술이 들썩거렸다. 뭐라도 말을 더 짜내야 했다.
“성이 고 씨군. 혹시 어디 고 씨냐?”
“푸흡! 흐흐흐.”
고병갑은 기어코 웃어 버렸다. 그가 끅끅거리며 대답했다.
“제주, 제주 고씨다.”
“오, 나와 같군. 성주공파인가? 아니면 장흥백―”
“야.”
“…왜?”
“개소리 그만 씨부리고 자세 잡아, 같잖아서 더는 못 들어 주겠네.”
고병갑이 으르렁거렸음에도 고건룡은 미동도 없었다. 여전히 싸울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젠 개의치 않기로 했다. 준비되지 않은 적과는 겨루지 않는다는 기사도도 아니고. 곧 멱을 따 버릴 놈의 사정까지 봐줄 필요는 없었다.
“네가 내 부하들을 죽었다. 사랑하는 내 부하들을 말이야. 그거면 내가 너를 일백 번이고 쳐 죽일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 고작 고블린 몇 마리 때문… 아.”
고건룡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직감했다. 이쪽을 향하는 살기가 짙어지다 못해 피부를 따갑게 만들었다.
“고블린 몇 마리라.”
“그러니까 내 말뜻은…….”
“랜드리올은 그랬지. 신하가 왕을 위해 죽는 것은 당연하다고. 그러니 그들의 죽음에 초연해져야 한다고도 했어.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아닌 듯해.”
고병갑이 중얼거렸다. 딱히 고건룡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 것이 왕도라면 나는 거부하겠다.”
그가 칼을 치켜 올렸다. 칼날이 서늘하고 검은 연기를 마구 뿜어냈다.
“보아하니 시간을 끌 작정이었나 본데, 싸울 마음이 없다면 내가 만들어 주지.”
“칫!”
고병갑이 칼을 휘둘렀다. 궤적을 따라 쏘아진 새카만 검기가 한편에 누워 있는 수진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고견룡이 기겁하며 보호막을 펼쳤다.
보호막은 간발의 차로 수진을 지켜 낼 수 있었다. 고건룡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얼굴은 터질 듯 울긋불긋해졌다.
“놈! 감히 얻다 대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고병갑이 달려들었다. 고건룡은 여전히 부동자세였지만 그게 꼼짝 못 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카르마의 격류와 수천 발의 카르마 탄환이 고병갑을 덮쳤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힘을 이용해 수진을 자신의 뒤편으로 옮겼다.
고병갑은 담담히 검을 앞세웠다. 순간, 한 가닥의 칼날이 수만 다발의 촉수로 변모했다. 촉수 하나하나가 살모사의 주둥이처럼 솟구쳐 탄환을 씹어 먹었다. 탄환을 씹어 먹은 촉수는 몸집을 불렸고, 그대로 커다란 벽이 되었다.
카르마 격류가 벽과 충돌하더니 맥없이 소멸했다.
“혼돈은 형태도 법칙도 없다. 그래서 뭐든 가능하지.”
그가 두 손으로 검을 잡고 힘껏 휘둘렀다. 이번엔 검신이 거대한 주둥이가 되어 방금 먹어 치운 것들을 토해 냈다.
고건룡이 날렸던 공격이 도리어 그를 노렸다.
“끄억!”
고건룡은 즉시 방어를 시전했다. 하지만 그는 여러 가지로 정신이 팔린 상태였고, 때문에 방어도 영 시원치 못했다.
그는 꼼짝없이 격류에 휩쓸려 구겨졌다.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수진을 보호했다.
고병갑은 달리면서 팔을 쳐들었다. 어느새 그의 손엔 새카만 장창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응축된 근육과 악마의 힘이 폭발적인 추진력을 만들어 냈다. 장창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쏘아져 고건룡의 가슴을 꿰뚫었다.
방어를 해 봐도 무용지물이었다. 어둠의 힘은 카르마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힘을 키우기만 했다.
“컥!”
창은 멈추지 않고 나아가 바닥에 박혔다. 끝이 아니다. 창 자루에서 손이 튀어나와 고건룡의 목과 팔다리를 옥죄였다. 그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작살에 꿰인 물고기 신세가 되었다.
고병갑은 고건룡의 앞에 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둘렀다. 칼날은 위력적이고 예리하면서도 대상을 깊게 베지 않았다. 딱 뼈에 닿을락 말락, 피부와 근육만을 그었다.
“끄으으아악!”
고건룡이 버둥댔다. 하지만 장창에서 파생된 검은 손이 그의 탈출을 용납하지 않았다.
“내가 말했지. 죽은 사람 숫자만큼 죽여주겠다고.”
“…….”
물론 그건 일종의 말장난이다. 그러나 고건룡에게 다시 없을 끔찍한 죽음을 안겨 주겠다는 것은 분명한 진심이었다.
고병갑이 무아지경에 빠져 검을 휘둘렀다. 칼날에서 새로운 칼날이 파생되고, 파생된 칼날에서 다시 날카로운 비수가 솟아오른다. 그것들은 자의를 가지고 제멋대로 휘둘러졌다.
“끄악! 으아악! 그마아아안!! 그만둬, 이 미친―끄어어억!”
그 모든 칼날은 아주 교묘하게 고건룡의 살점만을 도려냈다. 그의 발치로 절단된 살점과 피가 흥건히 쌓였다.
몇 분 뒤. 고건룡은 인체의 신비전에서나 볼 법한 흉측한 모습이 되었다.
상대를 거의 제압했음에도 고병갑의 표정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왜 그렇게 무력하지?”
고건룡은 기가 막혔다.
랜드리올과 열두 고블린이 그의 몸에 어떤 짓을 했는지 몰라서 묻는 건가? 뭐, 그렇다고 해도 웬만한 상대라면 자신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리라. 그러나 고병갑에겐 공격도 방어도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 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전력을 쏟아 낼 수도 없는 처지였다. 천상계에 오르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한데, 신성 전사는 벌써 다 죽어 버렸다. 딛고 갈 계단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니 천상계에 오르려면 일정량 이상의 힘을 비축하고 있어야 했다.
“흐흐…….”
“웃어?”
하지만 고건룡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에 환하고도 광기 어린 웃음이 퍼졌다.
“됐다!”
순식간이었다. 고건룡은 자신이 한 번에 출력할 수 있는 모든 카르마를 뿜어냈다. 그것은 일종의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엄청난 압력과 충격파가 지척에 있던 고병갑을 덮쳤다.
“이런 뻔한 술수로.”
고병갑은 당황하지 않고 어둠의 기운을 발산해 충격을 상쇄했다. 빛의 기류를 뚫고 검을 내지른다. 칼날이 고건룡의 어깨에 직격했다.
하지만 고건룡은 되레 어깨를 강하게 털었다. 자신의 몸을 일부러 잘라 낸 것이다. 마치 도마뱀이 제 꼬리를 끊고 도망치는 것처럼.
고건룡은 얼른 수진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를 품에 안은 순간. 두 사람을 에워싸는 푸른 기둥이 생성됐다.
“완성됐다! 완성됐다고! 흐하하하! 어차피 이따위 육신, 천상계에 오르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깃덩이일 뿐이다!”
반투명한 기둥 안에서 고건룡이 폭소를 터뜨렸다. 고병갑은 다만 표정을 구기며 기둥을 때렸다. 한데 약간의 먼지구름만 피어오를 뿐 기둥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통하지 않는다고?’
일그러지는 고병갑의 표정과 달리 고건룡의 얼굴은 점점 더 밝아졌다.
“멍청한 놈! 여긴 이미 천상의 일부분이다. 아무리 네놈이 괴팍한 힘을 휘두른다 한들, 머무르는 층계가 다른 이상 네 공격은 이곳에 닿을 수 없어! 흐흐흐, 네놈의 패착이 무엇인 줄 아나? 쓸데없는 증오심에 사로잡혀 유치한 장난질을 쳐 댔다는 것이다. 덕분에 난 시간을 벌었지.”
“…….”
고병갑이 푸른 기둥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강력한 저항이 그의 출입을 막았다. 그것은 혼돈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건룡과 수진이 기둥 내부에서 차츰 떠올랐다.
“자신의 아둔함을 저주해라! 감히 그따위 알량한 힘으로 본좌를 기만해? 그러니 너희가 오만하다는 것이다! 네놈도 랜드리올과 다를 바 없는 패배자일 뿐이야!”
“딱히 그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뭐라?”
고병갑은 검을 바닥에 꽂고 팔짱을 꼈다.
고건룡은 ‘저놈 뭐 하는 거지?’라는 표정을 짓다가 번뜩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곧 자신과 수진이 일정 높이 이상 떠오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심지어 자신들을 둘러싼 기둥에 쩍쩍 금이 가고 있었다.
고건룡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고병갑이 과거 전 세계로 보냈던 짧은 텍스트.
‘기둥을 공격하라.’라는 단출한 문장이 어떤 결과물을 가지고 왔는지.
그렇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폭풍을 몰고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