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결전
신의 저장고? 지혜의 나무?
그게 뭔데? 고병갑은 반사적으로 되물으려 했다. 한데 말이 목젖에 걸칠 즈음 뭔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녀석, 혹시 고대의 상점이랑 계몽의 씨앗을 말하는 건가?’
그의 머리로 두 이미지가 스치자 악마는 대번에 반응했다.
<맞아! 우리는 그것을 원해!>
고병갑은 조금 황당함을 느꼈다. 그 탓에 말투가 떨떠름해졌다.
“…너희가 그건 가져다가 어디에 쓰려고?”
<우린 지혜를 탐닉해. 하지만 태생이 불완전한 탓에 진리에 다다르지 못했지. 지혜의 나무가 있다면 가능할지 몰라. 먼 과거, 우리에게 지성을 준 사내가 가두어 둔 광활한 지식이 있다면!>
“고대의 상점은?”
<그건 줄곧 탐났어. 마드무트의 저장고에 몰래 샛길을 뚫을 생각을 하다니, 그 남자는 정말 대범하단 말이야.>
악마는 간단히 대답했다. 하지만 고병갑은 그렇지 못했다. 대수롭잖게 줘 버릴 수 있는 품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대의 상점도, 계몽의 씨앗도 모두 필요한 것들인데.’
처음 허허벌판이던 아스빌람이 이만큼이나 발전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고병갑과 고블린들의 노고? 물론 그 영향도 없진 않으리라. 하지만 냉철히 보건대 고대의 상점이 기여한 바가 9할 이상이다.
고대의 상점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그걸 줘 버리는 게 과연 옳은 처사일까? 힘을 얻어 마드무트를 잡는다고 한들, 고대의 상점 없이 미래를 꾸려 갈 수 있을까?
‘계몽의 씨앗이야 다시 사서 심으면 되니 줘 버려도 그만이야. 하지만 고대의 상점은…….’
랜드리올의 인생 역작이라는 고대의 상점.
고병갑은 한참을 고민했다. 악마는 탐욕에 찬 눈을 번뜩이며 고병갑을 내려보았다.
마른 입술에 몇 번이나 침을 바르던 그가 결국 결단을 내리고 답했다.
“알았다. 고대의 상점도 계몽의 씨앗도 주겠어. 그러니 힘을 줘라, 막강한 힘을.”
<좋아! 계약은 성사됐다!>
먼 옛날, 사라온은 고대의 상점 같은 거 없이도 지상의 정점으로 군림했다.
자신은 또 어떻고? 맨몸으로 살벌한 헌터 판에 뛰어들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지만 그래도 엄마 병원비 대며 꾸역꾸역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이제 흘린 땀의 갑절 되는 보상은 못 받겠지만 흘린 땀만큼 보상받으며 부족하면 더 열심히 땀 흘리며 살아가면 될 터다.
고병갑은 고블린들과 함께 잘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미련도 훌훌 털어 버렸다.
“그런데 지혜의 나무는 그렇다 쳐도 고대의 상점은 어떻게 가져가겠다는 거냐?”
<눈을 떠라.>
악마가 무던히 말했다. 다음 순간 고병갑은 눈을 떴다. 컴컴한 내면세계가 아니라 발타드렌의 광장이 보였다.
「어… 저기, 괜찮소?」
쿤타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고병갑은 고개를 끄덕여 답한 뒤 자신의 몸을 살폈다. 고대의 상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때였다. 어어?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광장을 채운 이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고병갑도 자연히 고개를 들었고, 다음 순간 눈이 커졌다.
석양을 받아 불그스름한 하늘이 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적잖은 생을 살아오며 볼꼴 못 볼 꼴 다 봤다고 자부하는 그였으나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꺄아악! 저, 저게 뭐야!?”
「케, 케르륵…….」
「허어. 저것은 당최 무슨?」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대한 암흑이었다.
형태를 정의할 수 없는 거뭇한 덩어리. 덩어리는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작아졌고, 모양도 잡아갔다.
마침내 땅에 닿았을 때는 ‘검은 인간’이라고 칭할 수 있는 형태가 되었다. 물론 ‘인간’이라 표현한 부분에서 엄청난 관용이 필요하긴 했다.
고병갑은 본능적으로 그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건 악마였다. 그러글 따위가 아닌 진짜 악마.
악마는 발타드렌의 광장을 디디고 섰다.
「모두 물러나.」
「로, 로드시여. 위험합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괜찮으니까 물러나. 나한테 용무가 있어서 온 거야.」
고병갑은 그렇게 말하며 악마에게 다가갔다. 악마의 면상에는 이목구비랄 게 없었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입도 없었고.
하지만 놈은 태연히 말했다.
「꺄르륵! 약속한 물건을 받으러 왔어!」
「그래, 얼른 가져가라.」
「그럴 거야.」
악마는 실실 웃더니 손을 까닥였다. 그러자 고병갑과 악마를 둘러싸고 있던 공간이 순식간에 변했다.
「무슨!?」
고병갑이 놀란 눈을 치켜뜨며 사위를 훑었다. 이곳은 솜니움이었다. 솜니움엔 휑했다. 고블린들이 모두 발타드렌으로 옮겨 간 탓이다.
그가 예고도 없는 순간 이동에 당황한 사이 악마가 몸을 움직였다. 놈은 한편에 심어진 묘목에 다가갔다. 계몽의 씨앗을 심어 나온 결과물이다.
「약속대로 지혜의 나무는 우리가 가져가겠어.」
「멋대로 해라.」
「꺄르륵!」
놈의 면상에서 아가리가 생겨났다. 수박도 한입에 삼킬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아가리였다. 악마는 망설임 없이 지혜의 나무를 털어 넣었다.
고병갑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미친, 그거 씹어 먹으면 막 똑똑해지는 시스템이었냐?」
악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놈이 다시 손을 휘적였고, 둘은 다시금 발타드렌에 오게 됐다.
「로, 로드시여!」
「로드가 돌아오셨다.」
고블린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악마는 입가를 훔치며 고병갑에게 다가갔다.
고블린들이 당장이라도 악마를 공격할 듯 살벌하게 굴었다. 고병갑은 팔을 들어 보이며 괜찮음을 알렸다.
「됐어, 괜찮다. 괜찮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하지만 로드시여…….」
「꺄르륵, 이제 신의 저장고를 받아 갈게.」
악마가 손 비슷한 것을 고병갑의 가슴에 갖다 댔다. 쿵쾅!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고병갑은 자신의 안에서 고대의 상점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제기랄, 이렇게 간단히 없어지는 거였어?
결심은 했다만 아쉬움이 들었다. 수족 한 짝이 없어진 듯 허한 기분은 덤이었다.
그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확실히 가져갔지? 그러니 이제 약속한 대로 힘을 줘.」
「걱정하지 마. 우리는 약속을 지켜. 그러니 너도 꼭 약속을 지키길 바라!」
「네놈들이야말로 괜한 걱정하지 마라.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응! 마드무트의 몸뚱이야. 기억해!」
악마의 왼쪽 어깻죽지가 저절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떨어져 나간 왼쪽 부분은 지점토처럼 꾸물거리더니 한 점으로 뭉쳤다. 그것은 곧 수박 크기만 한 구체가 되었다.
나머지 오른쪽 부분은 좀 작아졌긴 해도 여전히 인간의 모습이었다. 악마가 거뭇한 덩어리를 두 손으로 들고 내밀었다.
「먹어, 네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것이야.」
구체에선 끔찍한 악취가 흘러나왔다. 하나 고작 악취 따위가 그의 집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고병갑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선 자리에서 까만 덩어리를 몽땅 먹어 치웠다. 혹여 손에 묻었을까 싶어 손가락을 쪽쪽 빨기까지 했다.
악마가 씩 웃었다.
「얼른 가서 마드무트를 잡아 와.」
고병갑은 서늘하게 웃었다.
「보채지 마, 이 새끼야.」
* * *
푸른 행성 지구.
태양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성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
지상에선 피와 비명이 뒤섞여 수라장을 이루었지만 우주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그것은 미시적인 사건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젠 우주에서 봐도 눈에 띌 만한 이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둥그런 지구의 여섯 지점이 반짝이며 농염한 빛을 토해 낸 것이다.
빛은 점점 커지고 밝아지더니 어느 시점에 이르러선 웬만한 대도시보다 밝게 발광했다.
다음 순간, 여섯 점이 여섯 개의 선이 되었다. 우주적으로 봤을 때 선이라는 얘기다.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간이었다.
하여튼 그 선들은 모두 한곳을 향해 뻗어 갔다. 선들이 향하는 곳은 동북아의 작은 반도였다.
지상은 새빨간 절규로 물들었다.
인도, 중국, 미국. 세 나라를 딛고 선 모든 인간은 땅이 번쩍거리는 것을 보았고, 그것을 본 순간 체내의 모든 에너지가 증발해 미라 같은 꼴이 되었다.
풀썩. 풀썩. 쓰러진 미라 위로는 불긋한 에너지만이 남았다. 길잃은 에너지는 하늘로 승천해 여섯 개의 선으로 흡수됐다.
그럴수록 선이 반도로 향하는 속도는 더 빨라졌다.
* * *
고건룡은 어깨가 점점 더 무거워진다고 생각했다. 어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 물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천상계가 구성될수록 그의 몸은 하중과 압력에 으스러져 갔다.
‘괜찮아, 조금만 더 버티면 지난 수십 년의 노고와 기다림이 결실을 맺는다.’
고건룡은 벌거벗은 채 누워 있는 여성을 흘겨보며 재차 결의를 다졌다.
수진은 살아났다. 마드무트가 약속대로 그녀를 되살려 준 것이다.
물론 되살아난 수진은 고건룡을 알아보지도,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여러 혼란이 그녀를 공황 장애에 빠뜨렸다. 그래서 일단 기절시켜 놓았다. 설명은 천상계에 당도한 뒤 해도 늦지 않을 테니.
해가 점점 더 기울었다. 겨울은 낮이 짧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이 찾아들 듯했다.
고건룡은 어느새 하중과 압력에 익숙해졌다. 익숙해지니 지루함이 찾아올 여유도 생겼다.
그래서 고건룡은 수진과 처음 만났을 당시를 회상하기로 했다.
그녀를 만난 것은 저번 생, 그러니까 1회차 때의 일이었다. 자신과 그녀 모두 인류 연합군에 소속된 헌터였다.
사실 두 사람은 일면식조차 없었다. 고건룡은 SS급이었고, 수진은 고작 A급이었으니 배속된 부대도, 활동하는 주 무대도 달랐다.
그녀와 첫 만남은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이었다.
고건룡이 속한 분대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중 후퇴 명령을 받게 되는데, 그들이 일선 후퇴하여 합류한 부대가 바로 수진이 소속된 부대였다.
수진은 고건룡의 재정비를 돕는 임무를 맡았다. 쉽게 말해 수발을 든 것이다.
시작은 사소하고 별 볼 일 없는 인연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사랑이 싹트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고건룡이 다시 출전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엿새.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이었으나 두 사람은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다.
-반드시 돌아올게. 그러니 부디 죽지 말아다오.
-기다릴게요. 그러니 당신도 죽지 말아요, 제발.
두 사람은 짧은 작별과 기약을 다지고 헤어졌다.
아쉽게도 기적은 없었다. 그가 떠난 직후 최후의 작전이 벌어졌고, 꼭 살아서 보자는 약속은 젖은 종이처럼 맥없이 찢어졌다.
고건룡은 2회차 인생을 맞았다. 돌아온 시점의 그는 어리고 힘없는, 평범한 초등학생이었다. 그는 곧장 수진을 찾아 나섰지만 쉽지 않았다.
얼마 안 가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수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그녀가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22살이 된 해 한국으로 와 헌터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성이 이 씨라는 걸 안 것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고건룡은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수진을 찾아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렀다.
그는 최후의 일원들과 결탁해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수소문하던 수진을 찾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건룡은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그리운 애인 아닌 싸늘한 무덤 한 덩이였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수진은 헌터로 활동하던 중 극심한 부상을 얻었고, 치료에 치료를 거듭했지만 끝내 죽어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인 안동의 어느 부지에 묻혔다.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은 고건룡은 절망했다. 자신과 최후의 일원들로 인해 변동된 역사가 그녀를 죽여 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고건룡의 제1 목표는 수진을 되살리는 것이 되었다.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 지난날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른대도 상관없어. 우리는 끝내 다시 만났고, 지금부터 새로운 시간을 함께 만들어가면 돼. 이제 우리를 방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사랑해 수진. 영원히 너만을…….”
“이 미친 새끼, 뭐라고 씨부렁대는 거야?”
고건룡의 고개가 번뜩 돌아갔다. 그의 눈이 확장되고 입은 저절로 벌어졌다.
그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너, 네가 어떻게……?”
“물어 뭐 하냐. 죽은 부하 복수하러 왔다.”
자신이 죽여 버린 사내가 멀쩡히 서 있다.
고병갑은 눈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뭐해? 자세 잡아, 씹새야. 딱 죽은 사람 숫자만큼 죽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