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47화 (147/151)

147화 결전

에아. 정령 중에서도 니피족인 그녀는 세계의 법칙을 거스르는 권능을 지니고 있다. 이론적으로만 따지면 낮과 밤을 뒤바꾸는 것도 가능하단 말이다.

그러나 권능을 펼치는 대가가 시전자의 수명이기에 단 한 명의 니피가 자연의 거시적인 섭리를 역행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그렇다면 단 한 명의 니피가 행할 수 있는 가장 찬란한 기적은 무엇일까? 노회한 정령 쿤타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로드의 주검을 지키는 고블린들 또한 이내 알게 되었다.

에아의 몸이 빛에 휩싸였다. 태양보다 환하면서도 눈부심이 없는 신비한 빛이었다. 고블린들은 잠시나마 슬픔을 잊고 에아를 응시했다.

에아는 고병갑의 시신 앞에 섰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 슬픔이 아닌 아련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두세 차례 움찔거리더니 간신히 말을 뱉어 냈다.

「낯선 나를 친절하게 맞아 줘서 고마웠어요. 그간 당신들과 함께 지낼 수 있어서, 에아는 정말로 행복했답니다. 더는 여러분들에게 밥을 해 줄 수 없는 건 아쉽네요. …너무, 아주아주 아쉬워요. 조금 더 여러분과 오래 있고 싶었는데.」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쳐들었다. 이어서 팔등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작별은 웃으면서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갖은 애를 쓰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쪽을 지켜보는 고블린들을 바라보았다.

「여러분, 부디 내 몫까지 잘 살아 줘요. 식순이 에아는 이제 작별이랍니다.」

「어어? 에, 에아. 왜 그러나? 작별이라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고블린들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눈치 빠른 이들은 그녀가 무엇을 할 심산인지 알아차렸다.

「하나 바라건대 나를 당신들 묘지에 묻어 주세요. 에아는 그거 하나면 족하답니다.」

「무슨? 헉!」

일순 에아의 빛이 고병갑에게 옮겨졌다. 그 과정은 아주 급진적이어서 금세 끝났다. 구경꾼들 입장에선 어? 하는 사이에 무언가 벌어진 것이다.

빛을 잃은 에아가 힘을 잃으며 쓰러졌다.

곁에 있던 쿤타는 즉시 그녀를 안아 들었다. 하나 그녀에게서는 더 이상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쿤타는 에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울면서 웃는, 엉덩이에 뿔이라도 날 법한 표정이다.

쿤타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웃으며 갔구려, 동포여. 당신의 명이 헛되지 않길 바라 오.」

「쿠학!」

「로, 로드시여!」

빛이 옮겨진 고병갑이 격한 기침을 토했다. 허리가 휘어지고 가슴이 들썩거릴 만큼 격동적이었다. 죽은 로드가 살아 움직이니 고블린들이 기겁하며 몰려들었다.

갑작스레 인파가 쏠리는 것은 좋지 않다. 쿤타가 목소리에 권능을 담아 외쳤다.

「모두 진정하시오! 당신들 왕을 깔아뭉갤 작정이요?」

「아아…….」

쿤타는 곁눈질하며 고병갑의 상태를 살폈다. 숨이 트였다곤 하나 호흡이 미약하고 몸 상태는 최악이다. 저대로 놔두면 에아의 희생이 수포가 될지도 모른다.

「경단을 지닌 자가 있소? 당신들 왕이 숨넘어가기 전에 경단을 가져오시오!」

「아, 알겠다!」

「나 가지고 있다!」

「앞으로 나오시오! 다들 비켜서요! 길을 열란 말입니다!」

길이 열리고 경단이나 포션 등을 소지하고 있던 고블린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경단을 제 입으로 씹어 고병갑에게 먹였다. 창고에 적재해 놓은 여분의 포션도 가지고 와 로드의 입에 털어 넣는다. 변변찮게나마 치유술을 쓸 줄 아는 이들은 사력을 다해 힐을 했다.

으깬 두부 같았던 고병갑의 몸이 서서히 회복되었다. 반쯤 함몰되어 처참하던 안면도 차츰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과하다 싶을 만큼의 치료 행위가 이어졌다.

대략 20분 뒤에 고병갑은 말끔한 모습이 되었다. 피 섞인 기침도, 앓는 신음도 이젠 없었다.

가볍게 오르내리는 가슴께가 호흡이 안정됐음을 알려 주었다. 모두가 오매불망한 가운데 고병갑이 천천히 눈을 떴다.

「로드시여!」

「로드가 깨어나셨다! 로드께서 깨어나셨어!」

「우와아아아!」

광장을 채운 것은 거의 함성이었다. 누구는 감격스러워 포효하고 누구는 주저앉아 울었다. 오만 가지 소리와 감정이 뒤섞여 광장을 들썩이게 했다.

고병갑은 머리가 울려 대는 탓에 그만두라고 외치고 싶었다. 아쉽게도 그럴 기운은커녕 숨 쉬는 행위만 해도 벅찼다.

다시 몇 분간의 안정 후 그가 상반신을 일으켰다. 에아를 가지런히 눕힌 쿤타가 고병갑을 도와주었다.

「정신이 좀 드시오?」

「…….」

고병갑의 눈동자가 멍하다. 그는 틀린 그림 찾기라도 하는 양 쿤타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사위를 훑었다.

여긴 발타드렌인데… 내가 아스빌람에 온 것인가? 언제?

그가 이번엔 제 몸을 내려보았다. 근육질의 몸은 약간의 흉터를 새기고 있을 뿐 깨끗했다. 치료까지 돼 있다고?

고병갑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도르마, 거기 있냐. 이게 어떻게 된… 아.」

그는 습관적으로 도르마를 찾다가 탄식했다. 문득 날 선 비수가 그의 몸과 마음을 난도질했다. 그 비수의 이름은 현실이었다.

「아… 아… 이런 씨이팔…….」

도르마는 죽었다. 어디 그뿐이랴? 다 죽었다, 다!

자신들은 실패했다. 끝내 마드무트를 막아 내지 못하고 전멸한 것이다. 거기엔 의의도 뭣도 없었다. 그저 개죽음이다.

고병갑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쿤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보시오, 이래저래 심란할 거라 짐작하오. 일단 마음을 좀 가라앉히시구려.」

「…에아는 왜 저기 누워 있는 겁니까.」

그의 동태 눈에 에아가 들어왔다. 그녀는 반듯하게 누워 깍지낀 손을 배에 얹어 놓았다. 언뜻 잠을 자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고병갑은 그녀에게 깃든 오묘한 적막을 금세 눈치챘다. 오직 죽은 자만이 내뿜는 기분 나쁜 침묵.

쿤타는 말을 삼켰다. 지금 상황에서 사실대로 줄줄 읊는 것이 바람직한가 고민했다.

고병갑은 대답을 기다리다 지쳐 몸을 일으키려 들었다. 그가 휘청이자 쿤타가 얼른 제지했다.

「그냥 앉아 있으시오.」

「에아가 왜 저러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죽었소.」

고병갑은 1초간 침묵했다.

「…왜 죽었습니까.」

「당신을 살리기 위해 죽었소. 당신은 죽은 채로 이곳에 실려 왔고, 모두 당신의 죽음을 슬퍼했소. 에아도 마찬가지였지. 그리고 그녀는 모두의 슬픔을 자기 혼자 감당키로 한 거요.」

「왜… 왜 말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무슨 권리로 그녀의 선택을 말린단 말이오? 내게 책임을 전가하지 마시오.」

고병갑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의 손에 뜨뜻한 액체가 묻어 아래로 흘렀다.

“씨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좀 해 보시오. 당신의 부름을 받아 나갔던 고블린들은 어떻게 됐소? 다른 인간들은?」

고병갑은 그냥 다 짜증이 났다. 옆에서 쫑알거리는 쿤타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고블린들도.

마드무트도, 죽어 버린 부하도, 자신을 살리고 죽어 버린 에아를 포함해 이 모든 상황이 짜증 났다.

하지만 어리광부릴 수 없었다. 되살아난 이상 그는 왕이었다. 그는 투정이나 부려 대는 폭군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잠자코 지난 일을 들려주었다.

사실 쿤타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여 놀라 자빠지거나 발을 동동 구르는 대신 준비했던 질문을 하였다.

「이제 어쩔 작정이오?」

까뜨득! 고병갑이 이를 갈았다. 이제 어쩔 작정이냐고? 빌어먹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가 눈을 부릅뜨며 쿤타를 쏘아보았다. 쿤타는 숨을 집어삼키며 두세 걸음 물러났다. 만연한 살기에 곁을 둘러싸던 고블린들도 호흡을 잊었다.

「왜… 왜 그러시오?」

고병갑은 이내 살기를 거두고 눈도 내리깔았다. 쿤타는 무안한지 헛기침을 해댔다.

「그, 그래. 몸도 마음도 안정을 취해야 할진대 내가 자꾸 귀찮게 했구려. 노파심에 그런 것이니 부디 용서하시오. 일단 거처로 자리를 옮기는 게…….」

「끝입니다.」

「…뭐라고 했소?」

「이제 싸움은 없다는 말입니다.」

랜드리올은 소멸하기 전 말했었다. 복수이니 뭐니 그런 것에 얽매이지 말고 조용히 살아가라고.

그 말이 맞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인류를 수호한단 말인가. 자신이 정의의 사도인 것도 아니고. 그냥 대충 아스빌람에서 고블린들과 살다가 그렇게 가면 되는 것이다.

비록 아끼는 열두 부하를 잃었지만 이곳엔 아직 수천 명의 고블린이 있다. 그들과 농사를 짓고 가축도 키우며 독야청청 살아가자. 고병갑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안 돼에에!!>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 호통쳤다. 까무러칠 만큼 커다란 고성이었으나 그걸 들은 자는 고병갑뿐이었다.

그는 말을 걸어온 존재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가 몸에 들인 악마의 한 조각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런 녀석도 몸 안에 있었지.

<약속했잖아! 마드무트의 몸뚱이를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넌 약속을 지켜야 해. 그러지 않는다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릴 테야!>

끔찍한 협박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고병갑은 이마를 짚으며 내면세계로 침하했다.

그곳엔 몸집을 잔뜩 부풀린 악마가 한 마리 있었다. 고병갑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악마는 고병갑을 보자마자 잡아먹을 듯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는 거야!>

“…제길, 네놈도 봤을 거 아니야? 난 최선을 다했어.”

<시끄러워! 잔소리하지 말고 가서 싸워! 싸워서 마드무트를 죽이고 그 거죽을 우리에게 바치란 말이야!>

“이… 염병할 새끼가……. 부하들, 동료들, 심지어 나도 한 번 죽었다가 방금 되살아났어. 이런 상황에서 뭘 더 하라는 거야! 적이 너무 강하다고! 그 개자식을 무슨 수로 이겨?”

<우리 중 한 조각이 소멸하면서 너한테 힘까지 줬어. 그런데도 왜 못한다는 거야? 어째서 약속을 어기느냐고!>

“아가리 닥쳐! 정 답답하면 네들이 직접 싸우던지!”

<저번에도 말했듯이 우리는 이곳에서 나갈 수―>

“이런 개썅! 저 위쪽에서 가만히 배나 긁는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힘이라도 더 보태 주고 싸우라 말라 떠들란 말이야!”

고병갑도 지지 않고 씩씩거렸다. 솔직한 말로 인제 와서 더 물러설 벼랑도 없었다.

적반하장의 태도에 악마는 당황한 듯 보였다. 녀석은 할 말이 없는 건지 아니면 하고픈 말이 너무 많은 건지 입술을 들썩거렸다.

그 사이로 뭔가 새어 나오기 전, 고병갑이 한마디 덧붙였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 그런데 네가 윽박지른다고 안 되는 게 되지는 않아.”

<…….>

“싸움 좀 하는 부하들은 다 죽었어. 남은 애들을 모조리 끌고 간들 승산이 있을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야. 마드무트의 손짓 한 번에 지푸라기처럼 쓸려 나갈 거라고.”

처음 분노에 차 있던 악마는 이제 시무룩해 보일 지경이었다.

“나도 마트무트 그 개자식을 찢어발기고 싶어.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다고. 그러니까…….”

그건 고병갑의 본심이었다. 랜드리올은 조용히 숨죽인 채 살라고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죽은 부하와 동료들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고병갑은 한참 뜸 들이다가 이어 말했다.

“나를 조금만 더 도와줘.”

<도와 달라고? 더?>

“힘을 더 줘. 놈을 잡을 수 있을 만큼 강대한 힘을 내게 달라고. 너희 중 한 조각이 소멸했다고 했나? 필요하다면 백 조각이라도 소멸시켜서 내게 힘을 달란 말이야.”

<그럴 순 없어! 우린 오랫동안 공존했고, 그 어느 부분도 더 잃고 싶지 않아. 너는 무슨 살점 한 조각 떼 준다는 듯이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멍청이들! 잘 생각해. 어차피 너희도 이번이 아니면 영영 마드무트를 잡을 수 없을 거야. 너희에게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

“이대로 기회를 날려 버리고 싶어? 그걸 원한다면 너희 멋대로 해. 나도 협조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내가 너의 모든 것을 앗아 갈 거야!>

“제기랄. 맘대로 하라고! 인제 와서 더 잃을 것도 없으니까!”

거짓말이었다. 고병갑은 아직 잃을 게 많았다.

아스빌람에 남아 있는 고블린들, 정령들, 인간들. 그리고 어머니와 망자의 유지. 그것들은 여전히 소중했으니 그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이것은 도박이었다.

악마는 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놈이 다시 입을 연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알겠어.>

녀석이 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병갑은 그것을 알아들었으나 일부러 되물었다.

“뭐라고? 알았다고 했나?”

<그래, 알겠다고! 네게 우리의 조각을 더 떼어 주겠어. 하지만 그냥은 줄 수 없어.>

“그냥 줄 수 없다면… 내게 뭘 원한다는 거냐?”

<맞아.>

악마가 다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내면세계라 그런지 악마 특유의 썩은 내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입을 타고 전해지는 서늘한 입김은 피부를 축축하게 만들었다.

놈이 말했다.

<네 말대로 힘을 더 주겠어. 대신 네가 가진 신의 저장고와 지혜의 나무를 우리에게 넘겨. 그게 조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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