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미안하다.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고병갑의 몸에 자리 잡았던 랜드리올의 영혼이 빠르게 옅어졌다. 긴 흑발과 근육질의 몸, 야만적임과 동시에 고결한 육신은 녹은 빙산처럼 무너져 내렸다.
고병갑은 본인의 내면세계에서 그 광경을 보며 비명 질렀다.
<시발,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이대로 사라져 버리면 다냐고!>
오만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분노, 슬픔, 원통, 비탄. 고병갑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순간에도 랜드리올은 사라져 가고 있었다. 고건룡이 강제로 그의 영혼을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고병갑은 무너지는 랜드리올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안 돼, 이대론 못 보내! 너 때문에 죽은 내 부하들 다 살려 내던지 아니면 저 마드무트 개썅 새끼를 찢어 버려! 그전까진 멋대로 사라질 생각 하지도 말라고!>
랜드리올은 반사적으로 항변하려 했다.
부하들은 자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제왕을 지키기 위해 그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한 행동의 결과라고. 그리고 원래부터 신하란 왕을 위해 죽고 사는 것이라고.
‘후후…….’
하나 랜드리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결국 신하들을 사지로 내몬 것은 본인이었다. 인제 와서 이 주제로 언변을 벌여 봤자 때늦은 아우성에 지나지 않았다.
‘미안하다.’
마드무트와 두 번째 전투가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패배를 맛보았다. 남은 것은 그뿐이었다. 두 번이나 패전한 왕이 왈가왈부 입을 놀려 봤자 우스울 뿐이다. 그래서 그저 사과했다.
‘미안해.’
<이런, 씻팔! 미안하단 소리 집어 치… 아! 아아…….>
고병갑이 붙잡고 있던 어깨마저 으스러졌다. 이제 랜드리올은 목과 얼굴뿐 남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끝을 직감했다.
랜드리올은 입마저 사라지기 전, 마지막 말을 뱉어 냈다.
<무한의 번영도, 일각의 복수도 실패했으니 어찌 내가 글러 먹은 왕이 아닐 수 있으랴. 이젠 네게 배 놔라 감 놔라 떠들어 대기도 민망하구나. 그럼에도 한 가지 마지막으로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혹 살아남거든 너를 따르는 백성을 데리고 조용히 살아라. 선선한 바람을 맞고, 깨끗한 물을 마시며 그런 것을 소중히 여기며 안빈낙도한 삶을 살아라. 내 비록 실패했으나… 아니, 실패했기에 삶의 덧없음을 깨닫는다. 부디 나와 같은 전철을―>
랜드리올은 끝내 말을 마치지 못하고 소멸했다. 컴컴한 내면세계 어디에서도 그의 존재감을 찾을 수 없었다.
사라졌다. 정말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고병갑은 가슴이 뻥 뚫린 것 같다는 감상을 받았다.
랜드리올의 공백 때문만이 아니었다. 깨어나도 더는 아끼는 열두 부하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엄청난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혼자… 혼자 남았다…….>
도르마, 도란, 키리얀, 투르카… 고붕이.
그들은 모두 죽었다. 랜드리올처럼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인간들도 다 죽었다. 그런데 자기 혼자 깨어나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고병갑은 일부러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가길 거부했다. 웅크린 채 내면세계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끔찍한 고통이 뇌를 태울 듯 전해졌다. 아무래도 현실의 몸뚱이가 지독한 짓을 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얼른 깨어나 대처를 했을 터다. 하지만 고병갑은 의욕이 없었고,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죽음이 그를 덮쳤다. 몸도 마음도 죽음의 그늘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다음 순간. 고병갑은 죽었다.
* * *
“희한하군.”
고건룡은 랜드리올의 영혼을 뽑아냈다. 뽑아낸 뒤 갈가리 찢었다.
과거의 망령이 무슨 수로 시공을 뛰어넘어 이곳까지 쫓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는 어떤 식으로든 부활할 수 없을지어다.
그런데 영혼을 뽑아낸 후에도 육신은 죽지 않고 버텼다. 흔한 경우는 아니나 가능한 일이다. 아무래도 몸에 또 하나의 영혼이 머무는 모양이지. 마치 자신처럼.
그래서 심장을 터뜨렸다. 고건룡은 눈앞의 사내가 죽는 것을 똑똑히 확인했다.
“후하.”
고건룡은 이 일대에 퍼뜨린 카르마 역장을 거두었다. 마드무트의 존재감도 한층 누그러뜨렸다. 그는 다시 인간 고건룡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참아 왔던 진땀이 쏟아지며 다리가 풀렸다. 그는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아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았다.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제… 기랄. 별의별 것들이 다 방해를 해대는군.”
상처는 카르마를 덮어 대충 조치했다. 가만히 두면 위급할 수도 있는 상처이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인간의 몸 따위 곧 의미 없어질 테니까.
“끄으으.”
그가 무릎을 달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틀어 위를 보았다.
만신창이가 된 신성 전사 에락센이 이쪽을 내려보고 있었다. 나머지 세 마리는 모두 죽었다.
쯧, 한심한 것들 같으니.
“그녀를 꺼내라.”
고건룡이 읊조리자 에락센의 가슴에서 반투명한 구체가 튀어나왔다. 그 안에는 한 명의 여인이 들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수진. 고건룡이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다.
고건룡은 애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움과 기쁨 등의 감정이 눈과 입, 얼굴의 주름에서 요동쳤다. 곧 살아 있는 수진을 만나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메마른 줄 알았던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그곳에서 살자. 안식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영원토록 살아가는 거야.”
고건룡은 수진을 품에 안고 자리를 조금 옮겼다. 전투의 파장이 비교적 적게 미친 곳이다. 양지바른 곳에 애인을 눕혔다. 그리고 말했다.
“곧 네 염원이 달성될 터이니 약속한 대로 내 소원을 들어줘라.”
듣는 이는 단 한 명이었다. 그의 내면에 있는 마드무트가 긍정의 신호를 보냈다.
고건룡의 몸에서 신비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건 카르마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말을 뱉었다.
「죽음에서 부활은 혼돈이기에 내가 추구하는 질서에 위배되는 일이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원하는 바를 들어주마.」
이윽고 믿기 힘든 광경이 연출됐다. 땅에서 무언가 몽글거리며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얼핏 도깨비불 같기도 하고, 커다란 반딧불이 같기도 했다.
크기는 주먹만 하고 발광하는 색채는 저마다 달랐다. 어느 것은 거무스름하니 칙칙하고, 어느 것은 푸르고 깨끗하게 빛났다.
그런 것이 족히 수십만 개였다. 어쩌면 더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시야를 가득 채울 만큼 많은 것만은 자명했다.
“이것이… 전부…….”
「그렇다. 이곳에서 생을 갈무리한 망자들의 영혼이다. 수진이 이 근방에서 죽은 것이 확실하다면 그녀의 영혼도 저 중에 있을 것이다. 영혼들이 아직은 경황이 없어 하는 것 같다만, 곧 살아 있는 육신을 향해 벌떼처럼 몰려들 것이야. 이곳에 살아 있는 육신이라 봤자 우리와 수진뿐이지. 그러니 그녀의 영혼이 엄한 몸에 들어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의 몸에 엄한 영혼이 들어가는 것만 경계하면 돼.」
“수진의 영혼인지, 타인의 영혼이지는 어떻게 구별하지?”
「그 일은 내가 할 테니 신경 쓰지 마라. 흠, 벌써 몰려들기 시작하는군.」
마드무트의 말대로였다. 하늘에 두둥실 떠오른 엄청난 수의 영혼들이 이곳을 향해 몰려왔다. 그 모습이 마치 유성우가 쏟아지는 듯했다.
고건룡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저 영혼 중에는 최후의 18인의 영혼도 있을 테지.
고건룡은 문득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실토하자면 그는 최후의 일원들을 속여 왔다. 사실 천상에 오르는 방주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수진을 되살리기 위해 지어낸 얘기란 말이다.
최후의 일원들은 고건룡의 사적인 욕심 때문에 희생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사무칠 정도로 막 미안한 건 아니었다. 그저 이제껏 합을 맞춰 왔던 동료들이건만 너무 맥없이 죽은 것이 유감일 뿐.
그래서 그들도 좀 살려 줄 수 없겠느냐고 물으려 했다. 마드무트는 이미 고건룡과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그의 의중을 바로 알아채고 대답했다.
「불가하다. 수진은 텅 비어 있긴 해도 명명백백 살아 있는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영혼을 들일 수 있지. 오히려 영혼을 정착시키기엔 최적의 상태이다. 하지만 네가 떠올린 그들은 몸이 죽어 영혼이 떠나간 자들이다. 죽은 몸에 억지로 영혼을 집어넣은들 되살아나지 않아.」
“그런가…….”
「혹 천상에 오른 뒤 외로울까 싶어 걱정하는 것이냐? 그 부분은 우려할 필요 없다. 그곳은 외로움도 무료함도 없는 곳이다. 오직 쾌락과 안식만이 존재하지. 너와 수진은 거기서 나와 함께 영원토록 살아가면 된다.」
“알겠다. 얼른 수진이나 되살려다오.”
마드무트는 입을 다물고 집중했다. 점점 더 많은 영혼이 이쪽을 향해 몰려왔고 마드무트는 부합지 않는 것들을 간단히 날려 버렸다.
일부 영혼은 수진에게 스며드는 것을 포기하고 고건룡에게 직접 침투하려 들었다. 하지만 한낱 인간의 혼이 신을 담은 그릇에 내려앉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됐을 때의 일이었다. 영혼 중 일부가 다른 쪽으로 튀었다. 고건룡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마드무트는 달랐다.
마드무트가 별안간 소리쳤다.
「살아 있는 인간이 있다! 어찌 된 일이냐? 모두 죽이라고 했을 텐데!」
“뭐?”
그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그의 눈에 무언가 이질적인 장면이 담겼다.
고블린.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를 작은 고블린이 한 인간 사내를 둘러업은 채 부리나케 내달리고 있었다.
고건룡은 그 사내가 낯이 익었다. 그럴 수밖에. 그는 랜드리올이 빙의했던 자였다.
고블린이 달리는 경로 끝에는 정체불명의 포탈이 열려 있었다. 포탈 옆에는 한 여성이 널브러져 있었고.
고건룡의 눈이 일그러졌다.
“서시희이이!!”
고건룡은 즉시 카르마 덩어리를 만들어 그리로 쏘았다.
「께엑!」
고블린은 간발의 차로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포탈은 곧장 닫혔고, 카르마 덩어리는 홀로 널브러진 서시희를 덮쳤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그녀는 신음조차 흘리지 못했다. 감지 못한 눈에서 피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저 빌어먹을 여자가 끝까지…….”
고건룡은 서시희의 수작질이 영 못마땅했다. 죽은 줄 알았는데 되살아난 것만 이번이 몇 번째란 말인가? 하여간 귀신 같은 여자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시체를 지근지근 밟아 형체조차 남지 않게 으스러뜨리고 싶었다. 그가 정말로 그러지 않은 건 보다 급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빨리 수진을 되살리고 천상계를 구성한 뒤 그리로 올라야 한다. 지금부터는 1초의 시간도 낭비할 수 없었다.
고건룡은 애써 잡념을 떨치고 다시 수진에게 집중했다. 영혼이 모여들고 있었다.
* * *
「흐아아앙!」
「흐헝헝! 로드시여!」
발타드렌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아스빌람의 모든 고블린이 광장에 모여 울부짖었다.
그들의 정 중앙에는 고병갑이 누워 있었다. 얼굴이 내려앉고 사지육신이 곤죽이 된 고병갑이.
“아… 아아…….”
「왕대비시여!」
「왕대비를 부축해 드려라!」
고병갑의 어머니인 박영옥은 아들의 시신을 보자마자 기절해 버렸다. 고블린들은 꺽꺽거리는 그녀를 부축해 편안한 곳으로 옮겼다.
고병갑의 죽음은 일파만파 퍼졌다. 정령들도, 아스빌람에 잔류하던 인간들도. 모두 그의 주검 앞으로 모여들었다.
고블린들과 달리 인간들은 여러 다른 요인으로 근심했다. 전쟁에서 진 것일까? 고병갑이 죽었으니 이제 다신 지구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일까? 등등.
「허어… 어찌 이리 참혹한 꼴을 당하셨소.」
정령들의 우두머리 쿤타는 고병갑의 주검을 앞에 두고 길게 탄식했다.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그의 몸은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려 주었다.
「그러니 내가 말하지 않았소! 미약하게나마 정령들도 힘을 보태겠다고! 그랬다면… 그랬다면 그대가 이런 참변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잠시만요! 비켜요! 비켜 주세요! 지나갈게요! 비켜 달라고요!」
그때였다. 광장을 가득 채운 인파를 비집으며 누군가 다가왔다. 낭랑하고 처절한 목소리에 쿤타의 시선 역시 자연스레 옮겨졌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정령 에아였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사랑했고, 그 탓에 줄곧 부엌에 있느라 소식이 늦은 모양이었다.
「헉!」
고병갑의 시신을 확인한 에아가 숨을 집어삼켰다. 그녀의 몸이 와들와들 떨리더니 이내 무너져 내렸다.
쿤타가 그녀를 부축하려 다가갔다. 그런데 그 전에 에아 스스로 일어나더니 고병갑에게 달려들었다.
「이봐요, 당신! 죽었어요? 정말 죽은 거냐고요? 흑! 흐윽! 다 죽은 거예요? 도란도, 도르마 씨도, 키리얀 씨도 다 죽은 거냐고요!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좀!」
「에, 에아. 진정하시오.」
「흐아앙! 안 죽고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왜 죽었어요, 왜! 흐으앙!」
에아가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고블린, 정령, 인간의 울음이 뒤섞인 이곳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이 눈물비가 언제나 돼야 그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고병갑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던 에아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아득한 슬픔 외에도 비장한 결의가 엿보였다.
지척에 있던 쿤타만이 그녀의 보이지 않는 결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보시오, 에아! 무슨 짓을……!?」
다음 순간,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에아의 몸이 빛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