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결전
「내 수급을 취하겠다? 흐하하하!」
고건룡이 격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즐거움이나 산만함이 아니었다. 아주 짙은 살기였다.
이윽고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가 이 일대를 뒤덮었다. 여느 범인이라면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혼절할 만큼 음험했다.
「그때도 본좌를 당해 내지 못하였는데 인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으스대지 마라, 마드무트. 네놈은 약해졌다. 악마에게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이 먼 타계까지 꽁무니를 뺀 주제에 무엇이 그리 당당한가?」
고건룡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악마라는 단어에 반응한 것이었다.
네 명의 신성 전사가 묘하게 몸을 꿈틀거렸다. 랜드리올과 열두 영웅은 그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대비했다.
「내가 남긴 찌꺼기를…….」
「악마를 지상으로 불러들인 것이 바로 나다. 네놈이 그네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나도 조금 놀랍더군. 아니, 실망스러웠다고 해야 하나? 네놈이 그만큼 별 볼 일 없다는 의미니까.」
「…그랬나. 그래, 그랬던 거로군. 이제야 알겠다. 왜 나의 찌꺼기가 자아를 가지고 멋대로 활개 치나 했는데, 배후에 네놈이 있었구나.」
이제 고건룡은 맹목적으로 노기를 발산했다. 그가 발산하는 카르마가 땅 위의 모든 것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땅의 잡초가 메마르고 콘크리트 건물이 삭아 무너졌다.
「네놈은 땅 위의 피조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네들이 악마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은 거대한 혼돈이다. 그들로 하여금 조성된 혼란은 이제 얽히고 꼬여 풀 수 없는 지경이 됐지. 날 보고 도망쳤다고 했나? 틀렸다. 나는 이곳에서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려는 게야. 네가 주제도 모르고 어지럽힌 세계의 법칙을 다시 짜 맞추려 한다는 것이다!」
「네놈 사정 따위 내 알 바가 아니다. 나는 그저 네가 죽인 내 백성과 처의 복수를 할 뿐이지.」
「오만하고 무지하며 무책임하고 거만하구나. 그때 네놈들의 멸족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것이 천추의 한이다. 그리고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다.」
고건룡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몸짓이 도화선이 되었고, 네 명의 신성 전사가 일제히 흉기를 찌르고 들어왔다.
그 길이만 해도 수십 척에 이르는 검, 창, 도끼, 몽둥이는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같은 표적을 노렸다.
같은 거구의 여섯 그러글이 얼른 랜드리올 일행을 감쌌다. 하지만 그들의 살점은 잘리고, 꿰뚫리고, 으깨지고, 으스러지며 별다른 효용을 발휘하지 못했다.
랜드리올과 트로바틴, 그 외 방어술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이 합심하여 방어진을 전개했다. 곧 쇠붙이와 보호막이 격돌하며 굉음을 냈다.
「제왕이시여!」
누군가 소리쳤다. 랜드리올에게 용무가 있어 부른 것이 아니라, 정면에서 들이닥치는 공격을 알리기 위한 외침이었다.
정면으로 거대한 덩어리가 날아들고 있었다. 그래, 덩어리. 그 외 단어로는 표현하기 껄끄러운 카르마 뭉치였다.
인지는 빨랐으나 대응까지 그렇지는 못했다. 카르마 덩어리는 충차라도 되는 양 보호막 전면부를 들이받았다. 보호막은 산산이 조각났고, 그 안에 몸을 숨기던 열세 명은 수류탄 파편처럼 비산했다.
하지만 고작 그것으로 허망하게 죽었다면 영웅이란 수식어가 붙지도 않았으리라. 열세 위인은 빠르게 자세를 다잡고 각자의 전투를 준비했다.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적은 모두 거인이었다. 고건룡은 그 외견만 보면 거인이라 부를 수 없었지만 그가 부리는 힘은 분명 거시적인 것이었다.
거인은 크다. 그들이 휘두르는 무기도 크다. 그러니 날아드는 공격 하나하나가 위력적이고 무식했다.
랜드리올은 그러글을 부려 신성 전사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싶었다. 그사이 자신과 부하들이 일제히 마드무트를 노리면 일말의 승산이나마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느 신성 전사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에락센이 커다란 난관이었다.
에락센은 벌써 그러글 두 마리의 목을 벤 참이었다. 그러글의 몸뚱이는 대가리를 잃었어도 버둥거렸지만 몸이 두 자릿수 이상으로 쪼개진 뒤부터는 돌멩이만큼의 미동도 없었다.
놈은 또 한 마리의 그러글의 목을 잡았다. 손아귀가 오므라지자 목이 젤리마냥 으스러졌다.
지금에야 어찌어찌 그러글들이 신성 전사를 묶어 두고 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그리고 저 거구들을 묶어 둘 고기 방패를 잃는 순간 낙장불입이다.
랜드리올은 짧게 생각했다. 생각하고 판단했다.
「모여라!」
「예!」
그가 산개한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마드무트를 쳐라! 라고. 13명은 하나가 되어 마드무트에게 돌격했다.
고건룡은 뒷전에 물러나 눈을 감고 있었다. 미동조차 없었기에 명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내면의 힘을 서서히 일깨웠다.
그의 본질이 인간 고건룡에서 신 마드무트에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가 제3의 눈을 뜬 순간, 일이 벌어졌다.
고건룡의 발치에서 카르마가 솟구쳐 나왔다. 유전 수백 개가 동시에 터진 것처럼 방대한 양이었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이 일대를 뒤덮었다.
비유하자면 반경 수 킬로의 구역이 어항이 된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어항을 채운 게 물이 아니라 카르마였다는 점이다.
랜드리올과 영웅들은 고건룡에게 열 걸음 정도 남겨 둔 자리에서 같은 감정을 느꼈다. 불길함. 조금 더 저속하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좆됐음을 느꼈다.
「으극……!」
「모, 몸이…….」
랜드리올과 열두 영웅은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몸이 무거웠다. 몸 마디마디에 억만 근의 추를 매단 듯했다. 외압에 짓눌린 것은 그러글들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서 쿵! 쿵!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글들이 못 참고 무릎을 꿇는 소리였다. 반면 고건룡과 신성 전사는 오히려 물 만난 물고기처럼 더욱 유려하게 움직였다.
「용케 버티는구나. 당장 땅과 하나가 되고 싶을진대.」
랜드리올은 다만 불타는 눈으로 고건룡을 쏘아보았다.
고건룡은 당장 끝내지 않았다. 신성 전사들도 그러글의 목에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붙여 놓을 뿐 일격에 썰어 내지 않았다. 일부러 죽이는 시간을 늦춘 것이다.
「자신만만하기에 뭔가 대단한 비책이라도 있을 줄 알았건만… 이 무슨 우스꽝스러운 꼴인가? 본좌의 힘 앞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주제에 내 목은 무슨 수로 떼어 간다는 게지?」
「…….」
고건룡은 랜드리올의 눈을 빤히 들여보다가 덧붙였다.
「눈빛이 좋구나. 과연 지상에서 보기 드문 눈빛이로고. 하지만 그것으로 본좌의 목을 떨굴 수 있을까? 뭐든 해 보아라! 왜 가만히 있는 것이야!」
랜드리올은 잘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들썩거리며 대답했다.
「네놈은… 명색이 신이라는 게 혓바닥이 참 길구나. 혓바닥으로 신격을 얻었나?」
「안타깝도다.」
「…안타깝다고?」
「그저 말뿐이지. 네놈의 그런 시건방진 행태가 허세라는 것을 본좌가 꿰뚫어 보지 못하리라 생각하느냐? 무언가 재미난 것을 보여 줄 거라 기대한 내가 어리석었다. 네놈은 일각의 시간도 할애할 가치가 없는 놈이었어.」
고건룡이 손을 들었다. 손날을 따라 카르마가 응집해 살벌한 비수를 만들어 냈다.
「허무한 죽음. 네게 어울리는 최후다, 오만한 것아.」
고건룡이 비수를 찔렀다. 그것은 빠르고 정확하게 랜드리올의 목을 노렸다. 그리고 그것이 닿기 전, 랜드리올은 말했다.
「트로바틴, 막아라.」
「예, 제왕이시여.」
트로바틴은 딱히 결의가 차지도, 비장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담담히 앞으로 나와 제왕의 앞을 막고 섰다.
트로바틴은 고건룡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도리어 손이 터져 나가며 그대로 심장까지 꿰뚫렸다. 하지만 제왕이 상처 입는 것만큼은 지켜 낼 수 있었다.
고건룡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어떻게?」
자신이 만들어 낸 영역, 농밀한 카르마로 가득 찬 영역에서 저리 태연하게 움직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도 그럴 게 좀 전까지만 해도 꼼짝도 못하지 않았던가.
고건룡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덩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신비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건룡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무슨 묘책을 부린 것 같지는 않은데…….
그때 트로바틴이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나를 강제할 수 있는 건 오직 제왕뿐이시다. 네놈이 제아무리 신이라고 한들 나를 구속할 수는 없다.」
「훌륭하군.」
고건룡은 그렇게 말하며 손의 카르마를 폭발시켰다.
펑! 후두둑! 트로바틴의 널찍한 상체에 커다란 바람구멍이 생겼다. 살점과 내장이 터지며 아래로 떨어졌다.
거구가 기울었다. 트로바틴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와중에도 매섭게 뜬 눈을 감지 않았다. 그가 반쯤 절단된 팔을 뒤로 팽팽하게 당겼다.
팔과 어깨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의 팔이 한계치까지 수축한 용수철처럼 쏘아져 고건룡을 때렸다.
「큭!」
고건룡은 팔을 교차해 공격을 막았지만 예닐곱 걸음 정도 밀려났다. 최후의 일격을 날린 트로바틴은 뒤로 넘어갔다.
그는 누운 채로 제왕을 올려 보았다.
「제왕… 이시여……. 그런 표정 짓지 마시옵소서.」
랜드리올의 얼굴은 슬픔에 물들어 있었다. 랜드리올의 의지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자타공인 최고의 왕이었다. 신하의 죽음에 일희일비하는, 여린 감성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는 까닭은 고병갑의 영향이 컸다. 고병갑은 속에서 미친 듯이 투르카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랜드리올은 그가 표면으로 나오는 것을 막았다. 이내 표정도 딱딱하게 변모시켰다.
「고생했다, 트로바틴. 너는 누가 뭐래도 우리의 심장이었다.」
「예……. 제왕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 습니다…….」
「지상 유일무이의 왕이 허락하노니, 영원하고 평안한 안식을 취하라.」
트로바틴은 행복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랜드리올이 마구 기개를 발산했다. 그 황금빛 물결은 남은 11명의 부하에게 스며들었다. 영웅들의 눈에서 찬란한 눈물이 흘렀다.
랜드리올이 외쳤다.
「짐이 명하노니, 그 무엇도 너희의 걸음을 막을 수 없을지어다. 그러니 저 간악무도한 마드무트에게 성흔을 남겨라. 그전까지는 죽음을 불허한다.」
「받들겠습니다.」
「존명.」
열한 명의 영웅이 카르마의 역장을 뚫으며 진격해 나갔다. 고건룡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좀 전까지는 꿈쩍도 못하던 것들이 고작 왕의 말 몇 마디에 움직인다고? 이건 마치 물고기를 뭍에 꺼내 놓고 헤엄치라 했는데, 정말로 헤엄쳐 버린 격이다.
「호오, 그래! 믿는 구석이 영 없던 건 아니구나! 오너라!」
고건룡이 사납게 포효했다. 그러글의 목에 흉기를 드밀던 신성 전사가 급히 무기를 내질렀다. 하지만 날 선 흉기가 그네의 목을 무지르기 직전, 그러글이 스스로 분열했다.
한 마리의 거대한 그러글이 수천, 수만 마리의 그러글로 나누어졌다. 마치 바퀴벌레 군체 같았다.
놈들이 신성 전사를 완전히 뒤덮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신성 전사가 새카만 기둥 같기도 했다.
“우어어―!”
“쿠허헉!”
신성 전사가 제 몸을 쾅쾅 치며 들러붙은 그러글을 쳐 냈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놈들은 거머리처럼 찰싹 붙어 야금야금 살갗을 갉아먹었다.
고건룡은 이미 그쪽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커다란 무력에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흐하하하! 유쾌하다. 재밌구나!」
사라나가 내력이 담긴 화살을 쏘았다. 고건룡은 공간을 가득 채운 카르마를 조작해 날아오던 화살을 도로 쏘아 보냈다.
에슬라가 시야를 혼동시키는 요술을 부렸다. 개뿔. 고건룡은 간단히 깨부순 뒤 카르마 격류를 일으켜 그를 덮쳐 버렸다.
아르히와 가슬라가 양쪽에서 찌르고 들어왔다. 고건룡은 양손을 펼쳤다. 보이지 않는 힘이 두 사라 온을 얽매더니 다음 순간 종잇장처럼 구겨 버렸다.
그 밖의 모든 이가 온 사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것이 고건룡에게 의미 있는 타격을 주던, 그렇지 못하던.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머리 위로 떴던 해가 차츰 넘어갔다. 죽은 신성 전사의 거죽 위로 그러글의 시신이 썩어 갔다. 지독한 악취와 피비린내가 도심에 요동쳤다.
「오늘 내가 끔찍하고 또 즐거운 일을 겪는구나!」
고건룡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몸은 아무리 낙천적으로 봐줘도 걸레 조각이었다.
찢겨 속살을 드러낸 피부, 부러진 뼈, 절단된 왼팔. 안구는 한쪽이 터져 나갔고, 머리 가죽은 벼락에 익어 아직도 김이 피어올랐다.
숨을 내쉬면 피도 딸려와 목을 울컥거리게 했다. 인간의 육체는 그만큼이나 불편했다.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파괴된 도심은 처참했다. 한때나마 이곳이 도심지였다고, 누구도 상상할 수 없으리라.
그 위로 널브러진 인영이 보였다. 그들은 자신보다 훨씬 심한 꼴이었다.
「본좌가 너희를 인정하노라. 너희는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벗어났다.」
앞전에 맞붙은 드래곤 계집도 만만치 않았다. 다만 그때는 기습을 당한지라 여러 악조건 속에 싸워야 했다.
반면 오늘은 원 없이 전력을 뽐냈다. 드래곤과 맞설 때 사용하지 못한 고유 영역도 조성했고, 곁을 보좌하는 신성 전사도 있다.
그런데도 이 지경이 되다니. 고건룡은 저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고건룡이 외팔을 들어 올렸다. 그 손엔 랜드리올의 머리통이 붙잡혀 있었다. 랜드리올은 얼굴 전반이 함몰되어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굳게 말아 쥔 검은 놓치지 않았다.
「마… 마드… 무…….」
「지상의 군주, 랜드리올아. 내가 너의 이름을 기억하마.」
고건룡은 랜드리올의 영혼을 뽑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