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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44화 (144/151)

144화 결전

신성전사 루디온이 검을 내리쳤다. 그 형태 때문에 검이라 이름 붙은 거물은 그러글의 손목을 단칼에 무질렀다. 대번에 손목이 절단된 그러글은 노기를 발산하며 반대편 손을 휘적였다. 그러나 루디온은 침착하게 몸을 수그려 회피했고, 다시 올리며 검을 찔렀다. 칼끝이 목을 관통할 듯싶었다.

“우으?”

칼끝은 그러글에 닿기 직전 멈추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아주 천천히, 인지할 수도 없을 만큼 느리게 전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거의 멈춘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성전사 루디온을 굼벵이처럼 만든 이는 사라온 제일의 요술사 에슬라였다.

루디온이 성난 기세를 마구 표출했다. 농밀한 카르마가 사방으로 용솟음치니 에슬라의 요술은 이내 깨졌다. 문제없다. 겨냥되었던 그러글은 이미 공격 궤도에서 벗어난 뒤였다.

그러글이 훌쩍 뛰어 루디온의 등에 올라탔다. 그 뒤 큼직한 아가리를 쩍 벌려 목을 물었다. 루디온은 발악하며 수족을 허우적거렸다. 놈이 발을 구를 때면 천지가 요동쳤다.

하슘블란트가 멀찍한 곳에서 주술어를 중얼거렸다. 이윽고 반경 100m 정도의 땅이 칠흑의 늪지로 변했다. 늪지에서 솟아난 것은 까맣고 거대한 구렁이들이었다. 구렁이들은 루디온의 팔과 다리, 더 나아가서는 목을 옥죄였다.

수족이 봉쇄된 루디온에게 그러글 세 마리가 옳다구나 달려들었다. 놈들은 각각 팔, 배, 허벅지를 붙잡고 게걸스럽게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네에게 이것은 전투가 아니었다. 그저 사냥과 포식의 일환이었다.

또 한 명의 신성전사 폰페이가 루디온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가 가려는 길은 고난과 역경이 가득한 가시밭길이었다. 폰페이를 막아선 것은 그러글 셋과 열 명의 사라온 영웅이었다.

“케기기기긱!”

“우워어―!”

폰페이가 제 키보다 큰 창을 휘둘렀다. 거구가 휘두르는 거대한 흉기는 재앙 그 자체이다. 저 몸짓에 사라온 수십만이 죽어 나가지 않았던가.

실로 위력적인 창은 날쌔게 뻗어 가며 그러글 한 마리의 얼굴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찌른 상태로 내리찍자 그러글은 세로로 쩍 갈라졌다. 폰페이는 다음 상대를 찾으려 눈을 부라렸다. 그때 그의 몸이 붕 떠올랐다.

거대화한 기간티나가 폰페이를 다리를 붙잡으며 태클을 건 것이다. 우당탕! 굉음을 내며 폰페이가 넘어졌다. 대적자 나이아드가 즉시 날아올랐다.

고붕이라는 몸에 빙의한 나이아드는 이 작은 체구가 그렇게 익숙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몸을 가득 채운 질긴 근육은 썩 마음에 들었다. 그가 폴암을 높게 쳐들고 뚝 떨어졌다.

폴암이 폰페이의 투구에 직격 했다. 투구는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깨져 버렸다. 폰페이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달래며 간신히 초점을 다잡았다. 그때 그의 눈에 번쩍이는 빛이 보였다. 다음 순간, 하늘에서 거대한 벼락 줄기가 곤두박질치며 내려왔다.

“꾸어어어!”

뇌제 가이안느의 벼락. 얼굴이 바싹 구워진 폰페이가 팔다리를 바들바들 떨었다. 녹아내린 안구에선 허여멀건 타액이 줄줄 흐른다. 그러글들이 잽싸게 들러붙어 그것을 빨아먹었다. 심지어는 세로로 쪼개진 녀석까지 땅바닥을 기며 폰페이의 육을 탐했다.

놈들의 식탐에 사라온 영웅들까지 혀를 내둘렀다.

「정말이지 끔찍한 생물이야.」

검신 아르히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저 비이성적이고 본능에만 충실한 생명체가 불쾌한 것이다. 그녀의 옆으로 트로바틴이 와서 섰다.

「그렇다 해도 아군이라면 이리 든든하지 않은가.」

「글쎄요, 트로바틴님. 저는 저들과 완전한 아군이 되지는 못할 듯합니다. 저들의 아가리가 언제 이쪽을 향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니까요.」

「일리 있는 말이군. 이만 마무리하세나.」

「네.」

영웅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들은 신성전사의 거대한 몸뚱이에 올라탔다. 그러곤 각자 한 부분씩 맡아 철저하게 파괴하기 시작했다.

무너진 건물 잔해, 자욱한 먼지구름. 아예 불모지가 돼 버린 도시의 한 구획.

루디온과 폰페이. 두 신성전사가 벌인 파장은 지대했지만 결국 영웅들의 손에 죽었다. 그 주검은 오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글이 모조리 먹어 치웠기 때문이다.

랜드리올은 뒤쪽에서 팔짱을 낀 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몇 번 발을 놀리는 것만으로 부하들에게 다가갔다.

「한 번 명장은 영원한 명장이라 했던가. 자네들 모두 예년의 위엄이 그대로 남아 있군.」

「제왕 앞에 부끄러움 따름입니다.」

「그놈의 겸양도 여전하고 말이야. 그나저나 이놈은 이제 못 쓰겠구만.」

랜드리올이 고개를 돌렸다. 세로로 쪼개진 그러글이 기이하게 몸을 꼬아 대고 있었다. 절단면에선 거무죽죽한 살점이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렸다.

「음?」

랜드리올은 나머지 여섯 그러글이 보내는 신호를 전달받았다. 그건 일종의 욕구였다. 아주 강렬한 욕구.

랜드리올이 고개를 내저으며 쓴웃음을 흘렸다.

「정말 못 말리는 족속들이군. 좋다, 먹어라.」

“끼에에엑!”

여섯 그러글이 반으로 쪼개진 그러글에게 달라붙었다. 그러곤 마구 뜯어먹기 시작했다.

랜드리올을 제외한 영웅들은 모두 경악하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도, 동족끼리도 잡아먹는 겁니까?」

사라 나의 얼굴은 핼쑥해질 지경이었다.

「이놈들은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둘로 나뉠 뿐이지. 신성의 살점을 맛보더니 식탐이 아주 폭발할 지경이로군.」

「그때 그 시절에 이놈들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랬다면 아스빌람이 그리 허망하게…….」

「어허! 사제여. 말을 조심하시오. 제왕의 앞입니다.」

환영의 가슬라가 파르파판의 말을 끊었다. 파르파판은 랜드리올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송구합니다. 제 방정맞은 입이 그만.」

「됐다. 틀린 말도 아니지. 그 치열했던 전장에서 우리가 상대해야 했던 적은 신성군과 아인 연합군만이 아니었다. 고독. …그래, 고독이란 거대한 적과도 싸워야 했지. 그때 이런 괴팍한 것들이라도 우리 편을 들어 줬더라면 결과가 바뀌었을까?」

랜드리올은 잠시 옛 기억을 회상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아련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드무트는 내게 이리 말했었지. 너희는 오만했다고 말이야. 인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랬던 것 같구나.」

「아닙니다, 제왕이시여! 제왕께선 언제나 옳으셨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런 말씀은……!」

「아니. 실제로 그렇다. 짐은 아인들이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것을 몹시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여 내가 만물 위에 군림하면 그런 투쟁 또한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지.」

「실제로 아스빌람에 평화가 내리지 않았습니까? 사라온의 통치 아래 아인들은 배부르고 등따습게 잘 살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것 자체가 오만이었다.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것 역시 자연의 굴레가 아니던가. 누군가 그 바퀴를 억지로 잡아 세워선 안 됐던 게야. 그러니 마드무트가 우리 사라온을 쥐잡듯 잡아댈 때 그 어느 아인도 우리 편에 붙지 않았던 것이지. 그들은 억압된 평화가 아니라 자유로움을 원했거든.」

열두 명의 부하들은 말을 삼켰다.

그렇지 않다고, 제왕께서는 위대한 일을 하신 거라고, 그저 아인들이 얍삽한 것뿐이라고. 끝내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마드무트가 선하고 악하고의 문제를 떠나 우리는 실제로 오만했고 이제 그 책임을 져야 한다. 보라. 사라온의 비극과 어긋난 복수심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 세계까지 위험에 빠뜨리지 않았는가.」

랜드리올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그의 눈은 일몰 직전의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그의 시선에 한 인영이 잡혔다. 건너편 건물 꼭대기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리고 사내의 뒤로 한 거구가 천천히 떠올랐다. 여느 신성전사보다도 1.5배가량 더 큰 덩치. 13번째 신성전사이며 가장 강한 전사 에락센이었다.

에락센이 팔을 높이 들었다. 그의 손엔 무언가 잡혀 축 늘어져 있었다.

일순 에락센의 팔이 흐릿해졌고, 무언가 랜드리올 일행에게 곤두박질쳤다. 군단의 방패 트로바틴은 즉시 앞으로 나서 방어벽을 펼쳤다.

-쾅!

방어벽과 거대한 덩어리가 충돌했다. 랜드리올은 눈동자만 움직여 이쪽과 충돌한 덩어리를 보았다.

뾰족한 머리와 기다란 꼬리. 피막 덮인 날개를 가진 그 생물체는 드래곤이었다.

다만 살아 있다고 하기엔 그 상태가 처참했다. 랜드리올이 짧게 혀를 찼다.

「이 몸의 주인이 슬퍼하겠군.」

「제왕이시여. 사방에서 옵니다.」

「짐도 느끼고 있느니라.」

높이 솟은 건물을 무너뜨리며 또 다른 거구들이 등장했다. 디그마, 벨라샤, 튀스본. 셋 모두 신성전사였다. 그들은 영주에 남아 있는 인간들을 모조리 척살한 뒤 이곳으로 온 참이었다.

건물 옥상에 서 있던 사내, 고건룡이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표정이 이상 미묘했다. 고블린들을 거느리고 있는 사내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서시희가 SS급 헌터를 포섭한 줄 알았는데.’

육망교의 뒷심이 미치지 못한 SS급 헌터를 서시희가 꼬드겨 데리고 왔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최후의 일원들을 잡아내지 못했을 테니까.

그런데 저 사내는 적어도 SS급 헌터 명단에 없는 자였다. 하지만 그의 강함은 피부로 느껴질 만큼 선명했다. 뼈만 남은 두 신성전사의 주검도 그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너는 누구냐.”

고건룡이 물었다. 랜드리올은 저쪽을 빤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꼭두각시와 할 말 따윈 없다. 직접 모습을 드러내라, 마드무트.」

고건룡의 눈이 조금 커졌다. 고건룡은 그제야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입술 사이로 아스빌람의 언어가 새어 나왔다.

「그렇군. 내가 아닌 이쪽과 연관 있는 자였나.」

그의 안광이 푸르스름하게 변했다. 발산하는 기세도 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데도 랜드리올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꼭두각시와 할 말은 없다고 했을 텐데.」

「하잘것없는 미물 주제에 감히 이래라저래라 한단 말인가!」

그저 고함쳤을 뿐인데 바닥이 갈라지고 유리창이 깨져 나갔다. 열두 장수는 무기를 고쳐 쥐며 잔뜩 경계했다.

랜드리올은 태연한 자세로 계속 말했다.

「그렇군. 반쯤은 그 인간과 융합한 건가? 천하를 호령하던 마드무트가 그토록 초라한 꼴이 되다니. 우습도다.」

「네놈은 누구냐? 누구길래 나의 본모습을 알고, 내가 흘린 찌꺼기를 다루는 것이냐?」

「허어. 오랜 시간을 거슬렀다 한들 나를 잊어서 되겠는가? 혹 치매라도 온 것이냐?」

「이 미천한 것이……. 그딴 썩은 구멍도 주둥이라고 방만하게 놀려 대는구나.」

고건룡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마자 카르마의 격류가 몰아닥치며 랜드리올 일행을 덮쳤다.

랜드리올은 즉시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가 전력으로 내력을 뽑아내며 전방으로 발산했다. 두 거대한 해일이 충돌했다. 그 여파로 주변의 모든 것이 으스러졌다.

랜드리올이 공격을 막아 내자 고건룡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랜드리올은 지치지 않고 크게 외쳤다.

「들어라! 네가 멸족시킨 사라온의 마지막 왕이자 지상의 신으로서 네 피를 받아먹은 랜드리올이 바로 나다! 이래도 기억나지 않는가!」

「랜드… 리올? 사라온?」

고건룡은 조용히 두 단어를 곱씹었다. 이윽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흐하하. 흐하하하! 그가 웃어 대기 시작했다. 랜드리올과 영웅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렇군! 기억났다. 유일무이한 본좌를 두고 감히 신을 사칭하던 오만한 미물이로구나! 잊고 있었는데 이젠 떠올랐다.」

「…잊고 있었다고? 정말로 있었단 말이냐? 한 종족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렸으면서 그 만행을 잊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면 그런 사사로운 일까지 본좌가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고?」

「뭐가 어째?」

랜드리올의 이마로 핏대가 올랐다.

「그래, 오만한 것들아. 무슨 까닭으로 시공을 거슬러 가면서까지 내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냐.」

고건룡이 뻔뻔스레 물었다. 랜드리올은 이쯤에서 체념하기로 했다. 저 극악무도한 신에게 사과를 받기란 애저녘 틀린 것이다.

그가 차게 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어 뭐하겠느냐. 네 수급을 취해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끝내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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