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43화 (143/151)

143화 결전

“끄… 꾸학!”

검붉은 핏덩이가 바닥을 적신다. 최후의 18인 중 한 명인 케빈은 끝내 무릎 꿇었다. 그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세상을 부정하는 악담을 퍼부었다.

“허억, 허억…….”

서시희는 색색거리며 거친 호흡을 뱉어 댔다. 그녀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아으… 아으…….”

그녀의 오른팔은 썩어 문드러지는 중이었다. 다미아노라는, 맹독을 다루는 자에게 제대로 당한 탓이다.

어디 그뿐이랴? 그녀의 몸은 한 군데도 성한 구석이 없었다. 그건 발치에 머리를 박고 있는 최후의 일원들과 더불어 얼마나 격렬한 전투가 있었는지 알려 주는 증거물이었다.

서시희는 눈을 질끈 감고 제 오른팔을 잘라 냈다. 가만히 뒀다간 독이 온몸으로 퍼져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환부의 공간을 일그러뜨려 출혈을 막는다. 그 과정에서 두어 번이나 기절할 뻔했다.

서시희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반쯤 풀린 눈에 이곳의 광경을 담는다. 시체, 시체, 시체. 어디에 시선을 둬도 보이는 것은 차게 식은 주검이었다.

B조는 본인을 제외하고 전멸했다. 군인들도 전부 죽었다. 다른 조라고 해서 상황이 나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문득 회의감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해서 얻는 게 대체 무어란 말인가? 이들의 희생으로 세계는 정녕 평화로워지는 것일까?

무기로 키워져 허망하게 죽은 세 아이. 알파, 베타, 오메가는 죽기 직전 자신을 원망했을까?

서시희는 눈물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메말라도 진즉 메마른 줄 알았건만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

문득 한쪽밖에 없는 팔의 털이 비쭉 솟았다. 서시희는 놀랄 기운도 없었고, 그래서 느지막하게 고개를 들었다. 저 먼 하늘이었다. 균열이 생성될 때처럼 공간이 확장되더니 거기서 무언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백금색 판금 갑옷으로 무장한 거인. 그들은 신성 전사였다.

심장이 철렁였다. 몇 초 뒤, 그녀가 허망한 웃음을 흘렸다. 제기랄, 산 넘어 산이구나.

저건 대체 누가 잡으란 말이야? 나? 웃기지 말라 그래. 이젠 서 있을 힘도 없다고…….

서시희는 속으로 찡얼거렸다. 물론 들어 주는 이도 위로해 주는 이도 없었다.

잠시 후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관절 마디마디가 비명 지르며 제발 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애써 무시하고 계속 움직였다.

그것이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이었기에.

* * *

최후의 일원 중 한 명인 페르디난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대주교의 모국이라는 것 외에 잘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이 잘못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우웨이가 죽었다. 윌리엄과 란즈링도 죽었다. 전생에선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았던 동료들이 너무도 허망하게 죽어 나갔다.

이 무렵 그들은 인정해야 했다. 회귀 이후 자신들이 얼마나 방탕하게 살아왔는지 말이다. 낙원이란 그늘에 취해 매일 술과 마약, 향락에 찌들어 살아온 결과물은 참혹했다.

독을 품고 덤벼드는 한국 헌터들만 해도 곤욕이었다. 그런데 뒤에 와서는…….

“끼에에엑!”

“꺄르륵! 꺄하하하!”

“이런 썅!”

웬 날개 달린 시커먼 것들까지 자신들을 괴롭혔다. 지금만 해도 그 괴물로 인해 하늘이 까맣게 물들 지경이었다.

“저리 꺼져!”

달음박질치던 그가 획 몸을 돌리며 검을 뿌렸다. 카르마를 통해 사물의 진동을 증폭시키는 것이 그의 능력이었다. 검에 맞은 그러글은 깨진 유리잔처럼 조각 조각나서 죽었다.

무너지는 그러글의 시체 너머로 또 한 마리의 그러글이 빠르게 다가왔다. 놈은 로켓처럼 날아와서는 페르디난드의 등을 받아 버렸다.

“끄악!”

우당탕! 그가 바닥을 몇 바퀴나 굴렀다. 몸을 일으킨 그의 얼굴엔 분노와 짜증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씨빠알!!”

페르디난드는 분노에 차서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그는 성난 맹수 같았다. 그의 주위로 악취 나는 고깃덩이가 시시각각 쌓여 갔다.

그리고 어느 그러글이 페르디난드의 등을 받았다.

“끄악!”

그는 또 넘어져서 바닥을 굴렀다. 몸을 일으킨 페르디난드는 더욱 화가 났다. 그리고 또 등을 들이받혔다.

‘이놈들 왜 등만?’

페르디난드는 번뜩 위화감을 느꼈다. 주변을 에워싼 그러글들이 웃고 있었다.

“꺄르륵! 꺄륵!”

“이… 이 새끼들이……. 지금 나를 가지고 노는 거냐? 이 나를! 네까짓 것들이 감히!!”

악이 받친 그가 두 손으로 검을 다잡고 극강의 일격을 준비했다. 그를 향해 그러글 떼가 덮쳐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위쪽에서 어마어마한 카르마의 격류가 쏟아지며 그러글 떼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그것은 이를테면 해일이었다. 질릴 듯 농밀한 카르마로 이루어진 거대 해일. 페르디난드가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육망교의 대주교 고건룡이 거기에 있었다.

“대주교!”

페르디난드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그는 이 대목에서 반가움을 느껴야 할지 분노를 호소해야 할지 고민했다. 일단은 적당한 태도를 유지하자고 결정했다.

고건룡은 건물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페르디난드의 앞에 섰다. 그는 인상을 찡그린 채 그러글의 시신을 살펴보더니 대뜸 물었다.

“이것들이 뭐지?”

“몰라! 시발, 나도 모른다고!”

페르디난드가 지난 다짐을 까맣게 잊고 버럭 외쳤다. 고건룡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간이 충분했을 텐데 왜 아직도 방주를 비우지 않은 거냐? 이것들 때문에?”

“제기랄! 충분하고 자시고가 문제가 아냐! 당신이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나 알아?”

페르디난드는 고건룡에게 이제껏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군인과 헌터로 이루어진 무장 세력이 밀어닥쳐 큰 전투가 벌어졌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일원들은 어디 있나?”

“우웨이랑 윌리엄이 죽었어. 란즈링도! 그 외에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라. 어디 있는 줄 알아야지!”

“죽었… 다고?”

고건룡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페르디난드는 계속 떠들어 댔으나 고건룡은 오감을 닫았다. 그리고 집중했다.

그의 초감각이 일원들의 기척을 찾아 나섰다. 1분가량 흘렀을 때 그가 눈을 떴다.

“이봐, 대주교! 듣고 있는 거야?”

“허… 믿을 수 없군. 정말로 다 죽었단 말인가.”

“다, 다 죽었다고!?”

페르디난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저절로 뒷걸음질 치며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도, 돌아가야겠어. 캐나다로. 캐나다로 돌아갈래.”

“페르디난드. 잠깐 기다려라.”

“시끄러워! 시발. 애당초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어. 그냥 캐나다에서―끄악!”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늘에서 무언가 뚝 떨어졌다. 그건 웬만한 전봇대보다 거대한 삼지창이었다.

페르디난드는 창날과 창날 사이에 끼어 땅바닥에 파묻혔다. 얼른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신성 전사가 창대를 단단히 붙잡고 있어 불가능했다.

그의 머리맡으로 고건룡이 다가갔다. 페르디난드의 눈이 불에 타는 듯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당장 치우지 못해!”

“계획이 바뀌었다.”

“뭐가 어째? …잠깐, 대주교. 아니, 너 이 망할 새끼.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너희에게 딱히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너무 원망하지 마라.”

고건룡이 페르디난드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다음 순간 손을 확 쳐들자 푸르스름한 덩어리가 딸려 나왔다. 그와 동시에 페르디난드의 눈이 까뒤집혔다.

“커컥! 커허헉! 그… 그만! 제발 하지 마! 커컥!”

“너의 힘은 잘 쓰도록 하마.”

고건룡은 기어코 모든 덩어리를 뽑아냈다. 그건 응집된 카르마였다.

일종의 거세를 당한 페르디난드는 축 늘어지며 죽었다.

고건룡이 신성 전사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신성 전사의 가슴팍에서 반투명한 구체가 천천히 낙하했다. 거대한 비눗방울 같기도 한 구체 안엔 웬 여인이 들어 있었다.

고건룡은 페르디난드에게서 뽑아낸 카르마를 여인에게 주입했다.

“그녀가 다치지 않게 해라.”

그가 읊조리자 신성 전자는 여인을 신줏단지 모시듯 했다. 조심스레 두 손으로 쥐어서 다시금 제 가슴팍에 집어넣는다.

‘육신은 완성됐다. 이제 영혼만 찾으면 돼. 그러기 위해선 이 땅에 살아 있는 인간이 있어선 안 된다.’

고건룡은 어서 방주를 비우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5킬로쯤 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최후의 일원들을 죽인 장본인이 저곳에 있을 것이다.

고건룡은 신성 전사 한 명을 데리고 그리로 향했다. 불신자들이 무슨 재주로 최후의 일원들을 잡았는지는 몰라도, 그들 역시 정상의 상태는 아닐 것이다.

신성 전사를 대동한 본인까지 당해 내지는 못할 터.

척!

서두르던 그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고건룡의 눈이 커졌다. 덩달아 입꼬리도 살짝 올라갔다.

“요즘 자주 보는 것 같습니다, 시희 누님. 용케 살아 계시긴 한데… 꼴이 말이 아니시구려. 누님이 일원들을 다 죽인 거요?”

“결판을 보자, 고건룡.”

“서두를 필요 있으시오? 굳이 내가 하지 않더라도 곧 죽을 것 같구만. 팔 한 짝은 또 어디다 팔아먹……!”

문답무용. 서시희가 검을 앞세우며 달려들었다.

“성질 급한 건 여전하시구먼.”

고건룡과 서시희, 두 사람의 2차전이 시작되었다.

* * *

랜드리올과 열두 영웅은 아파트 옥상에 올라 두 명의 신성 전사를 내려보았다.

신성 전사는 거구를 이끌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학살하는 중이었다. 대항군, 그러글, 심지어 숨죽인 채 떨고 있던 일루미션까지. 신성 전사의 폭력은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우리가 신성 전사를 몇 마리나 잡았더랬지?」

「알샤론까지 하여 총 일곱 마리입니다, 제왕이시여.」

하슘블란트가 즉각 대답했다. 랜드리올은 작게 웃었다.

「기억나는구려. 그러고 보니 알샤론은 그대가 잡지 않았소?」

「예, 맞습니다.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어찌 잊을 수 있겠나. 그날 알샤론을 당해 내다가 트로바틴과 파트라가 죽은 것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트로바틴과 파트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와서야 웃으며 말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결코 추억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랜드리올은 이내 웃음기를 거두고 앞을 보았다.

「신성 전사 일곱을 잡는 데 갈아 넣은 사라온이 몇이란 말인가. 나는 단 한시도 그날의 모멸감을 잊은 적이 없다.」

「명만 내려 주십시오. 당장 달려가 저것들의 목을 취해 오겠습니다.」

검신 아르히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랜드리올은 그녀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얹고 말했다.

「서두르지 마라, 아르히. 분한 일이지만 놈들은 강하다. 나는 두 번이나 내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고 싶지 않아.」

「생각해 두신 방책이 있으십니까?」

「암, 있고말고. 놈들이 덩치로 으스댄다면 우리도 덩치 하나쯤 마련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모여라!」

랜드리올이 일갈했다. 그러자 영주 시내 방방곡곡에 포진해 있던 그러글들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그 역시도 악마의 힘을 몸에 들인 적이 있다. 하여 그 힘을 통제하는 것도 익숙했다. 이제 더는 권능이 남아 있지 않지만 노련함 만큼은 여전한 것이다.

그러글들은 삽시간에 모여들었다. 악마화한 놈부터 그렇지 못한 놈까지. 깡그리 모였다.

랜드리올은 곧장 다음 개념을 전달했다.

「뭉쳐라.」

“끼에에엑!”

그러글이 괴성을 지르며 융합하기 시작했다. 강인한 놈들을 중추로 하여 수천, 수만 마리가 엉겨 붙었다.

그것은 곧 신성 전사만큼이나 거대해졌다. 비단 덩치만 비대해진 것이 아니라 힘까지 곱의 곱절로 강해졌다.

그쯤 되니 신성 전사의 시선을 끌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어어어―!”

“끼에에엑!”

신성 전사 루디온과 폰페이가 거대한 흉기를 들이밀며 돌진했다. 최종적으로 남은 일곱 기의 거대 그러글은 즉각 응수하고 나섰다.

두 집단이 격돌하니 힘이 비등비등했다.

「제왕이시여, 저희에게도 출전을 명해 주십시오.」

그러글과 신성 전사의 싸움을 보며 장수들이 투지를 불태웠다. 랜드리올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았다.

「가서 싸워라. 그날 우리 사라온이 겪었던 설움과 수치를 철저히 앙갚음해 주어라!」

「예!」

랜드리올 연대기의 마지막 장. 그곳에 마지막 문장이 쓰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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