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결전
‘너한테 맡기라고?’
고병갑 약간은 의심스러운 감정이었다.
랜드리올을 몸에 들인지 한참이고, 그가 어떤 수작을 벌이려 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몸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일을 망설여졌다.
랜드리올은 그런 고병갑의 마음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염려치 마라. 내 누차 말했듯 더는 생에 미련이 없다. …사실 이젠 생에 미련을 품는 것조차 불가하다. 나의 의식이 영원한 안식을 원하고 있으니.>
‘무슨 소리야?’
<나는 곧 깨어나지 못할 잠에 빠져들 거란 소리다. 뭐, 이상한 일도 아니지.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남아 있는 거라 봤자 알량한 의식의 조각일 뿐이니.>
‘…그럼 앞으로는 너와 이렇게 대화할 수도 없다는 말이야?’
<흐흐흐, 왜? 눈엣가시가 사라진다니 춤이라도 추고 싶은가? 그건 내가 정말로 사라지거든 해라.>
아니, 그렇지 않다. 랜드리올이 영영 사라진다고 했을 때 고병갑이 느낀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물론 그가 얄궂은 말로 속을 살살 긁어 댈 때는 혹이라도 단 양 껄끄러웠다. 사사건건 참견해 댈 때는 닥치라는 말이 목 끝까지 나왔고.
그래도 랜드리올이 있어서 든든했다. 그에게 배울 것도 아직 잔뜩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섭섭했다.
랜드리올은 고병갑의 마음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가 장난기를 거두었다. 그리고 진중하면서도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 삶과 죽음, 기억과 잊힘. 그 모든 것은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느냐. 비록 너와 내가 종이 다르고, 살아온 역사가 다르지만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같다. 섭리를 따르는 일에 슬퍼할 필요도 섭섭할 필요도 없느니라.>
‘…….’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노니, 내가 사랑했던 부하들과 마지막으로 전장을 누비고 싶다. 그것으로 제왕 랜드리올의, 기나긴 여정의 종지부를 찍고 싶어.>
랜드리올의 점점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왔다. 고병갑은 순순히 자리를 비켜 주고 내면세계로 잠식해 들어갔다.
「고맙다.」
랜드리올은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낯선 몸에 적응했다. 그가 검을 다잡았다. 부릅뜬 눈은 야성의 빛을 뿜었다.
「잘 보고 배워라. 내가 줄 마지막 가르침이다.」
랜드리올이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예 군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열두 장수를 제외하곤 모조리 돌려보냈다.
「너희가 죽으면 이 몸의 주인이 슬퍼하겠지. 모두 돌아가라. 시커먼 것들만 해도 병졸은 충분하다.」
「로드?」
도란이 큰 눈을 멀뚱거렸다. 고병갑의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늘어진 그림자 위로 도르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르마는 도란의 앞으로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당신은… 로드가 아니시군요. 그분입니까?」
「그렇다.」
「어째서 당신이 나온 겁니까?」
도르마는 고병갑과 랜드리올이 나눈 내면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하여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래… 랜드리올이라고?」
「어째서? 로드께선 어디로 가신 겁니까!」
「크르르……!」
고블린들이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도란은 그 누구보다 경계하는 기색이 심했다.
랜드리올은 서두르지 않고 그들을 달랬다.
「너무 모질게 굴지 말아라. 너희 로드와 이야기된 것이다.」
「로드를 앞으로 세우십시오. 직접 듣기 전에는 믿지 못합니다.」
「참… 번거롭게 하는군.」
고블린들은 눈을 모아 랜드리올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그의 안광이 조금 옅어지더니 입이 열렸다.
「다들 왔구나. 전사자들을 잘 묻어 두었냐?」
「로드시여!」
고블린들은 고병갑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키리얀이 대표로 대답했다.
「전사자들의 시신은 동족들에게 잘 인계하였습니다. 부상자들도 모두 치료를 마쳤습니다.」
「잘했다. 그래, 얘들아.」
「예, 로드. 말씀하시지요.」
「얼마간은 랜드리올의 말을 들어라. 그가 내가 허락한 일이다.」
「아니, 로드! 어째―」
도란이 즉각 반문하려 했다. 그때 투르카가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말을 끊었다.
「알겠습니다. 로드의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예, 안에서 쉬고 계시지요.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도르마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명을 받들었다. 도란은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나머지 동료들이 모두 수긍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고병갑의 안광이 다시금 번쩍였다. 다음으로 나타난 이는 랜드리올이었다.
「호오, 무릇 왕의 자질은 신하를 보고 판단하는 법이지. 너희의 로드는 꽤 괜찮은 군주인 모양이로구나.」
「말해 뭐하겠습니까. 로드는 훌륭하십니다.」
「그럼 로드의 명에 따라 얼마간 당신에게 협조하겠습니다.」
「아니, 난 나의 신하들과 함께하겠다.」
「예? 그게 무슨……?」
「하슘블란트, 일어나시오.」
「예, 저의 왕이시여.」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도르마의 안광이 번쩍이더니 전혀 다른 인물이 겉으로 드러났다. 고블린들은 경악하며 그 광경을 보았다.
「반항하지 말고 몸을 내주어라.」
「…….」
고블린들의 표정은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로드가 허락했으니 토를 달기도 애매했다.
그사이 랜드리올은 차례대로 열두 영웅의 이름을 불렀다.
대현자 하슘블란트, 검신 아르히, 뇌제 가이안느.
군단의 심장 트로바틴, 거성 기간티나, 군단의 날개 미하일.
환영의 가슬라, 암제 파르파판, 신궁 사라나.
대적자 나이아드, 군단의 창 파트라, 요술사 에슬라.
한때는 역사였다가 이제는 전설이 된, 아스빌람의 열두 영웅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당황하지도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다. 그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저들의 왕에게 예의를 표했다.
「단잠을 깨워서 미안하구나. 내 이렇게 그대들을 부른 까닭은, 마지막으로 나와 함께 싸워 주길 바랐기 때문이네.」
「제왕이시여, 소인은 그대의 부름만을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저희의 소명은 제왕께 삶의 모든 부분을 마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안하다는 말을 철회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제왕께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허허허, 그대들은 변치 않는구먼.」
랜드리올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보았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다들 보고 있었을 것이네. 우리의 적은 마드무트와 그 추종자들이야.」
「제왕께서 오랜 염원을 이루게 되시겠군요.」
「이젠 빛바랜 염원이지.」
그가 앞으로 나섰다.
「모두 나를 따르라. 실력이 녹슬지 않았길 바라마.」
「존명.」
랜드리올과 열두 영웅.
전설이 질주를 시작했다.
* * *
A조 헌터들은 난감함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전장의 판도가 순식간에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사내, 최후의 일원 중 한 명이자 세계 최초로 SS급 타이틀을 확보한 남자. 빌리안 밀러의 존재감은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펑! 펑!
창칼이 오가는 차가운 전장에서 연신 폭음이 터져 나왔다. 타격할 때 순간적으로 카르마를 폭발시키는 기술은 그만의 독보적인 테크닉이었다.
빌리안은 공방 일체였으니 때려도 이쪽이 아프고, 막아도 이쪽이 아팠다. 그러니 상대하는 입장에선 미칠 노릇이었다.
빌리안과 한 번이라도 몸을 맞댄 이들은 육신이 터져 나가는 경험을 해야 했다.
그나마 악마화한 그러글들이 빌리안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새로운 적이 세 명 더 출현한 시점부터는 그러글도 힘을 쓰지 못했다.
단칼로 산을 갈랐다는 이란의 여검사 자히라.
한 번에 수만 명을 보호할 수 있는 방어술의 귀재 아루쉬.
주먹으로 지진을 일으키는 홍콩의 권법가 순리.
그들은 서로를 보완하며 무지막지한 위용을 뽐냈다. 이를테면 걸어 다니는 재앙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예기치 못한 상황이 짜증 나는 건 매한가지였다.
“제기랄! 대주교는 왜 안 오는 거야? 이 시커먼 것들은 뭔데 자꾸 쏟아지는 거냐고!”
순리가 그러글의 날개를 거칠게 찢으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애석하게도 그러글은 여전히 많았다.
여덟 방향에서 날개 단 악몽들이 곤두박질쳤다. 아루쉬가 재빨리 사방위로 방어진을 전개했다.
“신성군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건 대주교가 나머지 기둥도 모두 세웠다는 거다. 그러니… 끄윽! 조금만 더 버티면 돼!”
“진짜 짜증 나 돌아 버리겠네! 왜 시발 방주를 이딴 데로 해서 이 고생을 해야 해?”
“그건 대주교한테 따져!”
“자히라, 엄호해라.”
빌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배리어를 뛰쳐나갔다. 전방 50미터쯤에 뭉쳐 있는 인간들을 단번에 처리할 심산이었다.
그러글 한 마리가 즉각 날아들었다. 축 늘어진 팔이 머리를 움켜쥐기 위해 접근한다. 빌리안은 침착하게 때를 기다렸다. 일순 꿈틀거리던 그의 손이 그러글을 향해 뻗어 나갔다.
“켁!”
방출된 카르마 덩어리가 그러글을 맞추며 폭발했다. 사방으로 시커먼 고깃덩이가 비산한다. 곧바로 두 마리의 그러글이 더 접근했으나, 후방에 있는 자히라가 검기를 날려 격추했다.
빌리안은 훌쩍 도약했다. 그의 주먹에 응어리진 카르마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했다.
마침내 사정거리 안으로 진입한 빌리안이 불신자들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맞는 입장에선 스치기만 해도 사망인 공격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파직! 파지직!
“끄허헉!”
한 줄기의 벼락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빌리안의 입장에선 세상이 하얗게 변하더니 옆구리가 찌릿, 그다음엔 뇌가 녹아드는 통증이 밀어닥쳤다.
볼품없이 바닥을 구르던 그가 재빨리 일어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웬 것들이 불신자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인간, …그리고 고블린?”
중앙에는 한 사내가 섰다. 그 곁으로 12마리의 고블린이 정렬해 있었다. 전격을 날린 건 저 새하얀 고블린인 듯했다.
‘알비노 고블린?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잖아? …잠깐, 그렇다면 혹시 저것들이?’
얼핏 보고받은 기억이 떠올랐다. 불신자 세력 중 고블린을 부리는 정체불명의 사내가 있다고.
당시에는 단순한 헛소리로 치부했는데 실제였을 줄이야. 황당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위험하다.’
빌리안은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했다. 좀 전의 전격 공격만 해도 무척이나 위력적이지 않았던가.
빌리안은 최적의 대처를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런 그의 주변시로 두 인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순리와 자히라였다.
“무슨!?”
그들은 대책 없이 달려들고 있었다. 순리는 굳게 말아 쥔 주먹을, 자히라는 길이 넉 자짜리 장검을 겨눈 채로.
그들은 말릴 틈도 없이 격돌했다.
거성 기간티나와 검신 아르히가 각각 제왕의 앞을 막고 섰다. 그들은 굳건한 벽이라도 된 양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순리와 자히라, 두 여인의 얼굴에 당혹감이 비추었다. 설마하니 제 공격을 막아 낼 줄 몰랐던 거다.
그들의 당혹감이 불안감으로 바뀌는 건 금방이었다.
「이런 조무래기에 할애할 시간이 없다. 어서 치워라.」
「예.」
아르히가 검을 튕겼다. 힘을 겨루던 자히라는 누가 뒤에서 잡아당긴 것처럼 밀려났다. 자세를 다잡을 틈도 없이 거센 찌르기가 연달아 날아왔다.
왼쪽 어깨, 오른쪽 옆구리, 두 허벅지에 바랑 구멍이 생기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순리는 멍한 얼굴로 아군이 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번뜩 정신을 다잡았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기간티나가 맞잡은 손을 획 잡아당겼다. 그러며 반대편 주먹으로 정권을 날렸다. 순리는 속수무책으로 딸려 가다가 안면에 주먹을 얻어맞았다. 그녀의 예쁜 얼굴이 단번에 함몰되며 가라앉았다.
물론 그 정도 타격으로 그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고블린들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틈을 주지 않았다.
뇌제 가이안느의 벼락, 암제 파르파판의 암기, 군단의 창 파트라의 창날, 신궁 사라나의 화살. 그것들이 동시에 날아들어 두 여인에게 때려 박혔다.
그 모든 일이 눈 한 번 깜짝이기도 전에 벌어졌다. 순리와 자히라, 두 여인은 저들이 당한 일만큼이나 끔찍한 몰골이 되었다.
“이… 이럴 수가…….”
빌리안은 적게 벌어진 입으로 신음을 흘렸다. SS급 각성자 두 명을 저리도 허무하게 해치우다니!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저들과 맞붙는 건 승산이 없다. 가서 원군을……!’
빌리안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달음박질쳤다. 원군을 불러와야 한다. 아니면 대주교가 올 때까지 어디 숨어 있기라도 해야 했다.
“뭐, 뭐야? 이게 대체!?”
하지만 그의 작은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가 내달리던 공간이 접히고 뒤집히고 빙글빙글 돌았다. 이윽고 수백 개의 거울에 둘러싸인 듯 방향감조차 상실했다.
요술사 에슬라가 벌인 기적이었다.
한순간 빌리안을 둘러싼 공간이 와장창 깨졌다. 그의 앞에는 랜드리올이 서 있었다.
랜드리올이 빌리안의 심장으로 검을 쑤셔 넣었다.
“꺼… 꺼흑!”
“마드무트는 어디 있느냐?”
“사… 살려…….”
촤락! 검이 가로로 그어졌다. 빌리안은 한낱 고깃덩이가 되며 무너졌다.
랜드리올은 이미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나타나셨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