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결전
도심지를 활보하는 신성 군단은 여름 한 자락에 놓인 눈사람처럼 부자연스러웠다.
놈들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신성군은 기둥을 사수하고 있던 게 아니냔 말이다.
“저 자식들……!”
“위, 위험해. 저놈들은…….”
신성군과 맞붙은 경험이 있는 헌터들이 움츠러들었다. 패배의 트라우마가 발동한 것이다. 고병갑도 자연스레 그 당시를 회상했다.
한 번의 패배가 있었다. 압도적이고 무력한 패배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저들을 한 번 꺾었어.’
고병갑은 부하들과 함께 신성군을 패전시킨 전력이 있다. 그렇다. 자신들에겐 신을 죽이는 피가 흐른다. 그렇다면 새삼 저들을 두려워할 까닭이 어디 있으랴.
그는 빠르게 침착을 되찾았다. 이어서 도심지 이곳저곳을 살폈다.
‘…없다?’
그런데 이상한 일. 신성군을 통솔하는 신성 전사가 보이지 않았다.
은폐한 건가 싶어 기척에 집중해 본다. 아쉽게도 이 도시에 커다란 기운이 한두 개가 아닌지라 누군가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고병갑은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어느 문구가 번뜩 머리를 스쳤다.
‘시야를 좁혀라.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려 하지 말란 말이야. 신성 전사가 보이지 않는다고? 놈들이 어디 숨어 이상한 꿍꿍이를 벌이고 있을 거라고 뭐하러 생각해? 신성 전사가 없으면 손쉽게 졸병들을 잡아 죽일 수 있다. 그뿐이야.’
고병갑이 큰 숨을 들이마셨다. 이어서 우렁차게 외쳤다.
“당황할 거 없습니다! 저들을 이끄는 대장이 보이지 않아요. 그렇다면 놈들은 별 볼 일 없습니다! 싸웁시다!”
그가 내력을 한껏 방출하며 달려 나갔다.
헌터들은 몸의 반은 뛰쳐나갈 자세를 취했고, 나머지 절반은 머뭇거렸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엉성했다.
고병갑은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그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이쪽을 향해 빗발치는 화살이었다.
고병갑은 날아오는 화살을 사선으로 빗겨 쳤다. 내린 검을 그대로 끌고 가서 위로 확 쳐든다. 궁사 세 명의 몸이 한 번에 절단됐다.
징 달린 폴암이 득달같이 찌르고 들어왔다. 그러나 창병들이 찌른 것은 고병갑의 잔상이었다.
“어디 봐?”
“쿠학!”
가로 베기로 목을 떨구고, 곧장 다음 놈을 내려친다. 창병은 창대를 들어서 막았으나 창대와 함께 세로로 쪼개질 뿐이었다.
고병갑의 감각이 번뜩였다. 화살 다발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던져 피했다.
바닥을 한 바퀴 구르는 동안 칼날로 내력을 집중시킨다. 그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전방으로 강력한 찌르기를 날렸다. 내력 폭풍이 몰아치며 앞의 적들을 갈가리 찢어 버렸다.
베기, 찌르기, 가까이 붙어 검의 폼멜로 대가리 찍기, 쇄도하는 검을 피하고 역공, 날아오는 화살을 튕겨 내며 연속으로 검기 방출.
고병갑은 거의 무아지경에 빠졌다. 신성군의 시체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늘어졌다. 그 원은 점점 비대해졌다. 그쯤 되니 머뭇거리던 헌터들도 투지를 다시 불태웠다.
“에이씨! 뭣들 해요? 우리도 싸우자고요!”
“우아아아―!”
사람들이 무기를 앞세워 달려들었다. 사실 여기까지 온 이상 싸우는 것 외에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차디찬 겨울바람을 가르며 날붙이가 빗발쳤다. 무기와 무기가 맞닿는 챙! 챙! 하는 소리가 온 도시를 누볐다.
신성군이 쓰러진다. 그 위로 대항군의 시신도 포개졌다. 죽음이 풍년이다. 적아(敵我)의 구분 없이 시신은 시시각각 쌓여 갔다.
고병갑은 또 한 명의 신성군을 토막 냈다. 연달아 두 번 베인 신성군 검사는 검을 휘두르려는 자세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직후 고병갑은 등 쪽에서 오싹함을 느꼈다. 그가 검을 넓게 펼치며 빠르게 회전했다.
“음!?”
등 뒤의 상대를 베어 버리기 직전, 그가 간신히 멈췄다. 칼날이 상대방의 살결에 닿을락 말락 했다.
정작 당사자는 그런 사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머리가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일까.
“으드득! 쭈압쭈압! 까득!”
“얀마, 너 지금 뭘 먹는……?”
그러글이었다. 생김새가 비교적 평범하고 약한, 개체 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놈이다.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를 녀석은 코까지 박아 가며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놈이 먹는 것은 신성군이었다.
“허, 참.”
그러글이 뭘 처먹는 거야 놀랄 일도 아니다.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입에 처넣고 보는 족속이니까. 그런데 피와 죽음이 만연한 전장에서도 처먹는 꼬락서니를 보니 이놈들은 참 타고난 미식가구나 싶다.
“새끼 맛있게도 먹네. …스읍. 거, 맛있어 보이긴 하… 어?”
고병갑은 깜짝 놀랐다. 자신이 붉게 점철된 신성군의 살점을 보고 입맛을 다셨기 때문이다.
사실 입맛을 다신 정도가 아니라 같이 앉아 뜯어먹고 싶었다. 내가 왜 이러지?
‘그러고 보면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안 먹긴 했지. 딱히 공복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데, 배가 많이 고팠던 건가?’
긴장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화살 몇 발이 자신과 그러글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고병갑은 재빨리 바닥에 검을 찔러 넣었다. 이윽고 검을 중심으로 내력의 파장이 퍼지며 화살을 튕겨 냈다.
‘맞다, 싸우던 중이었지.’
풀린 긴장의 끈이 다시 조여졌다.
“얀마, 그만 처먹고 너도 가서 싸워.”
고병갑은 눈앞의 그러글에게 개념을 주입했다. 굼뜨게 고개를 든 그러글. 놈의 얼굴이 어딘가 달라졌다.
그러글은 밤의 한 부분을 떼와 빚은 듯 새카맣기만 하다. 그런데 앞의 놈은 얼굴 곳곳에 새빨간 혈관 같은 게 울룩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눈도 피처럼 붉었다.
“끼에에엑!”
그러글이 번뜩 뛰쳐나갔다. 허우적대는 팔다리에서 광기가 느껴졌다. 녀석의 왼팔이 삽시간에 기다란 송곳으로 변형했다.
고병갑은 그 왼팔의 움직임을 잠깐 놓쳤다. 다시 그것을 발견했을 때는 뾰족한 끝이 신성군의 가슴팍을 관통한 상태였다.
“어… 어욱!”
“끼에엑! 끼하하학!”
그러글의 오른팔이 움직였다. 큼직한 손아귀와 일곱 개의 손가락은 군사의 머리통을 단숨에 뽑아냈다.
그러글은 마치 야자수를 마시듯 신성군의 머리통을 입에 가져다 댔다. 줄줄 흐르는 타액을 꿀떡꿀떡 마신다. 그러글의 몸뚱이가 꿈틀거렸다.
덩치가 점점 비대해진다. 등이 꼽추처럼 굽더니 척추가 울긋불긋 튀어나왔다. 기다란 팔이 축 늘어졌다. 얼굴에 아가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더 늘어났다.
끝에 가서는…….
촤락!
등 뒤로 큼직한 날개 두 쌍이 솟아났다.
“끼에에엑! 끼에에엑!”
놈이 마구 괴성 질렀다. 고병갑은 녀석의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쾌락, 쾌감, 기쁨의 교성이었다.
고병갑은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그림자에 숨어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도르마가 말했다.
「악마… 악마입니다.」
「나도 알아. 악마다.」
도르마의 목소리엔 약간의 적대감이 실려 있었다.
「놈들은 저 큼직한 날개로 하늘을 누비고, 기다란 팔로 지상의 아인들을 낚아채 잡아먹었습니다. 제 기억에 있는 것보다 작긴 하지만 영락없이 같은 모습이군요.」
악마와 그러글의 중간쯤에 위치한 그 생명체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전장을 누볐다.
도르마의 말대로였다. 놈은 유유히 하늘을 날며 기다란 팔로 신성군을 낚아챘다. 커다란 아가리로 대가리를 베어 물고 쭈쭈바처럼 쭉쭉 빨아 먹었다.
전투력이 대단했다. 평범한 그러글일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던 한순간, 놈이 이번엔 인간 시체를 낚아챘다. 놈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것을 입가에 가져갔다.
고병갑이 반사적으로 뛰어올랐다. 훌쩍 도약한 그가 그러글의 목을 잡아챈 뒤 땅으로 내리찍었다. 끼에엑! 끼에엑! 놈이 발버둥 쳤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시신을 꼭 쥐고 있다.
고병갑은 무시무시한 눈을 부라리며 읊조렸다.
“놔둬라.”
“끼에엑! 끼엑!”
“시발, 놔.”
그러글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 순순히 인간 시신을 놓았다. 겁에 질린 듯한 몸짓이었다.
“인간을 건들면 넌 뒈진다.”
“끼이이…….”
“인간은 빼고 신성군을 모조리 잡아먹어라.”
“끼엑!”
긍정의 신호. 고병갑은 손을 털며 그러글을 놔주었다.
놈은 곧장 날아올랐다. 녀석은 상공 십몇 미터까지 솟구치더니 등에서 검은 촉수를 마구 뽑아냈다. 촉수는 썩어 문드러진 그러글들에게 꽂혔다.
곧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촉수가 꼽힌 그러글들은 빨대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촉수에 흡수됐다. 그와 동시에 촉수의 주체가 되는 녀석의 몸집이 비대해졌다.
저것들은 대체 어떤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생명체일까. 고병갑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곤 생각하는 일을 관두었다.
좀 께름칙하긴 하지만 그러글이 한층 더 쓸 만해 진 것은 호재였다. 고병갑은 내친김에 주위에 있던 그러글들을 모두 불러 모으기로 했다.
‘모여라.’
처음 110만 마리가 넘던 그러글이 30% 수준까지 줄어들었다. 그 짧은 시간 엄청나게 죽어 나간 것이다.
괜찮다. 차고 넘치는 건 여전했다.
“우억!”
“아악! 씨발!”
“쿠우우…….”
“꺄악! 자, 잠깐만! 잠깤―!”
“끼에에엑!”
인간과 신성군의 비명이 뒤섞인 전장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악마화한 그러글이 가세하자 전세가 이쪽으로 기울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사람 뒤져 나가는 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점점 더 많은 그러글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은 걸신들린 듯 신성군의 시체를 주워 먹었다. 벌써 어디서 주워 먹고 왔는지 날개 달고 나타난 녀석도 종종 있었다.
시가지를 가득 메웠던 신성 군단은 차츰 바닥과 하나가 되어 갔다. 그 무렵 저 먼 곳에서 인간 분수를 만들어 내던 장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됐어! 조금만 더 밀어붙이어거걱!”
가열차게 신성군을 두들겨 패던 이슬아 헌터가 땅에 매다 꽂혔다. 누군가 그녀를 밟고 서 있었다. 이슬아는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귀신같이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의문의 사내는 뻗어 오는 팔을 밟고, 그대로 으스러뜨렸다. 그 뒤 주먹을 내리찍었다. 이슬아 헌터의 상반신이 사라졌다.
또 한 명의 S급 헌터가 죽었다.
“야 이 개자식아―!”
정선경이 사내의 뒤로 뚝 떨어졌다. 고병갑은 심장이 철렁이는 것을 느꼈다. 그러지 말라고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사내의 대응이 더 빨랐다.
정선경의 양날 도끼가 쇄도한다. 사내는 평범하게 주먹을 휘둘러 도끼날을 마주쳤다.
펑!
그리고 폭발했다. 사내의 주먹이 폭약이라도 된 양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어?”
도끼가 흔적도 없이 파괴됐다. 덧붙여 도끼를 쥐고 있던 정선경의 양팔도. 반면 사내의 주먹은 멀쩡했다.
“아… 아이 씨…….”
그녀가 버벅거리는 몸을 달래며 뒷걸음쳤다. 그때 두 번째 공격이 날아들어 정선경의 명치를 후려쳤다. 다시 가공할 폭발이 일어났다.
정선경은 맞은 방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녀는 건물 두 채를 나란히 무너뜨린 뒤에야 간신히 멈추어 섰다.
“누나!”
고병갑이 번뜩 그리로 달려갔다. 바닥에 널브러진 정선경의 모습을 본 순간 그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의 상체 절반이 함몰됐다. 원래는 뼈와 살점으로 가려져 있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무방비하게 드러나 있었다.
“끄… 끄륵……. 버, 버버, 벼… 가 끄륵!”
처참한 꼴. 정선경은 눈동자를 간신히 움직여 고병갑을 바라보았다.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느… 느아… 끄륵! …다, 다… 다배……. 끅!”
그녀의 고개가 돌아가며 축 늘어졌다. 고병갑은 다만 죽은 눈으로 그녀의 주검을 바라보았다.
그가 뚜벅뚜벅 걸어갔다. 품에서 이제 서너 개비쯤 남은 담뱃갑을 꺼내 정선경의 머리맡에 두었다.
「로드시여.」
도르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르마의 얼굴엔 짙은 근심이 깔려 있었다. 제 로드를 걱정하는 것이다.
고병갑은 표정이 없는 얼굴을 한 채 몸을 일으켰다.
「…로드시여, 괜찮…….」
「됐다, 도르마. 전쟁 중이다.」
「예…….」
「전번에도 말했듯 내가 부를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마라. 너는 내 비수다.」
「죄송합니다.」
도르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그림자 안으로 숨어들었다.
<잘했다.>
내면에서 랜드리올이 불쑥 말을 걸었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최근 몇 주를 통틀어 그는 단 한 번도 존재감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네가 애새끼처럼 질질 짤까 싶어 내심 우려했다마는, 다행히 별일 없군.>
‘애가 아니니까.’
<너무 우쭐대진 마라. 네 감정의 파동은 짐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전번에도 말했듯 왕이란 결국 손에 쥔 것을 모두 떠나보내는 자리다. 특히 전장은 상실감을 느끼기엔 안성맞춤인 장소지. 낙담하지 마라. 이 일련의 시련이 너를 더욱 단단한 왕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랜드리올은 위로랍시고 건넸으나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고병갑은 그저 한 가지 일념만을 되뇌고 있었다.
‘랜드리올.’
<말하라.>
‘저놈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 버리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하지?’
랜드리올은 얼마간 뜸 들였다. 고병갑은 그가 생각을 곱씹는다는 감상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얼마 후 랜드리올이 불쑥 솟아오르며 말했다.
<그렇다면 잠시 짐에게 맡겨 보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