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40화 (140/151)

140화 결전

고병갑이 검을 내질렀다. 별다른 기교는 없었지만 빠르고 묵직한 일격이었다.

카르마 병사 하나가 급히 막고 섰다. 하지만 칼날은 카르마 병사의 창대를 자르고 뒤이어 몸뚱이까지 사선으로 갈라 버렸다.

고병갑은 내리친 검을 들어 올리며 곧바로 찔렀다. 클로흐리아는 다급히 몸을 뺐으나 왼쪽 팔뚝에 자상을 입었다. 고병갑은 잠시도 쉴 수 없는 병에 걸린 양 끊임없이 움직였다.

“제길!”

카르마 병사만으로는 고병갑을 막을 수가 없었다. 클로흐리아는 카르마로 검을 조형해 손에 쥐었다. 그가 SS급 각성자의 야수 같은 감각으로 검을 휘둘렀다. 대단히 빠르고 무거우며 적의 허점을 노린 공격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고병갑은 칼날을 비스듬히 눕혀 가뿐히 공격을 흘려 내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반격을 날렸다.

클로흐리아의 눈에는 빛이 번쩍하는 것 정도로 보였다. 이윽고 몸 군데군데가 화끈거렸다.

“끄으으……!”

무릎이 갈라진 클로흐리아의 몸이 기울어졌다. 그는 위협적으로 카르마를 발산하며 상대방의 접근을 막았다. 하지만 고병갑은 마찬가지로 내력을 발산하여 그 폭풍을 상쇄시키고 덤덤히 다가갔다.

미묘하게 흔들리던 칼끝이 살모사의 주둥이처럼 쏘아졌다. 클로흐리아가 반사적으로 팔을 들었다. 칼날은 상박을 꿰뚫고 들어가 왼쪽 눈알까지 침투했다.

“끄아아악!”

클로흐리아가 끔찍한 신음을 토했다.

고병갑은 머리 위로 음영이 지는 것을 느꼈다. 수십 명의 카르마 병사가 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침착하게 몸을 뺐다.

“이놈!”

왼쪽 눈을 감싼 클로흐리아가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저번에 아리에나와 싸웠을 때도 느낀 거다만… 너희처럼 뒤에서 잔재주 부리는 것들은 싸움 실력이 형편없군. 앞서 만난 여자는 칼솜씨가 기가 막혔는데 말이지.”

“우쭐거리지 마라!”

카르마 병사들이 일제히 고병갑을 향해 돌격했다. 각자의 무기를 부라리는 전사, 창병, 야수는 실로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고병갑은 구태여 방어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케르륵!」

「로드를 지켜라!」

고병갑의 등 뒤에서 고블린들이 대거 튀어나왔다. 그들은 칼, 창, 손톱을 앞세우며 카르마 병사를 막아섰다.

클로흐리아의 눈에 허망한 감정이 비쳤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곧 분노의 눈을 뜬 그가 카르마 탄환을 잔뜩 만들어 냈다.

‘성가신 공격. 뜻대로 놔두지 않는다.’

고병갑은 신속히 달려들었고, 어깨로 클로흐리아의 명치를 들이받았다.

“컥―!”

생성됐던 카르마 탄환이 흐릿해지며 소멸했다. 고병갑은 검을 거꾸로 잡고 내리찍었다. 칼끝은 정확히 클로흐리아의 미간을 노리고 있었다.

아쉽게도 단박에 끝내지 못했다. 클로흐리아는 제 면상에 구멍이 나기 직전 간신히 검신을 붙잡았다. 그의 손가락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뒤에서 코나 긁으며 수련을 게을리했나? 최후의 18인이니 뭐니 하더니 별것도 아니잖아!”

“끄으으……! 이렇게, 이렇게 죽으려고 그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게 아니다!”

클로흐리아의 눈이 번쩍였다.

고병갑은 뒷덜미로 서늘함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위를 보는데, 이게 웬걸. 하늘에서 검이 떨어지고 있었다. 과장 없이 빌딩만 한 크기의 검이었다.

저런 게 떨어지면 이쪽 피해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당연히 클로흐리아 본인도 무사하지 못할 테고. 자결이라도 하려는 심산인가? 고병갑의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때였다.

「로드시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막아 내겠습니다!」

「오르카!」

오르카가 성큼성큼 뛰어왔다. 녀석은 거대화하더니 금세 8미터가 넘는 신장이 되었다. 오르카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쳐들며 거대한 검을 받아 낼 준비를 했다.

「오르카, 그만둬라! 무모해!」

「괜찮습니다! 맡겨 두십시오! 흐아아―!」

오르카의 몸이 구릿빛으로 변하며 경화했다. 잠시 후 거대한 카르마 검과 오르카의 몸이 맞닿았다.

쩌적! 콰지직! 녀석의 두 다리가 땅속으로 밀려나는가 싶더니 빠르게 잠겼다. 뼈와 근육이 뒤틀리고 으스러지는 소리가 고병갑에게까지 들렸다.

칼날은 오르카의 어깻죽지를 반쯤 파고들어 선혈을 흘리게 했다. 그런데도 오르카는 망설이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가세하겠다!」

「우어어어!」

도르마와 투르카도 오르카에게 붙었다.

도르마는 새카만 덩굴을 만들어 내 칼날을 휘감았다. 덩굴은 구렁이처럼 칼날을 조였다. 투르카는 황금빛 내력을 오르카에게 흘려보냈다. 몸을 침투했던 칼날이 조금씩이나마 밀려나기 시작했다.

「하아압!」

카장창!

세 고블린이 힘을 모았다. 그러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빌딩만 한 카르마 검이 쩍쩍 갈라지더니 이내 깨져 버린 것이다.

연기가 되어 흩어지는 칼날 파편으로 세상이 파랗게 물들었다.

고병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클로흐리아를 노려보았다. 클로흐리아는 세상을 부정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내 부하를 피 흘리게 한 대가는 비쌀 거다.”

“마… 말도 안돽―!”

고병갑은 내려찍은 자세에서 내력 폭풍을 일으켰다. 검신을 부여잡았던 클로흐리아의 팔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검이 쏘아졌고, 적의 머리통을 으깨 놓았다.

최후의 18인 중 한 명이자 카르마 조형의 귀재, 클로흐리아가 죽었다. 그가 죽자 그의 조형물들도 이내 자태를 감추었다. 전투가 끝났다.

* * *

클로흐리아를 죽인 후 주변을 탐색했으나 추가로 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고병갑은 부하들을 정렬시키고 피해 상황을 보고받았다.

사망자 넷, 중상자 마흔일곱.

「전사자들의 시신을 묘지에 잘 묻어라. 그들의 이름을 새긴 석패를 제작하게 해라. 부상자는 바몬드의 지휘 아래 치료받아라.」

「알겠습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슬퍼하는 것은 후의 일이다. 태세가 느슨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라.」

「예!」

고블린들을 돌려보냈다. 고병갑은 마음이 무거웠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에선 헌터들이 인간 사상자를 돌보고 있었다.

인간은 고블린에 비해 몇 곱절 많이 죽었다. 대부분이 하위급 각성자였는데, 처음의 기습을 버텨 내지 못한 것이 컸다.

사실 처음 대항군을 조직할 때 하위 각성자를 편성에 넣냐 마냐 말이 많았다. S급, SS급들이 싸우는 마당에 D급 C급이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편성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헌터 당사자들도 싸우고 싶어 했고, 어떻게든 총력을 갈아 넣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 컸다.

처음 1,000명 남짓으로 시작된 A조가 두 번의 전투 만에 반 토막 났다. 살아남은 헌터들은 반이나 죽은 것에 대해 낙담해야 할지, 반이나 살아남은 것에 대해 감탄해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A조는 잠시간 휴식을 결정했다. 낙오자도 걸러 내야 했다. 힐러들이 슬슬 힘이 빠져 치료가 시원찮았기 때문이다.

한창훈이 A조에 포함돼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지금 서시희와 같은 B조에 배속된 상태였다.

“병갑, 나 담배 한 까치만. 아니, 두 까치만.”

정선경이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은 고통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고병갑은 순순히 담배를 내주었고, 불까지 붙여 주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까진 이마에서 관자놀이를 타고 피가 흘렀다. 벗은 옷가지로 동여맨 왼쪽 허벅지는 아예 살 색이 보이지도 않았다.

“치료받지 않았어?”

“됐어, 이까짓 걸로.”

“다리는 심해 보이는데.”

“괜찮대도.”

정선경은 연신 담배 연기만 뿜었다. 그녀는 한참을 고뇌에 잠겼다가 깨어나 말했다.

“시발, 나는 내가 한 번도 약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거든? 근데 요즘은 벽이 느껴지네.”

“누나는 실제로 약하지 않은데 벽이 느껴지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

“나보다 더 센 놈들이 넘쳐 나잖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더 줄어들고.”

“뭐 어쩌겠어, 세상이 넓으니까 강한 놈도 많은 거지. 미친놈도 많고. 그리고 누나도 누군가에게는 벽이야. 저기 자빠진 사람 중 열에 아홉은 그렇게 생각할걸.”

“몰라, 아무튼 무력해지는 기분이야. …너는 점점 더 강해지잖아. 처음 봤을 때는 나보다 약했는데 이젠 얼마나 멀어졌는지 보이지도 않아.”

“누나, 혹시 뭐 힘을 갈망하고 그런 거야?”

“야… 내가 무슨 무림 고수냐, 힘을 갈망하게. 그냥… 세상이 멀쩡할 때는 내 재주만으로도 떵떵거리며 살았는데, 갑자기 이 꼬라지가 되니 내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고병갑은 마땅한 위로의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애저녁 누군가를 위로해 줄 상황이 아니었다. 부하를 잃은 상실감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정선경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뗏목 하나 달랑 들고 망망대해에 던져진 기분이리라. 감당하기 힘든 역경에 의욕은 차츰 말라 갈 테고.

고병갑에겐 그런 무력감이 익숙했다. 이미 수차례나 겪었기 때문이다.

일개 하위 헌터에 불과했던 자신이 한 종족의 지배자가 됐다는 중압감과 불안감, 그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그들을 잃었을 때의 상실감.

그런 감정들이 아닌 밤에 불을 지피면 잠조차 제대로 들 수 없었다. 그럴 때 고병갑은 항상 같은 방법으로 기분을 달랬다. 시야를 좁히는 것이다.

“멀리 볼 거 뭐 있어? 앞만 보고 가. 시야를 좁히란 말이야.”

“시야를 좁히라고? 그러다 이상한 데로 가면?”

“그럼 어쩔 수 없는 거지. 사람 사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

“…참나.”

정선경이 피식 웃었다. 기분이 좀 나아진 듯 보였다.

A조는 얼마간의 휴식을 취한 뒤 이동을 재개했다.

포격 소리가 점점 멎었다. 군 측이 보유한 탄약을 모두 소진한 것일까? 아니면 그쪽으로 침투한 적에게 모조리 살해당한 걸까?

‘관두자.’

고병갑은 당장 손쓸 수도 없는 일에 고민하는 짓을 때려치우기로 했다.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른들 당면한 상황이 타파되는 것도 아니잖은가.

낮은 동산과 드문드문 솟아오른 건물이 걷혔다. A조는 완전히 도심으로 진입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즐비한 그러글 시체였다.

썩어 문드러진 거무죽죽한 살점이 도시 곳곳을 뒤덮었다. 온 사방을 에워싼 악취에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윽! 냄새!”

“제기랄.”

다른 헌터들도 저마다 코를 틀어막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오감 중 후각에 가장 큰 신경을 기울였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귀청을 때리는 굉음과 함께 벌어진 광경은 악취를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 저 무슨…….”

“허…….”

무언가 검은 무더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어지간한 아파트보다도 높게 솟아오른 무더기는 곧 중력에 이끌려 맥없이 추락했다.

처음에는 그 자잘한 조각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그게 사람과 그러글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쾅! 쾅! 쾅!

굉음은 빠른 주기로 울렸다. 그럴 때마다 인간 분수가 하늘을 어지럽혔다.

“저쪽으럭―!”

한 A급 헌터의 머리가 누가 뒤에서 잡아당긴 듯 넘어갔다. 그 일은 소리도 소문도 없이 벌어졌기에 몇몇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그의 미간에는 기다란 작대기 하나가 꽂혀 있었다.

고병갑은 오싹함을 느끼자마자 앞으로 뛰쳐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캉!

“크흑!”

무언가 검을 후려쳤다. 기다랗고 파랗게 빛나는 그것은 카르마로 이루어진 화살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화살은 곧 소멸했다.

“이런 썅! 또 저격이야!?”

“전원 전투태세를 갖추―커헉!”

“뭐야! 어디서 날아오는 거냐고? 헙!?”

사람들이 숨 쉬는 것을 잊었다. 건물 사이사이로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찬란하게 빛났다. 그래서 아름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고병갑은 전신의 털이 곤두설 만큼 공포를 느꼈다. 적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대체… 어째서?

“왜… 왜 신성군이 여기 있단 말이야?”

그들은 백금색 판금 갑옷으로 무장한 신성 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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