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39화 (139/151)

139화 결전

“끄으…….”

곳곳에서 신음이 빗발쳤다. 힐러들이 황급히 치유 주문을 읊었으나 그새를 못 참고 죽는 사람이 허다했다.

고병갑도 갈라진 어깻죽지를 눌러 지혈하며 혁대 주머니에서 경단을 꺼내 먹었다.

「로드시여, 괜찮으십니까!」

도르마가 그림자에서 빠져나와 우려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고병갑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괜찮으니까 들어가 있어.」

「바몬드를 부르시지요. 저 인간 치유사들은 능력이 그다지 출중해 보이지 않습니다.」

「됐어, 이 정도는 경단이랑 운기만 취해도 충분해. 그것보다 얼른 도로 들어가. 적들에게 네 존재를 들켜서는 안 돼.」

「…알겠습니다.」

도르마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제 로드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렇듯 도르마는 고병갑이 감춘 비수였다. 이번 전투에서도 그 날카로움이 빛을 발하지 않았던가. 물론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써먹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잠깐의 전투였는데도 이만큼이나 죽다니.’

그는 옆의 참사를 두 눈에 담았다. 너저분한 시체, 피, 오물. 그게 다였다.

자넷이 가볍게 휘두른 검에 2백가량의 헌터가 손도 쓰지 못하고 즉사했다. 사망자 명단에는 S급 헌터도 있었다.

13명의 S급 헌터 중 2명 사망. 나머지 11명은 빠짐없이 중상을 입었다. 수족 하나쯤 잘라 먹은 건 예삿일이었다. 배가 갈라져 내용물이 줄줄 새는 이도 있었다.

힐러와 경단, 포션이 없었다면 A조는 자넷 한 명에 의해 리타이어 됐으리라. 새삼 SS급이란 타이틀이 지닌 위용이 실감 됐다.

살아남은 칠백몇십 명의 인원은 사망자들의 시체를 뒤적여 보급품을 챙겼다. 경단과 포션 같은 것 말이다.

전쟁을 준비하느라 채굴한 수정을 모두 경단에 꼬라박았지만 그럼에도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한 알도 낭비할 수 없었다.

“갑시다.”

사람들은 소리 없이 대답한 뒤 몸을 움직였다. 망자의 주검 앞에서 애도를 표하는 건 나중에나 할 일이었다.

진행할수록 사방에서 악취가 쏟아졌다. 죽은 그러글이 부패하는 것이다. 하나 위로라면 그러글의 시체 주위로 일루미션의 시신도 겹겹이 쌓여 있었다.

적 한 명과 그러글 10마리를 바꿔 먹어도 남는 장사다. 일루미션을 섬멸할 수만 있다면 그러글이야 얼마든지 내줄 수 있었다.

펑! 펑! 펑!

전방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군인들이 쏴 대는 폭약이 아직 현역임을 과시하는 소리다.

일부 인원들은 제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표정을 지었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화기가 겨냥하는 곳은 영주의 중심가이고, 현재 위치와 거리가 꽤 됐다.

곧 커다란 교차로가 나왔다. 다만 대교가 무너져 내린 탓에 아래쪽 강으로 우회해야 할 듯싶었다. 헌터들은 서둘러 적당히 딛고 내려갈 곳을 찾아 나섰다.

그때였다. 맞은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몹시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고병갑과 일부 S급 헌터들은 그 사실을 눈치챘다. 하지만 감각이 무딘 이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1초 뒤.

“끄악!”

“으아아악!”

“뭐, 뭐야!?”

이쪽을 향해 쏟아진 것은 투사체였다.

수천? 아니, 수만 발의 카르마 탄환이 이곳으로 쏘아졌다.

그것은 몹시 작았으나 위력까지 작지는 않았다. 헌터들은 재빨리 카르마로 몸을 보호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은 몸이 꿰뚫리거나 아예 파괴되며 죽었다.

“칫!”

심승섭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양손을 타고 가공할 전류가 방출되어 장벽을 만들었다. 스치기만 해도 바싹 구워질 만큼 살벌했다.

건너편에서 쏘아지던 카르마 탄환들은 장벽에 닿는 족족 소멸했다.

“적이다!”

“다들 올라와!”

헌터들이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하나 이미 벌집이 된 이들은 도로 올라오지 못하고 강바닥으로 추락했다.

갑자기 세상이 밝아졌다. 높다란 산맥 뒤에 숨어 있던 해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 것이다. 일출이었다.

시야가 환해짐에 따라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교 아래 흐르는 것이 강물이 아니라 시체 썩은 구정물이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고병갑은 서둘러 적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건너편에 보이는 거라곤 민가와 낡은 아파트 두 채가 전부였다.

「로드시여, 저기! 저 높은 건물의 옥상입니다!」

그림자에 숨은 도르마가 말을 걸어왔다. 고병갑의 고개가 번뜩 돌아가며 낡은 아파트 옥상으로 향했다. 그곳에 사람 비슷한 형상이 어렴풋하게나마 보였다.

멀고 또 높았다. 하지만 고병갑은 그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고 확신했다.

다음 순간, 그 존재의 주변으로 다시 수만 발의 카르마 탄환이 떠올랐다. 떠오르고, 쏘아졌다.

배리어를 펼칠 수 있는 헌터들은 일제히 보호막을 전개했다.

고병갑은 바닥으로 검을 꽂아 넣었다. 일순 검을 중심으로 내력의 벽이 퍼지며 반경 10미터 정도의 영역을 감쌌다.

하나 주먹 하나로 하늘을 틀어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배리어에 소외된 이들은 꼼짝없이 죽어 나갔다.

설령 배리어 뒤에 숨었다고 한들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급이 안 되는 보호막은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파괴됐다.

억! 끄억! 하는 단말마의 비명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학살. 그야말로 학살이었다.

“이러다가 다 죽겠어!”

“후퇴! 뒤로 물러나!”

사람들은 탄환의 사거리 밖으로 황급히 달아났다.

“옥상입니다! 아파트 옥상 말입니다!”

고병갑이 바락바락 외쳤다. 원거리 타격이 가능한 이들은 재빨리 알아듣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공격을 날렸다.

잠시 후 두 채의 아파트가 허물어지며 굉음과 먼지구름을 만들어 냈다. 소낙비처럼 퍼붓던 맹공도 잠시나마 맥이 끊겼다.

“지금이야!”

고병갑은 땅에 박아 둔 검을 뽑으며 달려 나갔다. A급, S급 헌터들도 곧장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한껏 가속하여 무너진 다리를 단번에 뛰어넘었다.

자욱한 먼지구름이 시야를 가렸다. 고병갑은 적의 기척을 감지하려 노력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적이 은신에 능한 모양이다.

아군 몇 명이 카르마를 폭발시켜 단번에 먼지구름을 걷어 냈다. 그러자 이쪽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한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인 서구계 청년이었다. 그는 달아나려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접근할 뿐.

“흐압!”

“하아아!”

아군 헌터들은 대뜸 공격부터 퍼부었다. 전류, 화염, 칼날 바람 등. 그 종류도 각양각색인 투사체가 저쪽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사내가 손을 한 번 휘적이자 등 뒤에서 카르마 탄환이 잔뜩 튀어나와 반격했고, 이쪽 공격을 모두 상쇄시켰다.

뒤이어 그가 합장했다. 사내에게서 퍼져 나간 농밀한 카르마가 땅에 퍼졌고, 이내 솟아오르며 형태를 잡았다.

그건 검을 든 전사였다. 새파란 카르마로 이루어진 전사. 그 수가 어림잡아 쉰은 됐다.

카르마 전사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이쪽에서도 즉각 응대에 나섰으나 비등비등했다. 카르마 전사 한 명의 전투력이 웬만한 일류 헌터 급은 됐다.

고병갑은 조무래기를 지나쳐 사내에게 직접 달려들었다. 저놈을 가만히 뒀다간 또다시 천지를 뒤덮는 카르마 탄환이 날아들 터다.

고병갑이 열 걸음 안팎까지 접근했을 때도 청년은 팔짱을 낀 채 요지부동이었다.

오만방자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고병갑은 서두르지 않았다. 검을 높게 쳐들고 충분히 힘을 실은 뒤에 내리찍었다.

턱!

그의 공격은 보기 좋게 막혔다. 어느새 생성된 두 자루의 카르마 검이 허공에서 막아 낸 것이다. 사내는 여전히 팔짱을 낀 상태였다.

“자넷을 죽였나?”

앳된 얼굴과 달리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고병갑은 뒤쪽 전황을 흘끗 살피며 대답했다.

“그 여자 이름이 자넷인가 보군.”

“어떻게 죽였지. 네가 죽였나?”

“다 같이 했지.”

“이해가 안 되는군. 너희 같은 떨거지에게 죽을 여자가 아닌데.”

“나도 하나 물어보자.”

사내가 한쪽 눈을 찌푸리며 갸웃거렸다.

“뭐지?”

“저 너머에 고건룡도 있나?”

“그의 존재 여부가 너희에게 무슨 의미를 가져다주지?”

“대답해 줄 마음이 없나 보군. 직접 확인해 보겠다.”

고병갑이 검 손잡이를 다잡았다. 그러자 앞을 가로막던 두 자루의 검이 와장창 깨져 나갔다.

금발 청년의 눈이 커졌다. 고병갑은 잽싸게 달려들어 검을 찔렀다. 청년은 뒤로 물러서며 이번엔 네 자루의 검을 만들어 막았다.

“수준급의 카르마 조형. …네가 클로흐리아인가 보군.”

“나에 대해 알고 있나 보군.”

“웬만한 건.”

“그런가.”

네 자루의 검이 일제히 벌어졌다. 고병갑은 멀찍이 튕겨 나갔고, 서둘러 자세를 다잡았다.

“나에 대해 알고 있다면 꽁지 빠지게 도망갔어야지.”

클로흐리아가 기운을 내뿜었다. 고병갑뿐만이 아니라 전투를 치르던 헌터들 모두 안색이 바뀌었다.

무척이나 농밀하고 방대한 카르마였다.

‘이제까지는 전력이 아니었다는 건가?’

카르마가 형태를 잡았다. 그것은 각각 전사, 궁사, 창병, 거인, 야수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 수가 백을 넘고 5백을 넘겼다. 나중에 가서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많아졌다.

그건 군단이었다. 카르마 병사로 이루어진 군단.

클로흐리아가 힘차지만 방만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인군단. 그것이 나를 지칭하는 단어다.”

“…고건룡은 단신으로 나라를 상대한다던데, 그만큼은 못 되나 보군.”

“뭐, 부정하지는 않으마. 그렇다 한들 저런 오합지졸을 데리고 나를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카르마 병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고병갑은 이를 갈며 뒤쪽 헌터들을 살폈다. 그들은 이제 막 끊어진 다리를 넘어온 참이었다.

‘제기랄, 상성이 좋지 않아.’

이제 남은 헌터는 6백 남짓이다. 개중 B급 이상 되는 자는 2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하위 각성자들은 카르마 병사와 1:1 교환도 되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좀 더 아껴 두고 싶었는데.’

고병갑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네놈을 잡으려면 정예 군단이 있어야겠군.”

“그것이 있을 때의 얘기―”

「나와라.」

고병갑이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넓게 펼쳐진 문 너머로 미리 대기하고 있던 고블린 군단이 진군해 나왔다. 걸친 갑옷과 무기는 모두 양질의 것이었다.

엄선하고 엄선한 최정예 1,000명.

12개의 중대 앞에는 각 소대를 지휘하는 영웅이 섰다. 도르마도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의 중대 앞에 가서 섰다.

“이… 이게 무슨…….”

난데없이 나타난 고블린 대군에 클로흐리아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고병갑은 검을 쳐들고 제일 선두로 나섰다.

「어이, 고붕.」

「예, 로드시여!」

한 개 중대를 이끄는 고붕이가 힘차게 대답했다. 녀석은 곡괭이를 길게 늘인 것 같은 폴암을 어깨에 지고 있었다.

「너까지 싸우게 해서 미안하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로드를 위해 싸울 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래, 고맙다.」

그가 고붕이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기고 앞에 섰다.

“네놈은 대체… 정체가 뭐냐? 고블린 사육사라도 되는 거냐?”

“자, 이젠 내가 너를 잡을 수 있을까?”

“…사람을 놀래키는 재주는 있구나. 하지만 개 떼로 사자 무리를 잡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 개 떼로 사자 무리를 잡을 수는 없지.”

고병갑이 칼을 들어 앞을 겨냥했다.

“누가 개고 누가 사자인지 가르쳐 주마.”

그리고 말했다.

「한 놈도 남김없이 쳐 죽여라.」

「가자! 나를 따라!」

「케르륵!」

신 만다라 기사단이 질주했다. 시가지엔 전율을 일으키는 함성이 만연했다.

창칼이 뻗어 나갔다. 그것은 예외 없이 카르마 병사의 머리통을 깨고 가슴팍을 갈랐다.

제왕의 기개가 스며든 병사들은 본래 능력보다 곱절은 빠르고 강하게 움직였다.

고병갑은 내력을 발산하며 훌쩍 뛰었다. 클로흐리아의 머리 위까지 단번에 당도한 그가 검을 내질렀다.

클로흐리아의 병사들이 재빨리 그 앞을 막아섰으나 고병갑의 검격에 가루가 돼 버렸다.

랜드리올의 말대로였다. 왕은 신하와 함께할 때 제힘을 오롯이 발현할 수 있다.

클로흐리아가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고병갑이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병은 병으로, 장은 장으로 잡는다. 그리고 왕을 잡는 건 왕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