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38화 (138/151)

138화 결전

자정과 일출의 중간. 새벽녘은 음침하고 또 음험하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몸에 서리가 앉으면 오감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작용한다.

사람들은 분주하다. 손과 발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소리 없는 고함도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준비는 빠르고 은밀하게 완료됐다. 한 지점을 겨냥하고 사열한 중화기 앞으로 병사들이 섰다. 그들의 얼굴엔 기대감과 두려움이 함께 녹아 이상한 빛깔을 띠었다.

이등병 약장을 단 어느 병사는 몸을 덜덜 떨었다. 그 떨림이 대변하는 감정은 무엇일까. 추위와 배고픔? 공포? 그것도 아니면 전율일지도.

“무섭냐?”

반쯤 뜯긴 병작 약장을 단 병사가 말했다. 그는 백내장이 낀 듯 한쪽 눈이 하얬다. 왼쪽 가슴팍에 달린 명찰에는 정영운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준규 이병은 굳은 입으로 용케 대답했다.

“아닙니다. 추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손 좀 녹여. 아직 작전 시작하려면 좀 남은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는 선임이 시키는 대로 했다. 바짝 언 손이 바지 안으로 들어가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준규는 동태 같은 눈으로 155mm 견인포를 응시하다가 불쑥 말했다.

“저… 정영운 병장님.”

“왜.”

“이번 작전이 마지막인 겁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 새꺄. 내가 지휘관인 것도 아닌데.”

“예…….”

“나도 너랑 똑같아, 인마. 까라니까 그냥 까는 거야.”

“알겠습니다.”

정영운은 눈동자만 움직여 사위를 훑었다. 이 이름 모를 산기슭은 군인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소속도 보직도 모두 달랐다.

문득 그의 눈가로 지난날이 스쳐 지나갔다. 지옥 그 자체였던 이북 땅의 악몽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순간이 희로애락의 교차점이었다.

“나나 너나 참 기구하다.”

“잘못 들었습니다?”

“전역도 못하고 이 지랄 하는 나나, 좆같을 때 군대 와서 그러고 있는 너나 둘 다 기구하다고.”

이준규가 뭐라 대답하려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정영운이 선수 쳐 말했다.

“이번 작전이 마지막이냐고 물었냐?”

“예, 그렇습니다.”

“마지막일 거다. 뭐가 됐건 마지막이 될 거야. 그러니까 살자.”

“알겠습니―.”

“뇌관 결합해!”

“뇌관 결합!”

별안간 고성이 울렸다. 산기슭의 고요가 한순간 깨졌다. 병사들은 복명복창하며 발 빠르게 명령을 이수했다.

이제 정말 시작이다.

“준비!”

“준비이으아!!”

“쏴!”

“쏴으아!!”

펑! 펑! 펑!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포구가 일제히 불을 내뿜었다. 새벽녘을 어지럽힌 포성이 전쟁의 서막을 알렸다.

* * *

“시작됐네.”

정선경이 저 먼 곳을 응시하며 읊조렸다.

은은한 포성과 함께 보이는 불그스름한 불빛. 이렇게 보면 까만 팔레트에 물감을 풀어놓은 듯했다.

앞으로 꼬박 2시간은 포격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아직 이쪽이 나설 때는 아니다.

고병갑은 주변을 살폈다.

영주 시내와 이어진 28번 국도는 무장한 헌터들로 가득했다. 병력은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915번, 931번, 935번 국도 등등. 영주 시내 와닿는 일곱 개의 갈래에 무장 병력이 포진해 있다. 그들은 어서 돌격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싸움이 끝이면 좋을 텐데. 그렇지는 않겠지?”

정선경이 떠보듯 말을 걸었다. 눈을 감은 채 그러글을 통솔하던 고병갑은 잠시 연결을 끊었다.

“글쎄, 저곳에 우리가 찾는 적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고건룡?”

“어. 이 사태를 종결시키기 위해서는 놈의 목이 필요하니까.”

“막상 그 인간과 맞붙는다고 생각하니까 좀 떨리네. 지상 최강의 사내라, 얼마나 강하려나.”

고병갑은 적절하게 맞장구치는 대신 품을 뒤적였다. 안주머니에서 나온 건 반쯤 비워진 담뱃갑과 라이터였다. 그가 정선경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뭐야? 담배 없다며?”

그녀가 반색하며 물었다.

“몰래 몇 갑 쟁여 놨었는데 이게 진짜 마지막이야. 가지고 있다가 펴.”

“너는?”

“담배 태울 여유도 없을 것 같아서.”

“야… 그럼 나는 앉아서 노냐?”

정선경은 담뱃갑에서 한 개비만 꺼내 입에 물었다. 나머지는 돌려주었다.

“네가 잘 가지고 있어. 나중에 일 끝나면 꾸러 올 테니까.”

고병갑은 피식 웃으며 담배를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정선경이 뻐끔뻐끔 연기를 내뿜었다.

“고블린 친구들은 안 불러?”

“부를 거야. 지금은 아니지만.”

“하긴, 몇 시간 대기해야 할 텐데. 지금 나와 봤자 춥기만 하겠다. …야, 병갑아.”

“왜?”

“넌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뭘 할 거냐?”

“뭘 하긴, 열나게 살아가야지.”

“아스빌람에서? 아니면 여기서?”

고병갑은 정선경의 눈을 잠깐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왔다 갔다 하겠지. 그런데 아마 아스빌람에 있는 시간이 더 길 거야. 내가 애들한테 신세 진 게 좀 많은 게 아니거든. 죽기 전에 걔들 염원을 다 이루어 주려면 남은 생으로도 부족해.”

“그러냐……. 너, 내가 전에 고블린 왕국 안주인 하겠다고 한 거 기억해?”

고병갑은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당연히 기억하지. 그걸 어떻게 잊어?”

“근데 그 말 못 지킬 것 같다.”

“어?”

정선경은 일부러 앞만 보며 처연하게 웃었다.

“그냥 요즘 드는 생각인데, 이 황폐해진 곳을 재건하려면 알량하게나마 내 힘이 필요할 것 같아서. 너랑 아스빌람에서 하하 호호 지내는 것도 좋겠지. 그런데 그러면 내가 두 다리 뻗고 잘 수가 없을 것 같네. 여기 남을 사람들이 눈에 밟히잖아.”

“…그렇긴 하겠네.”

“후후, 이거 나만 김칫국 마신 건가?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는 거 아냐?”

고병갑은 입맛을 다시며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렇지는 않은데… 일단 오늘 살아남는 게 우선이긴 하겠지.”

“킥킥, 맞네. 개똥밭이라도 구르려면 일단 이승에는 붙어 있어야 할 테니까.”

포성은 조금의 틈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꼬리를 물며 귓가를 울렸다.

한 곳에선 불꽃이 튀어 오르고, 반대편에선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늘어선 헌터들은 넋을 잃은 채 고요 속 아우성을 감상했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고병갑은 번뜩 뒷덜미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경북 영주의 온 방위를 둘러싼 112만 몇천 마리의 그러글 중 일부가 빠르게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포격에 휘말리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의 감각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상당한 실력자가 그러글 장벽을 헤치며 군인들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포격이 쏘아지는 위치를 파악하고 그들을 저지하려는 것이다.

‘침투한 자를 잡아라.’

고병갑은 그러글 떼에게 개념을 전달했다. 곧 어마어마한 숫자의 그러글이 범람하는 강물처럼 그리로 몰려들었다.

한데 그러글 죽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갔다.

“어, 어어?”

“저건?”

그때 헌터들이 하늘을 올려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고병갑의 시선도 자연히 같은 곳을 향했다.

하늘에서 푸른빛 무더기가 번쩍이더니 삽시간에 반구형 보호막을 형성했다. 그것은 적게 잡아도 반경 십수 킬로는 뒤덮는 크기였다.

“배리어라고? 저, 저게 배리어란 말이야?”

“말도 안 돼. 저렇게 큰 보호막이라니…….”

보호막은 보란 듯이 폭약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저런 것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다.

‘아루쉬라는 작자인가 보군.’

고병갑은 아리에나에게 들어 최후의 18인의 능력을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개중 아루쉬라는 인도인 사내는 방어술의 귀재라고 한다.

‘일단 저곳에 SS급 전력이 있는 것만은 확실해졌어.’

예상은 했다만 상대편의 대처는 빠르고 확실했다. 원래 그러글들을 진격시키는 시점은 포격이 끝난 이후로 예정돼 있었지만 그 시기를 앞당겨야 할 성싶었다.

‘진격, 모두 진격하라.’

고병갑은 사방위를 둘러싼 그러글에게 돌진 명령을 내렸다. 곧 그러글들이 한 점을 향해 몰려가기 시작했다.

“모두 태세를 갖추십시오! 곧 출병하겠습니다!”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와 같은 곳에 집결한 헌터들이 비장한 각오를 굳히며 무기를 고쳐 잡았다.

“각 조에 출병 소식을 전파하십시오. B조에겐 군인들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통신 장비를 지닌 이들이 발 빠르게 곳곳으로 통신을 보냈다.

‘일루미션의 추정 병력은 3천가량. 그에 반해 우리는 헌터로만 8천이다. 게다가 그러글은 100만이 넘어. 이길 수 있다. 충분히 이길 수 있어.’

고병갑은 정신을 집중하여 전황을 살폈다.

사방에 포진해 있던 그러글들은 머지않아 방어막에 닿았다. 놈들은 그것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 마구 두들겨 댔다.

달걀 하나가 바위를 깨지는 못하리라. 하지만 100만 개의 달걀이 쉴 새 없이 때려 박으면 아무리 단단한 바위라도 버텨 낼 재간이 없을 터다.

예상대로였다. 보호막에 균열이 가는가 싶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깨졌다기보단 저쪽에서 일부러 회수한 듯했다. 그 정도 크기의 보호막을 유지하려면 실로 방대한 카르마가 소모될 테니까.

바로 이어서 그러글과 일루미션이 직접 접촉했다. 백병전이 시작된 것이다.

고병갑은 감았던 눈을 치켜떴다.

“때가 됐습니다! 모두 갑시다!”

“가자!”

“싸우자!”

헌터들은 함성을 지르며 국도를 따라 내달렸다.

기세는 당장이라도 칼부림을 벌일듯했으나 사실 격전지까지 가려면 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힐러와 서포터들이 활력을 불어넣는 주문을 읊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지칠 줄 모르고 내달렸다.

B조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개 조도 각기 다른 방면에서 중심가를 향해 진격하고 있을 것이다.

고병갑이 속한 A조가 적들과 조우한 것은 대략 1시간 정도 뒤의 일이었다.

A조를 막아선 것은 15명쯤 되는 무리였다. 그들은 전신에 거뭇한 오물을 묻히고 있었다. 그러글의 파도를 헤치고 왔다는 증거물이었다.

그중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이가 한 명 있었다. 최후의 일원 중 하나인 자넷이다.

고병갑은 그녀의 이름까지는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최후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인디언의 외모를 그대로 물려받은 여인, 자넷은 대뜸 칼부터 휘두르고 보았다. 칼날에서 카르마가 쏟아지며 격렬한 폭풍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단번에 이쪽을 집어삼켰고,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 수십 명의 몸을 찢어발겼다.

칼질 한 번에 수십 명이라. 가성비로 치면 아주 극강의 가성비인 셈이다.

자넷은 곧바로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아군 헌터들은 재빨리 산개하며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대개가 헛수고였고, 자넷이 만들어 낸 칼날 폭풍에 몸이 난자되어 죽었다. B급 이상 상위 헌터쯤 돼야 간신히 막아 내는 게 가능했다.

“죽여!”

이쪽이라고 가만히 맞아 주지는 않았다. A조에 포함된 13명의 S급 헌터는 칼날 폭풍을 유유히 피하며 일제히 자넷을 덮쳤다.

“버러지들이!”

자넷은 단조롭게 받아쳤다. 직선, 직선, 직선. 대단한 것도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S급 헌터들은 그 별것도 아닌 공격에 어린아이처럼 쩔쩔맸다. 칼질 한 번에 수족이 잘리고 혈흔이 튀었다.

심승섭이 자넷을 향해 전격을 쏘았다. 자넷이 검풍을 일으키자 전격이 방향을 바꾸더니 도리어 심승섭을 집어삼켰다.

이슬아, 정선경, 유병건이 세 방위에서 자넷을 둘러쌌다. 검, 도끼, 창이 교묘하게 서로의 공백을 채워 주며 자넷에게 뻗어 나갔다.

생쥐 한 마리도 저 공세의 틈에선 빠져나올 수 없을 성싶었다. 하지만 자넷은 단순히 카르마를 발산하는 것만으로 세 사람의 방진을 깨트렸다.

그러자마자 길쭉한 검을 쏜다. 대나무처럼 곧던 자넷의 공격이 이번엔 뱀처럼 유연한 선을 그렸다.

“컥!”

“꺅!”

세 헌터는 순식간에 피범벅이 되며 무너져 내렸다. 서한웅은 곧장 자넷의 사각을 노렸다. 하지만 그녀가 보지도 않고 휘두른 검에 목이 댕강 날아갔다.

“뭐 저런 괴물이!”

상처 입은 헌터들이 일선 물러났다. 뒤쪽에 포진한 힐러 들이 온 사력을 다해 그들을 치료했다. 자넷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힐러 들을 향해 검기 다발을 쏘았다. 하지만 그것은 불현듯 몰아친 황금빛 격류에 막혔다.

“뭐?”

그녀의 시선이 대번에 돌아갔다. 고병갑이 돌격하고 있었다.

그의 검엔 금빛 내력이 실려 마구 회오리치고 있었다. 자넷이 이를 갈며 검풍을 쏘아 보냈다. 동시에 고병갑도 내력의 폭풍을 쏟아 냈다.

두 폭풍이 격돌하며 주변의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었다. 곧 두 사람을 칼을 맞대고 씨름했다.

자넷이 쏘듯 말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힘이구나. 넌 누구냐!”

“곧 죽을 건데 궁금한 것도 많군.”

고병갑은 차분하게 검을 휘둘렀다. 둔탁한 쇳소리가 연신 울렸다. 찰나의 순간 십수 번 공방이 오갔다.

자넷은 거리를 벌리려 검을 넓게 올려 쳤다. 고병갑은 오히려 몸을 수그리며 안쪽으로 진입했다. 당연한 결과로 그녀의 검이 고병갑의 오른쪽 어깨를 반쯤 갈라놓았다.

하지만 이는 살을 주고 뼈를 취하려는 그의 전략이었다.

「묶어라! 도르마!」

「예!」

고병갑의 그림자에서 새카만 덩굴이 마구잡이로 솟아올랐다. 그것은 자넷의 팔과 다리를 순식간에 옭아맸다.

“이게 무슨!? 큭!”

고병갑은 한 손만으로 검을 올려 그었다. 절삭의 기운이 스며든 칼날은 단숨에 자넷의 오른팔을 잘라 냈다.

자넷은 힘을 폭발시키며 몸을 구속한 덩굴을 죄다 뜯어 버렸다. 그리고 고병갑을 걷어찼다. 그의 입에서 왈칵 피가 터져 나왔다.

“감히―으거걱!”

비틀거리던 자넷의 몸으로 일곱 자루의 칼이 관통했다. 뒤에서 기회를 노리던 S급 헌터들이었다.

다음 순간. 일곱 자루의 칼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치솟았다. 자넷의 몸은 조각조각 나며 무너져 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