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폭풍전야
최후의 18인 중 한 명이자 세계 제일의 정신 지배자였던 아리에나 바바디. 그녀의 생전 위상만큼이나 사후 후폭풍은 거셌다.
일루미션은 더는 몬스터를 통제하지 못했다. 이제 몬스터는 말 잘 듣는 사냥개가 아니라 언제든 목을 물 수 있는 들개였으니.
일루미션의 지배에서 벗어난 몬스터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산이든, 황폐해진 도심이든. 몬스터는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놈들은 삼삼오오 뭉쳐 자기보다 약한 것들을 잡아먹으며 생을 연명했다. 그러다 그러글이라도 나타나면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고.
중요한 것은 일루미션 잔당이었다. 고병갑 일행은 요 며칠간 놈들을 관찰했다. 그들이 전과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이동 경로를 보면 일루미션이 결집하려는 장소는 이 일대 같아요.”
서시희는 테이블에 놓인 큼직한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경상북도. 그중에서도 충북이나 강원도에 닿아있는 윗지방이었다.
“희한하네예. 금마들은 죄다 밑으로 내려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와 갑자기 위로 올라온단 말입니까?”
한창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한창 남하하던 일루미션은 몬스터를 잃은 직후 핸들을 돌렸다. 그뿐 아니라 전국에 포진해있던 자잘한 세력들까지 한 점을 향해 몰려들었다.
잘은 몰라도 분산돼있던 전력을 밀집시키는 것은 확실했다.
“다른 게 더 있겠어요? 이제 몬스터를 못 쓰니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버티려는 거겠지. 오히려 잘된 거 아녜요? 한방에 싹 쓸어버리면 될 테니까.”
정선경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제 생각도 같아요. 그네가 아무리 괴팍한들 몬스터를 다루지 못하는 이상 전처럼 행동할 수는 없겠죠. 저분 말처럼 놈들이 결집하길 기다렸다가 일망타진하는 편이 여러모로 수고를 덜 것 같군요.”
잠자코 있던 심승섭도 의견에 힘을 실었다. 이에 동조하는 여론이 과반이었다.
고병갑도 같은 생각을 했다. 산개했던 적이 알아서 모여주면 고마운 일이다. 더구나 아리에나가 말하지 않았던가. 본인의 정신지배가 풀리면 조직 역시 저절로 와해할 거라고.
어쩌면 손대지 않고 코를 풀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러글을 앞세워 진격하면 최소한의 피해로 적들을 섬멸할 수 있을지어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SS급의 존재였다.
고병갑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자질구레한 것들은 뭉쳐있어도 어찌어찌 잡을 수 있다. 하지만 SS급만큼은 각개격파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놈들이 뭉치면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닐 텐데.’
A급 1,000명을 상대하는 것보다 SS급 2명을 상대하는 일이 훨씬 버거울 것이다. 강한 놈들이 뭉쳐있으면 시너지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니까.
‘하지만 그놈들의 행방을 쫓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놈들도 아리에나의 죽음을 알았으니 훨씬 조심스럽게 행동하겠지. ……어쩔 수 없나.’
안타깝게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전면전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다들 동의하십니까?”
그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그들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대신 의연한 눈빛을 보내왔다. 고병갑은 그것을 동의의 신호로 보았다.
“그럼 당분간은 놈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재정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좋겠네요. 근래 들어서는 계속 싸워 왔으니까요. 사람도 많이 죽었고, 말은 안 해도 다들 지쳤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자 회의는 이만 마무리하도록 하죠.”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고병갑은 회의장에 남아 서시희를 불렀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꼬나물며 물었다.
“당신은 전면전을 벌이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번거로움은 확실히 줄겠네요.”
“그게 다인가?”
서시희는 무표정하게 고병갑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많이 죽겠죠. 이쪽이나 저쪽이나.”
“그렇겠지. 전쟁이니까.” “승산이 없지는 않을 거예요. 저쪽은 몬스터를 잃었고, 이쪽은 그러글을 얻었으니까. 다만…….”
“다만?”
그녀는 얼마간 뜸을 들였다.
“아리에나. 그 여자가 말했더랬죠. 육망교가 한반도를 노리고 있다고요. 나도 그 사실은 처음 알았어요. 그래서 제법 놀랐고요.”
“그래서?”
“놈들이 그 ‘방주’라는 것 때문에 여전히 한반도를 노리고 있다면, 나머지 최후의 일원들도 이리로 몰려들 거예요. 그들 표현을 빌리자면 방주에 올라야 할 테니까요.”
“그렇겠지.”
“아리에나를 죽였으니 앞으로 상대해야 할 SS급은 열여섯이죠. 그중엔 고건룡도 있을 거고요. 난 그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중이에요.”
“당신. 알고 있는 SS급 헌터 없나? 그들한테 조력을 요청할 수는 없을까?”
서시희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회의적이네요. 난 지난 십수 년간 SS급 헌터들을 포섭하려고 다분히 노력했어요. 하지만 모두 거절당하거나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죠. 아니면 이미 육망교와 한통속이거나요.”
“지금 세상 굴러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그 사람들도 뭔가 깨닫는 바가 있지 않을까?”
“글쎄요. 내 생각엔 그냥 자기 살길이나 찾아 나설 것 같은데요. 그들 입장에선 그저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일 테니까요.”
“그건 너무 비약이지 않나?”
“과연 비약일까요?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당신 같으면 잘 알지도 못하는 어느 작은 나라에서 사달이 났다고 선뜻 가서 도와주겠나요? 목숨까지 걸고? 각성 등급이 정의로움의 척도가 되어주진 않아요.”
그가 말을 삼켰다. 확실히 서시희 말대로였다.
실제로 아프리카나 아르헨티나에서 대규모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을 때도 자신에겐 ‘남의 나라 일’이었지 않은가?
설령 인류의 존망이 걸렸다고 어필한들 ‘그래? 그럼 내가 도와줘야지!’라며 앞장설 위인이 몇이나 될까.
지금은 불확실함이 아닌 확실함을 추구해야 할 때였다.
“……그럼 일단 아랫지방으로 내려가도록 하지. 그곳의 난민들을 포섭해야겠어. 그들이라면 우리에게 협조할 테니까.”
“그러는 게 좋겠네요.”
이튿날. 고병갑과 서시희는 비행하여 한반도 남단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난민들이 모여있을 거라는 기대를 안고서.
다행히 기대가 그를 배신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반도 남단에는 정말로 엄청난 규모의 난민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곳에선 각성자들끼리 자경단 비슷한 것을 결성하여 난민을 지키고 있었다. 허나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몬스터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주는 대가로 많은 양의 식량과 물자를 독차지했으니까.
일부 소외된 극빈 계층은 길바닥에 나앉아 얼어줄거나 굶어 죽었다. 아니면 빵 한 조각을 더 차지하기 위해 서로 날붙이를 겨누기까지 했다.
“법망과 인프라가 무너져 내리니 바로 무법지대가 돼버리는구먼.”
고병갑은 그런 거리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정말 인간 로드라도 나타나지 않으면 이 혼란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뭐가 됐건. 두 사람은 피난지를 지키는 자경단을 찾아다녔다. 그들을 찾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어느 피난지이건 가장 때깔 좋은 곳을 찾아가면 됐으니까. 두 사람이 처음 방문한 곳은 경남 양산이었다.
자경단은 당연히 외부인인 고병갑과 서시희를 경계했다. 하지만 신분을 확실히 밝힌 이후부터는 기세를 한결 누그러뜨렸다.
두 사람은 그들에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가감 없이 들려주며 협조를 구했다.
“믿기 힘든… 이야기로군요. 하긴. 저희도 줄곧 의아했습니다. 대체 그놈들은 뭐길래 몬스터를 데리고 다니며 같은 인간을 죽일까 하고요. 그런데 그런 배후가 숨어 있었군요.”
“저희는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부디 협조해주시길 바랍니다.”
“선뜻 결정하기 어려운 사항입니다. 결정할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고병갑과 서시희는 잠시 눈빛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충분하겠습니까?”
“충분할 것 같군요.” “예. 아, 그리고 말씀 좀 묻겠습니다. 혹시 이곳 말고도 대규모 피난민을 거느린 곳이 어디인지 알고 계십니까?”
“바로 지척인 김해, 창원, 울산 등에도 피난민이 꽤 모여있는 줄로 압니다. 가장 규모가 큰 곳은 당연히 부산인데, 거기는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에 치여 죽을 판이라는군요. 굶어 죽는 사람도 하루 수천 명씩 되고요. 흠… 전라도 지방에도 피난민이 꽤 될 겁니다. 얼핏 듣기로 패전한 군인들이 광주를 중심으로 정착했다고 하니까요. 꽤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일주일 후에 뵙도록 하지요.”
고병갑과 서시희는 양산을 시작으로 사람이 모여있다 싶은 곳엔 죄다 가보았다.
그중에는 이미 몬스터에 의해 폐허가 돼버린 곳도 있었고, 생각보다 훨씬 잘 되어있는 곳도 있었다. 그렇게 몇 군데 돌아다니니 무슨 중세 시대 봉건 국가를 보는 기분이었다.
어쨌건 고병갑은 그들에게 전쟁에 가담하라고 협조를 구했다. 희망적인 점이라면 대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들도 자신들의 처지가 벼랑 끝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인프라가 모조리 무너져내린 상황에서 버텨 봐야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는가?
말라 죽기를 기다리기보단 비수를 내지르는 편이 낫다고 계산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편, 아스빌람에서는 훗날 벌어질 전쟁을 위한 대비가 한창이었다.
배급하는 식량을 절반으로 줄이고, 그만큼을 창고에 비축했다. 무기와 보호구 생산에도 박차를 가했다.
전쟁은 인간들이 주축이 되어 치를 것이나, 또 모르는 일이기에 병사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하루가 흐르고, 이틀이 흐르고, 보름 넘는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신년이 밝았다.
하지만 아무도 신년이 밝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지 않았다. 다른 일만 해도 머리가 빠질 정도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23.
“일루미션의 위치가 파악됐습니다. 그들은 현재 경북 영주에서 결집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요.”
회의실에 인원이 늘었다. 거의 백 명 가까운 사람이 아스빌람의 회의실을 채우고 있었다.
각지에서 피난민을 거느리고 있는 자경단의 수장들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한편에는 군복을 차려입은 현역 군인들도 있었다.
지난날. 첩보 활동에 나섰던 이들이 앞에서 브리핑했다. 드디어 일루미션의 위치를 확정했기 때문이다.
“경북 영주라. 왜 그곳에 모여있는 걸까요.”
누군가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해줄 수 없었다.
일루미션이 워낙 삼엄히 경계하고 있어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꾸물거릴 이유가 있습니까? 위치가 확정됐으니 먼저 쳐버리지요.”
군인들은 기습을 주장했다. 현재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총력을 쏟아붓겠다며 말이다.
그들의 주장은 그럴듯했다. 1차 적으로 포탄을 쏘아 갈기고, 그다음 그러글을 투입하여 적을 제압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총력이 투입해 적의 잔당을 소탕하면 된다는 것이다.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사항이지만, 그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오랜 피난 생활에 지쳐 있었고 뭐가 됐든 결실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투표를 진행하겠습니다.”
고병갑이 주도하여 찬반 투표를 벌였다. 결과는 8할의 찬성을 거두며 기습선공이 결정되었다.
그들은 기습의 일시를 두고 7시간의 토론을 더 벌였다. 마침내 해가 저물었을 때가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로 해산했다.
기습은 닷새 뒤. 새벽 3시로 결정이 났다.
고병갑은 발타드렌을 잠시 떠나 솜니움으로 향했다. 그곳에만 가면 고향에 간 듯 마음이 편해진다.
「앗. 로드시여. 오셨습니까?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정신이 없다 보니까.」
늦은 저녁임에도 고붕이는 잠들지 않고 있었다.
고병갑은 그날 고붕이와 함께 수다를 떨며 밤을 보냈다. 어쩌면 이런 사소한 잡담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닷새 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