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방주’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고병갑은 집요하게 캐물었다.
아리에나는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일종의 승강기란다. 천상과 지상을 이어 주는 엘리베이터.
고병갑의 머릿속에 한반도가 두둥실 떠올라 구름 위로 치솟는 그림이 그려졌다. 세상에, 부유하는 대륙이라니. 그는 그런 게 정말로 있다면 한번 보고 싶다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아리에나는 방주가 그런 물리적인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덧붙여 방주가 완성되려면 그 위에 불신자가 단 한 명도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일루미션이라는 괴뢰 집단이 닥치는 대로 인간 사냥을 하는 것은 그러한 까닭에서였다.
-원래는 대주교가 직접 와서 방주를 비울 계획이었어. 시종으로 쓰려고 신성 전사 하나를 되살린다고도 했었는데, 걔가 갑자기 죽었다네? 뭐, 여하튼 서시희 그 미친 할망구가 난동을 부린 탓에 일이 틀어졌지. 해서 대주교 대신 나를 비롯한 일곱이 이곳에 온 거야. 나는 이런 꼴이 돼 버렸지만.
-현재 고건룡의 상태는 어떻지?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어. 그 미친 할망구한테 전해 줘. ‘당신 진짜 아까웠다.’고 말이야. …그 할망구, 보통내기가 아닌 줄은 알고 있었다만 설마하니 대주교를 그렇게까지 밀어붙일 줄은 몰랐어.
-하면 방주를 비워야 하는, 그러니까 너희 표현으로 불신자를 전부 없애야 하는 이유는 뭐지?
-글쎄,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몰라. 대주교가 시키는 걸 따를 뿐이니까. 언뜻 들은 바로는 카르마를 보유하지 않은 인간이 끼어 있으면 방주를 만들 때 부정이 탄다고 하더라고.
-어처구니가 없군. 한반도 인구가 5천만이 넘는데 정말 다 죽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나?
-그래서 조직 내에서도 반발이 많았어. 여긴 쓸데없이 넓고 사람도 많으니까. 그런데 대주교가 고집을 부리더라. 왜 그랬을까? 향수병이 겁났던 걸까? 그 사람 속은 아무도 모르지. 그런데 그렇게까지 허무맹랑한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5천만 중 천만은 벌써 뒈졌을 테니까.
이 무렵 아리에나는 실실 웃었다. 제 처지를 망각한 건지, 아니면 제 처지가 우스꽝스럽다고 느낀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너희는 어디까지 침투해 있는 거지?
-푸하핫!
그녀가 이번엔 파안대소했다. 그 반동으로 격통이 밀려오자 오만상을 찌푸리며 끙끙 앓았다. 그래도 입가는 여전히 헤죽거렸다.
-닿아 있을 만큼 닿아 있지. 인간들은 참 병신 같단 말이야. 힘 있고 욕심 많은 노인네들이 특히 그래. 불로불사니 영원불멸이니 그럴듯한 말로 꼬드기면 알아서 설설 긴단 말이야. 이봐, 세계의 경찰이라 불리는 미국이 왜 아직도 어영부영한 태도를 보이겠어? 중국은 바로 옆 나라에서 이 난리가 벌어졌는데도 왜 못 본 척하고? 그래, 어지간한 나라의 수뇌부는 다 우리와 한통속이야. 자기네가 버림패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등신들이지.
-버림패라고?
-맞아, 버림패. 이건 정말 극비 사항인데 알려 줄게. 천상계에 오를 수 있는 건 우리 최후의 일원들뿐이야. 그 외 모든 떨거지는 그냥 쓰다 버리는 말에 불과해. 놈들은 그것도 모른 채 극락의 세상이 도래하면 자기도 한 다리 걸칠 수 있는 줄 알아. 참 같잖지?
-같잖기보단 기가 막히는군. 대체 육망교의 규모가 얼마나 큰 거냐?
아리에나는 힘든지 잠깐 쉬었다. 그리고 답했다.
-세계적인 길드, 헌터, 정치인. 웬만하면 다 우리 손속에 있다고 할 수 있지.
-무슨 수로 다 매수한 거냐? 낙원이라는 파랑새만으로 꼬드기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는데.
-그래서 당신네가 땡잡았다는 거야. 날 잡았잖아.
-뭐?
-내 정신 지배 능력으로 세뇌한 거라고. 젠장, 조직 내에서 나만큼 고생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이렇게 뒤지다니, 내 팔자도 참……. 아무튼 날 죽이게 되면 그네들에게 걸린 세뇌가 풀려. 급작스럽게 변하진 않겠지. 하지만 서서히 이상함을 깨닫게 될 거야. 그럼 조직은 필연적으로 붕괴할 거고.
아리에나는 이제껏 맹목적 신뢰를 보냈던 신도들이 조직에 의구심을 품게 될 거라고 말했다. 덧붙여 몬스터 또한 통제할 수 없게 된다고 했다.
육망교 입장에선 확실히 재앙이었다.
-일루미션도 예전부터 존재했던 건가?
-아니, 일루미션이란 건 급조된 거야. 여기가 방주로 채택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런 별 볼 일 없는 나라까지 밑 작업할 필요가 있겠어?
-그렇겠군.
아리에나를 죽이면 그녀가 지난 20여 년에 걸쳐 전 세계에 걸어 둔 정신 지배가 해지될 것이다.
그렇다면 육망교는 단숨에 수족을 잃는 꼴이 된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아리에나를 잡은 것이 조커가 되었다.
고병갑은 이쯤에서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너는 육망교에서 고건룡만큼이나 중요한 취급을 받을 텐데, 왜 네가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거냐?
-뭐, 위험? 지랄이 짜네. 저 바깥의 떨거지들이 나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댈 수 있을 줄 알아? 천만의 말씀이야. 내가 이 꼴이 된 건 순전히 당신 때문이라고. …그러고 보면 당신은 대주교와 비슷해. 난 당신 안에 있는 것들을 봤어. 그것들은 대체 뭐지?
고병갑은 설명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대번에 무시해 버렸다. 아리에나는 조금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고병갑은 몇 가지 자질구레한 것들을 더 물어보았고, 아리에나는 착실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정말 삶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선 가장 중요한 물음이 남았다.
고병갑은 감았던 눈을 떴다.
아리에나는 여전히 포박된 채 축 늘어져 있다. 그녀의 눈은 퀭했고 눈그늘은 새카맸다. 뭐가 그리 웃긴 지 아까부터 실없이 웃고 있었다.
고병갑이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너의 죽음으로 눈앞의 먹이를 잃게 될 육망교는 어떻게 행동할까?”
꽤 오랜 침묵 끝에 들려온 말소리인지라 아리에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고병갑을 응시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쯤 열불 나게 나를 찾고 있을 거라는 거야. 흠, 내가 죽으면 걔네가 어떻게 행동하려나?”
아리에나는 얼마간 생각에 잠겼다. 대략 3분쯤 뒤에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계획을 앞당기지 않을까. 본래 최종 작업은 내년 봄쯤으로 예정했거든. 그걸 겨울 안에 끝내려고 총력을 쏟아붓겠지. 대주교 몸이 안 좋아서 되려나 모르겠지만… 뭐, 누가 이기든 잘들 해 봐. 내가 해 줄 말은 이게 끝이야.”
그녀는 이제 육망교를 완전 남 대하듯 했다. 고병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하지 않나? 죽고 싶지 않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야! 인제 와서 마음 흔들지 말라고. 난 네가 약속을 지켜 주기만을 바랄 뿐이야. 만약 네가 약속을 어기고 그 할망구한테 나를 넘긴다면 나는 죽어도 죽지 않고 너를 저주할 거야. 이건 진짜야. 명심해.”
“염려 마라. 약속은 지키니까.”
고병갑은 서시희의 고문 과정이 얼마나 잔혹했을지를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리에나의 고개가 그의 몸을 따라 움직였다.
“바로… 하려고?”
그래도 죽으려니 무서운 모양이다.
“왜?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나 물 한 대접만 먹자.”
“…알았다.”
「도르마.」
「예, 로드시여.」
도르마가 즉답했다. 고병갑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가서 물 한 대접 떠와.」
「알겠습니다.」
도르마는 1분도 되지 않아 물이 담긴 바가지를 들고 나타났다. 고병갑은 그것을 아리에나에 입가로 갖다 대었고, 아리에나는 게걸스럽게 물을 삼켰다.
“햐아… 이제야 좀 살겠네.”
죽음을 코앞에 두고 살겠다고 하니 희극적이다. 그녀가 아이처럼 웃었다.
“물 줘서 고마워.”
그게 아리에나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고병갑은 검을 그었고, 무방비했던 아리에나의 목은 속절없이 잘려 나갔다.
그가 몸을 획 돌리며 말했다.
「시체는 잔류 중인 그러글에게 던져 주…….」
「예?」
「아니다. 땅을 파고 묻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고병갑은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에 느낀 감정이 연민이었는지 고민했다.
* * *
“아리에나가 행방불명이라고!”
고건룡이 노성을 토했다. 마주 선 이들이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고건룡이 이마를 짚더니 몸을 비틀거렸다. 곁에 있던 란즈링이 서둘러 그를 부축했는데, 고건룡은 짜증 난다는 듯이 몸을 털었다.
그는 당최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근래 아리에나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한국으로 갔단다. 그리고 행방불명.
호전됐던 몸에 다시금 격통이 밀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왜 말리지 않았나? 아리에나가 떠나는 걸 보고만 있었단 말이야!”
“아니, 대주교. 우리도 당연히 말렸어. 그런데 제멋대로 가 버린 걸 어쩌라고? 그리고 임의로 사람을 보내라고 했던 건 대주교 당신이었잖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진정하시오, 대주교. 그 여자는 원래부터 천방지축이지 않았소. 소식이 끊겼다곤 하나 별일 없을 거요. 애당초 그 동녘 땅에 그녀를 위협할 적수가…….”
카장창!
불쑥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건룡을 비롯한 일원들의 시선이 저절로 돌아갔다.
연구실 직원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아 있었다. 바닥에는 깨진 비커 파편이 너저분했다.
연구원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눈앞의 인물들을 올려 보았다. 그러곤 자신의 몸을 훑었다.
“내… 내가 여기서 뭘 하는…….”
“…….”
최후의 일원들, 특히 고건룡은 쓴 입맛을 삼켜야 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리에나 바바디가 걸어 둔 정신 지배가 풀렸음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아리에나가… 죽었다고?”
“젠장! 같이 간 놈들은 뭘 하는 거야?”
그들이 호들갑 떠는 와중에 고건룡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전원 한국으로 가라.”
“음? 방금 뭐라고 하셨소?”
“다들 한국으로 가라고 했다.”
하대하는 말투에 빌리안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까닭을 물었다.
고건룡은 곧장 대답했다.
“일시를 앞당겨야겠다. 신년의 첫 달이 지나기 전에 방주를 가동할 것이야. 그러니 그전까지 방주를 비워라. 난 남은 기둥을 세운 뒤 한국으로 가겠다.”
“이보시오, 대주교. 아무리 우리라고 해도 아리에나의 협조 없이 그 넓은 땅을 다 청소할 수 없소. 그냥 다른 장소를 물색하는 편이…….”
고건룡이 빌리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빌리안은 흠칫 몸을 떨며 두세 걸음 물러났다.
“방주는 한국으로 한다. 대신 장소를 특정해 주지. 그리 넓은 영역이 아니니 시간 안에 비울 수 있을 것이다.”
빌리안은 ‘그렇게까지 고집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말을 삼켰다. 그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이튿날, 앞서 떠난 일곱의 뒤를 따라서 나머지 인원들도 한국으로 향했다.
홀로 남은 고건룡은 비밀 아지트 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장소로 향했다. 오로지 자신만이 출입할 수 있는 비밀 구역이었다.
거기엔 커다란 원통이 있었다. 원통은 온갖 장비와 연결돼 있었는데, 그 안에는 이름 모를 용액과 한 여인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벌써 18년도 전에 죽었다. 고건룡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뼈다귀밖에 없던 여인의 시신을 생전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건 인형에 불과했다. 육신만 온전할 뿐 영혼은 담겨 있지 않았으니까.
고건룡이 원통 앞에 섰다. 그의 눈이 애처롭게 빛났다.
“수진,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곧 다시 볼 수 있어.”
다시 다음 날, 고건룡은 네 번째 기둥을 세우기 위해 호주로 떠났다.
* * *
고병갑은 발타드렌의 거리를 걷다가 불쑥 아리송한 기분을 느꼈다. 굳게 걸어 잠근 성문과 성벽을 지키고 선 경비병들 때문이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스빌람에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할 존재는 없잖아?’
유일한 적이던 그러글은 이제 자신의 편이 되었다. 그렇다면 저렇게 성문을 걸어 잠그고 경비 태세를 삼엄하게 유지할 이유가 없다.
폭풍이 몰아치는 지구와 다르게 아스빌람엔 완벽한 평화가 도래한 것이다.
「성문을 모두 개방해라!」
「옙!」
고병갑은 발타드렌의 모든 성문을 활짝 열게 시켰다. 경비병 수를 10% 수준으로 줄였고, 그만큼 생업에 종사하는 고블린들이 많아졌다.
‘요새 아스빌람을 돌보는 일에 너무 소홀했지.’
지구의 일은 지구의 일이고, 아스빌람의 일은 아스빌람의 일이다.
고병갑은 간만에 헌터가 아닌 고블린 로드로서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