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35화 (135/151)

135화 폭풍전야

발타드렌의 어느 빈 건물. 공실을 밝히는 건 작은 촛대 하나가 전부다. 달빛조차 미치지 않는 음영 아래 한 여자가 포박된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리에나 바바디. 최후의 18인 중 한 명이며 세계 제일의 정신계 능력자다. 하나 현재는 그 위용이 무색할 만큼 만신창이였다.

범인(凡人)은 고사하고 어지간한 각성자라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 상처가 온몸을 뒤덮었다. 미약하게나마 오르내리는 가슴께가 아니었다면 살아 있다고는 절대 생각 못하리라.

빈집으로 몇 사람이 들어섰다.

그들의 행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막 전투를 마치고 복귀한 탓이다.

원래 같으면 노곤한 몸을 추스르기 바쁘겠지만 세계에 68명밖에 없는 SS급 헌터를 보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몰렸다.

“와 씨, 진짜 아리에나 바바디네.”

“저 사람을 실물로 볼 줄이야. 이걸 감격스럽다고 해야 하나.”

“살아 있는 거 맞아?”

동종 업계 정상을 본다는 설렘과 적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장내의 분위기는 이상 미묘했다.

관광지 명물 구경하듯 사람들의 행렬이 돌았다. 그때 서시희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들 보셨으면 이만 물러가 주세요.”

“엥? 가라고요? 심문하는 거 구경하면 안 됩니까?”

“네, 안 돼요.”

설명을 요구하는 여러 눈빛에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아무리 쇠약해졌다고 한들 이 여자는 최강의 정신 지배자예요. 듣기 거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급이 안 되는 분들은 이곳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조차 없을 거예요.”

“S급인 저희도 버텨 낼 수 없다는 말입니까?”

“몰라요. 버틸 수도, 못 버틸 수도 있겠죠. 제 말뜻은…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고 싶다는 거예요.”

“아… 예. 그런 거라면 알겠습니다.”

사람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떠나갔다.

고병갑의 잔류에 관해 딴죽 거는 이는 없었다. 아리에나를 잡아 온 장본인이 바로 고병갑이었으니까.

장내에 아리에나를 제외하고 세 사람만이 남았다. 고병갑, 서시희, 그리고 도르마.

서시희는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으며 포박된 아리에나를 내려보았다. 그런데 차분한 몸동작과 달리 얼굴은 분노에 잠식돼 있었다.

고병갑의 시선에 부들부들 떨리는 서시희의 주먹이 관측됐다.

“부아가 치미는가 보지?”

듣고도 안 들린 척한 건지, 아니면 정말 못 들은 건지 서시희는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고병갑이 한 번 더 부른 뒤에야 반응했다.

“네? 내게 뭐라고 했나요?”

“저 여자의 면상을 보니까 분이 차오르냐고 물었어.”

“네.”

서시희는 담담히 인정했다.

당연한 반응이다. 거의 성공할 뻔했던 고건룡 암살을 수포로 되돌리고, 아끼던 세 부하마저 빼앗아 간 것이 바로 눈앞의 아리에나였으니까.

“그래도 욱해서 죽여 버리면 곤란해.”

“나를 바보 취급할 생각이라면 관두세요. 감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치는 취미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고병갑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도르마에게 명령했다.

「도르마, 저 여자를 깨워라.」

「알겠습니다.」

도르마가 아리에나에게 걸어 둔 주술을 회수했다. 그러는 사이 서시희는 아리에나 주위의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뭘 하는 거지?”

“구속이요.”

“그럴 필요까지 있나? 팔다리를 다 분질러 놨어. 벨트로 묶어 놓기까지 했고.”

“상대는 SS급이에요. 전투 타입은 아니라지만 신중을 기울여서 나쁠 건 없죠.”

“맞는 말이군.”

일그러진 공간이 아리에나의 수족을 완벽히 옭아맸다. 팔다리가 성했어도 저 구속에서 벗어나는 건 어려울 성싶었다.

얼마 뒤엔 아리에나가 의식을 일깨웠다. 그녀는 비몽사몽 한 표정으로 몇 분간 신음을 흘렸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다시 몇 분 뒤. 그녀의 두 눈동자가 명백히 이쪽을 보았다. 다음으론 꿈쩍할 수 없는 자신의 몸을 내려보았다.

“이런 썅…….”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댈 줄 알았건만 아리에나의 반응은 예상외로 덤덤했다. 그녀는 아주 빠르게 본인의 상황을 자각했고, 곧 체념했다.

다만 왼편에 선 고병갑을 확인했을 땐 저절로 몸을 움츠렸다. 아리에나의 눈엔 고병갑과 랜드리올, 그리고 시커먼 악마가 겹쳐 보였다.

그녀가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곤 오른편에 선 서시희를 보며 말했다.

“어이, 아줌마. 또 보네?”

“…….”

“대답도 안 해? 뭐, 됐어. 말해 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아, 맞다. 그때 아줌마 짊어지고 도망치던 조그만 계집애, 죽었어.”

어조가 몹시도 장난스러웠다. 반면 서시희의 낯빛은 양잿물처럼 변했다. 아리에나는 멈추지 않고 입을 놀렸다.

“내가 죽였어. 원, 조그만 게 어찌나 발악하던지. 아줌마가 궁금해할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거으갸갹!”

아리에나가 끔찍한 비명을 토했다. 서시희가 손아귀를 오므림에 따라 그녀를 옭아매던 공간이 압축했기 때문이다.

아리에나는 잔뜩 구겨져서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고병갑이 황급히 말리고 나섰다.

“뭐 하는 거야? 죽이면 안 된다니까!”

“안 죽여요. 이렇게 쉽게 죽일 수는 없죠.”

서시희가 오므렸던 손아귀를 풀었다. 속박이 한결 느슨해지니 아리에나의 몸도 덩달아 축 늘어졌다. 뒤틀려 으스러진 살점 사이로 뼛조각이 드문드문 튀어나왔다.

아리에나는 몸을 벌벌 떨면서도 광기의 웃음을 흘렸다.

“아, 아이 씨… 더, 더더, 더럽게… 아… 아프네. 마, 망할 아줌므아갸갹!”

“죽는다고!”

“조절하고 있어요.”

서시희는 평온하다 못해 차가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고병갑은 고개를 내저으며 도르마에게 말했다.

「도르마, 가서 바몬드를 데리고 와.」

「예.」

도르마는 고개를 까닥인 뒤 검은 안개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서시희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날 자극해서 내가 홧김에 너를 죽이길 바랐겠지만 그럴 일은 없어.”

“지… 지지… 진짜 짜증 나네. 아, 아픈, 아픈 건 따… 딱 질색인데. 흐, 흐흐…….”

도르마가 바몬드를 데리고 왔을 때 아리에나는 이미 곤죽이 된 뒤였다. 바몬드는 경악하며 아리에나를 치료했다.

거의 실신 직전이던 그녀가 숨을 토하며 깨어났다. 고통은 한결 가셨겠지만 표정은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치료됐다는 건, 다른 말로 다시 상처 입을 준비가 됐다는 것이니까.

서시희는 고병갑의 만류로 고문을 잠시 관두었다. 고병갑이 앞으로 나섰다. 아리에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려 들지 않았다.

“상호 피곤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네놈들이 꾸미고 있는 계획을 하나부터 끝까지 모두 불어라.”

아리에나가 조소를 머금었다.

“내가 왜 불어야 하지? 어… 어차피 죽을 텐데.”

“협조한다면 죽는 과정이 한결 수월해질 테니까.”

“지랄하네. 저 아줌마가 보고만 있을까?”

고병갑은 서시희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아리에나가 뻔뻔스레 말했다.

“전제가 잘못됐다고, 등신들아. 난 죽기 싫어. 살려 주는 대가로 협상을―”

“착각하지 마. 이건 협상이 아니야.”

고병갑이 못을 박았다. 아리에나가 세모나게 눈을 부라리며 입술을 씹었다.

“어차피 너는 죽는다. 이건 기정사실이야. 사람들을 그렇게나 죽여 댈 때 어쩌면 네 모가지가 날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안 해 봤는데? 세상에 어느 등신이 죽을 일을 생각하며 살아?”

“세상 참 속 편하게 살았군. 뭐가 됐건 선택을 잘해라. 의리를 지키며 고통 속에서 죽어 갈 것인지, 그냥 다 폭로하고 깔끔하게 갈 것인지.”

“퉤!”

아리에나가 고병갑에게 침을 뱉었다. 물론 그는 반사적으로 피해 냈다.

아리에나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나를 무슨 물로 봤나 본데, 똑똑히 들으라고! 나 아리에나 바바디는 그렇게 약아 빠진 애송이가 아니야! 어디 멋대로 해 봐 이 원숭이 자식들아!”

“그런가.”

고병갑은 몸을 획 돌렸다.

「바몬드.」

「말씀하십시오.」

「저 계집이 죽지만 않게 해라.」

「죽지만 않게. 예, 확실히 전해 받았습니다.」

고병갑이 멀어지자 아리에나의 얼굴에도 두려움이 싹텄다.

“어이, 야. 어디 가? 어디 가냐고?”

“이 이후의 일은 당신에게 맡기도록 하지.”

“그래요, 가 봐요.”

“야! 어디 가냐니까? 너도 여기 있으아아아악! 끼야아아악!”

고병갑이 건물을 빠져나갔다. 등골이 서늘한 비명은 한동안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 * *

아리에나 바바디는 세계 최강의 마인드 컨트롤러다. 다시 말해 정신력 하나만큼은 정점에 있다는 소리다.

고병갑은 이 대목에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이틀 밤을 꼬박 고문받고 3일 차에 이르러서야 항복 선언을 한 아리에나를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그런 아리에나를 3일 만에 백기 들게 한 서시희를 칭찬해야 할지.

결국 정하지 못한 그는 부하나 칭찬해 주기로 했다.

「바몬드, 고생 많았다. 들어가서 쉬어라.」

「예…….」

한층 핼쑥해진 바몬드가 터벅터벅 자리를 나섰다. 그리고 집 안 한구석에는 바몬드보다 10배는 수척해진 아리에나가 퀭한 눈을 떨구고 있었다.

“살아 있기는 한 건가?”

“살아 있어요.”

고병갑이 아리에나 앞으로 가서 쪼그려 앉았다. 초점 잃은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이며 고병갑에게 향했다.

그녀가 대번에 말했다.

“…약속해.”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쇳물 두 말은 말아 마신 듯했다.

“약속?”

“날 편안하게 죽여준다고 약속하라고.”

“약속하지. 저번에 말하지 않았던가?”

“무조건… 무조건 그래야 할 거야. 무조건. 네가 약속을 어기면 나는… 나는 정말…….”

고병갑은 그녀의 눈에서 절망과 공포. 그리고 미칠듯한 짜증과 분노를 보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서시희에게 말했다.

“당신도 가서 좀 쉬지 그래.”

“아니요, 나는 괜찮아요.”

“이건 권유가 아니라… 부탁. 그래, 부탁이야.”

서시희는 몇 초간 이쪽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아리에나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그런데 나 물 좀―”

“잡설을 집어치우지. 네놈들의 계획이 뭐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말해.”

“…어, 응.”

아리에나는 순순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고병갑과 함께 온 도르마는 주술을 부려 아리에나의 말을 녹음했다. 혹 잊어 먹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질문에 응답하고, 응답한 내용의 꼬리를 물고 다시 질문하는 일련의 과정이 수십 차례 이어졌다.

긴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리에나는 중간에 끊거나 하는 일 없이 한 번에 모든 내용을 쏟아 냈다.

정오 무렵에 시작한 이야기는 해가 저물어 밤이 돼서야 끝맺음했다.

앉은 자리에서 어마어마한 정보를 받아들인 고병갑은 피곤했다. 하지만 자러 가는 대신 눈을 감고 내용을 정리했다.

‘정말 의욕 떨어지는 스케일이군.’

고병갑이 앞서 알고 있던 사실들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육망교의 수장은 고건룡이며 그들의 최종 목적은 지구에 천상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둘째, 현재 일어나는 몬스터 웨이브는 그들 계획의 일환이며 차후 중국, 인도, 미국의 인간들을 제물 삼아 천상계를 구성할 것이다.

셋째, 육망교의 휘하에는 일루미션이란 길드가 있고 그들은 상부의 지령에 따라 불신자, 즉 일반인들을 학살한다.

거기에 아리에나가 발설한 정보를 합치니 부족했던 정보의 구멍이 메워졌다.

우선은 고건룡의 구체적인 정체에 관한 것이다.

-그 망할 아줌마가 이미 얘기해 줬겠지만 대주교에겐 신이 깃들어 있어. 왜 그 사람이 선택받았는지는 몰라. 어쨌건 대주교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고, 남들이 할 수 없는 일도 할 수 있어.

고건룡의 안에는 아스빌람의 신 마드무트가 잠들어 있다. 그 때문일까. 그는 흔히 기적이라 일컫는 여러 신비를 일으킬 수 있다.

최초 아프리카를 시작으로 아르헨티나와 러시아에 잇따라 일어난 몬스터 웨이브는 그가 일으킨 것이다. 또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 곳에 솟아오른 푸른 기둥 역시 고건룡이 만들어 낸 것이다.

고건룡은 마드무트의 화신답게 푸른 기둥에서 나온 무장병력―신성군―을 통솔할 수 있다. 신성군의 목적은 역시나 푸른 기둥을 사수하는 것.

-맞아, 당신 말대로 기둥은 총 여섯 개야. 아직 세 개뿐이다만 곧 나머지 것들도 솟아오르겠지. 위치는 호주, 캐나다, 프랑스야. 내가 알기론 그래. 기둥이 여섯 개가 되면 그 일이 시작될 거고.

-그 일?

-미국, 중국, 인도인들의 영혼이 산채로 뽑혀 나갈 거야. 그 영혼들은 천상계를 구성하는 데 쓰일 거고. 그리고 바로 이곳 한반도가 우릴 천상계로 올려다 줄 방주가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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